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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82/145)

82화

서걱―!

금빛 검이 마지막 용병의 가슴을 마저 베어 냈다.

용병은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절명했다. 쿵, 소리와 함께 그의 몸뚱이가 땅을 굴렀다.

케이든은 그의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였다. 그가 급하게 검을 바닥에 꽂아 넣으며 몸을 지탱했다.

“허억, 헉…….”

케이든은 땅에 한쪽 무릎을 댄 채 검에 기대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이 식은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하지만 바닥에 흐른 피 중 그의 것은 없었다. 엘판드가 머릿속으로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확실히…… 성장했군.>

‘이런 상황에서 알고 싶지는 않았지만.’

케이든이 짧게 실소하고는 시선을 들었다. 그러자 2황비가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그의 주위에 널린 용병들의 시체를 둘러보는 모습이 보였다.

“……어쩔 수 없나.”

2황비가 조용히 탄식했다.

이렇게나 많은 정령사가 케이든 하나를 죽이기 위해 달려들었는데도 그는 생채기 하나 입지 않았다. 무예에 조예가 없는 그녀가 보기에도 압도적인 실력 차였다.

고개를 내저은 2황비가 몸을 돌려 한쪽 구석에서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는 카를롯타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카를롯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딸을 끌어안으며 자상하게 말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인 것 같구나, 로티.”

“어, 어머니…….”

카를롯타는 제 등을 쓰다듬는 손길이 무서워 벌벌 떨었다.

2황비의 품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녀 역시 케이든과 마찬가지로 마력이 짓눌린 상태였던지라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가능한 것이라고는 입술을 움직이는 것뿐이었다.

케이든 역시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감지하고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2황비가 소매에 감춰 두었던 단도를 꺼내 들어 카를롯타의 등을 겨누었다. 날카로운 칼끝이 촛불에 반짝였다.

“이대로 살아 나갔다가는 너도 편히 죽지 못하겠지. 이 어미가 직접 편히 쉴 수 있게 만들어 주마.”

“무슨……!”

케이든이 경악하며 저도 모르게 땅을 박찼다. 2황비의 손이 카를롯타의 등을 노리고 떨어져 내리는 것이 느리게 눈에 박혀 들었다.

케이든은 단도를 든 손을 잘라 낼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2황비가 카를롯타를 퍽 소리 나게 밀쳐 내더니 케이든을 향해 달려들었다.

“죽어라!”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2황비가 단도를 휘둘렀다.

케이든의 검이 그보다 조금 더 먼저 그녀의 가슴을 꿰뚫었다.

푹―!

“커헉!”

2황비는 심장을 꿰뚫리는 상황에도 단도를 놓지 않았다.

그 바람에 그녀의 몸이 기우뚱 기울어지며 단도가 케이든의 팔을 길게 내리그었다.

“큭……!”

케이든은 옅은 신음을 흘리며 검을 비틀어 뽑았다. 2황비의 몸이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그녀는 눈조차 감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

케이든은 2황비가 완전히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걸음을 떼었다가,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다.

“으윽.”

그는 덜덜 떨리는 팔다리에 힘을 주려 애썼으나 손끝부터 점점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설마, 독인가?’

그렇다면 2황비가 기를 쓰고 그에게 단도를 휘두르던 것도 납득이 갔다.

케이든은 해독이 가능한 빛의 중급 정령, 엔나이를 불러내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으나 잠깐 새 입술이 굳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력 역시 고갈된 상태였다.

그때 넋을 놓고 2황비의 시체를 바라보던 카를롯타가 엉금엉금 기어 케이든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덜덜 떨리는 손을 뻗었다가 거두어들이기를 반복했다.

“괘, 괜찮아? 왜 엔나이를…… 아니, 사, 사람이라도 불러와야…….”

안절부절못하던 카를롯타가 스스로 답을 찾고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바깥으로 나가는 데 사용하던 장치를 움직여 보려 했으나, 전투 중 누군가 손을 쓴 것인지 장치는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그녀는 한쪽에 놓인 상자를 밟고 올라 천장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저기요! 밖에 아무도 없어요? 여기 사람이, 흐으, 사람이 있어요!”

카를롯타가 엉엉 울며 머리 위 천장을 두드렸으나 주위는 고요하기만 했다.

그녀는 정령을 불러내어 입구를 부수려 했으나 본래도 능력이 뛰어난 편이 아니었고, 마력마저 짓눌린 상태라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사이, 케이든은 독이 퍼져 감에 따라 숨 쉬는 것조차 힘겨워졌다.

‘이대로 죽으면, 안 되는데…….’

파트라슈는 그가 카를롯타를 외면할 수 없었다고 말하면 또 미련한 짓을 했다며 길길이 날뛸 것이고, 무엇보다…….

‘디아나가 걱정할 텐데.’

건국제도 같이 보러 가기로 했는데.

그것 말고도 아직 같이하고 싶은 게, 많은데.

케이든은 오로지 그 생각만으로 기를 쓰며 손끝을 움직였다. 그가 뻣뻣이 굳은 몸으로 간신히 상체를 들어 올리던 그때.

―콰앙!

“꺄악!”

밀실의 입구가 굉음을 내며 산산조각 났다. 그 충격으로 카를롯타가 상자에서 떨어져 땅을 굴렀다.

땅 위에서부터 빛이 쏟아졌다. 케이든은 그 빛 한가운데서 몸을 일으키는 인영을 발견하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부엉이?’

부엉이 가면을 쓰고 후드를 눌러쓴, 다소 괴이한 차림새의 인영이 서서히 그에게로 다가왔다.

케이든은 낯선 이의 모습에 경계심을 세우며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새 케이든의 앞까지 다가온 부엉이 가면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 순간 숨이 급격히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이건…….’

왠지 디아나와 닿았을 때와 비슷한 느낌인데.

케이든은 기이한 청량감에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부엉이 가면을 벗기려 들었다. 그러나 그가 미처 손끝을 움직이기도 전, 의식이 툭 끊겼다.

* * *

“……든! 케이든!”

케이든은 누군가 어깨를 흔들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뜨자 걱정이 그득히 어려 있는 디아나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가 눈썹을 일그러트린 채 초조하게 말을 내뱉었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요! 곧 행진이 시작할 텐데……!”

“……디, 아나?”

케이든은 어리둥절하게 그녀의 이름을 내뱉었다.

그 순간 머리가 짧게 욱신거리더니 정신을 잃기 전의 기억들이 쏟아져 내렸다.

“이게 무슨…….”

케이든은 혼란스럽게 말을 잇다가 불현듯 한 손으로 제 목을 감싸 쥐었다.

‘손이.’

손을 움직일 수 있다. 말을 할 수 있다. 숨을 쉬는 것이 힘겹지 않다.

그것을 확인한 그가 고개를 홱 내려 2황비의 단도가 스치고 지나간 자리를 확인했다.

상처가 났던 부분의 옷은 찢겨 있었으나, 벌어진 옷자락 사이로 드러난 피부는 흠 하나 없이 매끄러웠다.

‘설마 그 부엉이 가면이…….’

케이든이 그제야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3황자궁의 후원 구석진 곳, 늘 몸을 숨기던 수풀 근처의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은 채였다.

케이든이 혼란으로 눈매를 찡그리며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이에요. 레밋 경께서 갑자기 당신이 사라졌다고 해서 얼마나 놀란 줄 알아요? 그래서 찾으러 왔더니 이런 곳에서 자고 있질 않나. 혹시 많이 피곤했어요?”

디아나는 뒤늦게 아차 싶었는지 손을 뻗어 그의 볼을 가볍게 쓸었다.

그 손길에서 느껴지는 기분 좋은 감각과 대조되게 그의 머릿속은 한층 더 복잡해졌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이 상황에 대해 더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발하나스 제국의 건국제는 타국의 사신단까지 참석하는 중요한 축일 중 하나였고, 그가 처음으로 주역을 맡은 행사이기도 했다. 그런 자리에 빠질 수는 없었다.

‘행진 후 무도회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 밀실 쪽은 그때 알아보아도 늦지 않아. 지금은 가 봐야 해.’

혹 그가 조금 늦더라도, 아까 본 부엉이 가면이 상황을 정리해 두었을 것이라는 기묘한 믿음이 들었다. 케이든은 조금 비틀대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피로는 고스란히 남아 있었으나 외상이 아물고 독이 사라진 탓인지 움직임에 큰 지장은 없었다.

“디아나, 우선 나…….”

“바로 가실 거죠? 뛰어요!”

케이든이 입을 열어 무언가를 말하려 했으나, 디아나가 그보다 먼저 그의 생각을 알아채고 손을 덥석 붙잡았다.

케이든은 얼결에 그녀를 따라 달리며 긴 분홍색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

디아나를 눈에 담자마자 상황에 맞지 않게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결국 그는 엷게 미소 띤 얼굴로 그녀의 뒤를 따라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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