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촤라락―
루드비히는 망설임 없는 손길로 커튼을 쳤다. 그 바람에 시야가 가로막힌 레베카가 인상을 쓰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게 무슨 짓…….”
“고작 이 정도로 지치시면 안 됩니다.”
“……뭐?”
“금세 지나갈 풍파를 견디지 못하고 나가떨어지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전하이시니까요.”
루드비히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레베카를 바라보며 덤덤히 말을 맺었다.
루드비히 카드몬드, 현 카드몬드 후작.
그는 본디 카드몬드 후작가의 차남이었다.
[어떻게 우리 가문에서 이딴 게…….]
카드몬드 후작가는 황가와 네 공작가를 제외하면 뛰어난 정령사를 가장 많이 배출한 가문이었다.
그런 만큼 카드몬드 가에서 루드비히는 돌연변이 취급을 받았다. 그는 마력을 다룰 수는 있었지만, 하급 정령과도 제대로 계약할 수 없을 정도로 손톱만 한 마력을 타고났으니까.
그로 인해 어릴 적부터 눈칫밥을 먹고 자라서일까. 루드비히는 어렸을 적부터 눈치가 비상했고, 머리가 무척이나 뛰어났다.
하지만 발하나스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정령’이었다. 정령과 계약하지 못한 그는 가문에서 없는 사람처럼 취급받으며 방치되었다.
그의 아버지인 전 카드몬드 후작은 핀들레이 공작에게 아첨하느라 바빴고, 형이라는 놈은 유달리 하얗고 왜소한 루드비히를 무시하고 깔보기 일쑤였다.
처음에는 그런 가족들과 잘 지내보려고 노력했다. 정령은 다루지 못하지만, 그나마 머리가 비상했으니 그것으로라도 가문 사람들에게 쓸모가 되고 싶었다.
[형님, 여기 철자가 틀렸어요.]
[……뭐?]
[철자가 틀렸다고요. 그렇게 쓰시면 안 되고, 이렇게…….]
[이, 이 마력도 쥐꼬리만 한 게 건방지게……! 네가 내 스승이라도 되냐? 어?]
그러나 멍청한 후작가의 일원들은 그조차 받아들이지 못했다.
루드비히는 형의 숙제를 도와주려다가 그에게 뺨을 얻어맞은 이후로 그들과 잘 지내겠다는 생각을 버렸다. 세상은 그의 생각보다 훨씬 더 멍청한 인간들이 판치는 곳이었다.
뺨을 맞은 이후, 루드비히는 오히려 제 잘난 머리를 이용해 가족들의 심기를 긁곤 했다. 그로 인해 폭언과 폭력을 견뎌야 했음에도 그는 굴하지 않았다.
그렇게 루드비히가 상당히 염세적이고 메마른 아이가 되었을 무렵, 카드몬드 후작의 눈물겨운 노력이 빛을 보았다. 그가 뛸 듯이 기뻐하며 형제를 불러 말했다.
[1황녀 전하께서 너희를 말동무로 삼겠다고 하셨다는구나! 플란, 너야 알아서 잘할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너는…….]
후작은 못마땅한 눈으로 루드비히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혀를 쯧 찼다. 그가 아무렇게나 손을 휘휘 저었다.
[플란만 데려가려고 했는데, 1황녀 전하께서 차남까지 함께 데려오라 하셔서 어쩔 수 없이 데려가는 것이다. 그냥 입을 다물어. 알겠느냐?]
[저는 후작님처럼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아양을 떠는 데는 재능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은데요. 제가 왜 1황녀랑 의미도 없고 시간 낭비인 말동무를 해야 하는 거죠?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
[네게 선택권이 있을 것 같으냐! 잔말 말고 따라와!]
루드비히는 진심으로 1황녀의 앞에서 앵무새처럼 재롱을 떠는 데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후작은 1황녀의 말을 거스를 수 없었기에 첫째 아들 플란을 시켜 루드비히를 붙잡게 하고 둘을 1황녀 궁으로 밀어 넣었다.
[플란 카드몬드가 1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드, 듣던 것보다 정말! 훨씬! 아름다우십니다!]
[…….]
1황녀 레베카의 앞에 선 플란은 제 아비를 쏙 닮은 태도로 곧장 레베카에게 말을 붙였다. 하지만 루드비히는 황족의 앞에서도 고집스레 입을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플란이 떠드는 소리를 한 귀로 흘리던 레베카가 루드비히에게 불쑥 물었다.
[너는 왜 가만히 있지?]
[…….]
[말을 못 하는 아이냐.]
[…….]
레베카가 몇 번이고 물었지만 루드비히는 레베카도, 카드몬드 후작도 모조리 환멸이 나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 광경을 본 플란이 기겁하며 습관대로 루드비히를 걷어찼다.
[이 미친 것이……! 감히 황녀 전하께서 하문하시는데 입을 다물어! 네가 정녕 가문을 말아먹으려고 하는 거지! 어!]
플란은 루드비히를 몇 번 더 걷어차며 씩씩댄 뒤 비굴한 웃음을 띠고 레베카를 돌아보았다.
[아하하. 죄송합니다, 전하. 이놈이 마력을 거의 타고나지 못해서인가, 성격에 문제가 좀 있습니다. 제가 제대로 교육해 놓을 테니 부디 마음 푸십시오.]
플란이 그렇게 말하며 발끝으로 루드비히를 툭툭 찼다.
그는 빨리 몸을 일으켜 1황녀에게 사과하라는 듯 눈을 부라렸지만, 루드비히는 그 가소로운 위협을 무시한 채 바닥에 누운 채 몸을 웅크렸다.
그에 눈이 돌아간 플란이 다시 한번 그를 걷어차려던 차에 레베카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주제넘어.]
[……예?]
[저 아이가 무례를 저지른 대상은 나다. 그 말은 곧 무례에 대한 처벌을 내릴 권리 또한 내게 있다는 뜻이지. 그런데 넌, 황녀인 내가 허락도 하지 않았는데 감히 어딜 나서는 것이냐.]
[자,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전하!]
플란이 뒤늦게 제 잘못을 깨닫고 울부짖었지만 레베카는 손짓 한 번으로 그를 응접실에서 내쫓았다.
루드비히는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며 그 광경을 조금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루드비히에게 플란은 보기 싫고 말을 섞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찾아오면 찾아오는 대로 상대해야 하는 존재였다.
그런데 그런 플란이 레베카의 손짓 한 번에 저항조차 못 하고 눈앞에서 사라진 것이 꽤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루드비히는 그제야 바로 서서 레베카를 돌아보았다.
레베카는 의자 팔걸이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은 채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카드몬드 후작가에 학자들도 혀를 내두르게 할 만큼 영민한 차남이 있다 하여 불렀는데, 역시 쓸모가 있어 보이는구나.]
루드비히는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미간을 찡그렸다.
그런 그에게 레베카가 언뜻 오만한 태도로 고개를 치켜들며 제안했다.
[날 위해서 일해라.]
[……싫습니다.]
[어차피 지나갈 풍파에 한 번에 주저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 테냐? 그게 시체와 뭐가 다르지?]
그 말에 루드비히가 눈을 크게 떴다. 레베카는 그를 보며 말을 이었다.
[너를 마음대로 휘두르려 하는 권력자가 싫으냐? 권력자에게 휘둘리기만 하는 삶에 환멸을 느끼느냐?]
[…….]
[그렇다면 네가 그 권력자를 꺾을 만큼 대단한 사람이 되어라. 당장은 불가능하다면 그 권력자를 꺾을 수 있는, 더 큰 권력을 지닌 사람의 편에 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
[…….]
[그리고 그게, 지금 네 눈앞에 있는 나다.]
그렇게 말하는 레베카는 지극히 오만했다. 그리고 오만한 만큼 빛나고 있었다.
루드비히는 제가 본 그 빛을 믿어 보기로 했다.
그는 레베카의 손을 잡은 이후 그녀의 지원 아래 승승장구했고, 결국 후작과 형을 독살하고 가문의 원로들을 제 편으로 끌어들여 후작위를 물려받았다.
한데 정작 그렇게 루드비히를 수렁에서 끌어올린 레베카가, 건국제 행진을 무력하게 지켜보고 있는 것이 그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루드비히가 쐐기를 박았다.
“이대로 시체나 다름없는 삶을 사실 겁니까.”
“…….”
그 말에 잠시 침묵하던 레베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손을 휘둘렀다.
짝―!
루드비히의 고개가 돌아갔다. 레베카는 무심히 손을 털며 몸을 돌렸다.
“아니.”
“…….”
“그럴 수야 없지. 방금은 건방지게 내 앞을 가로막은 대가다.”
레베카가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의자에 앉았다. 그 자세가 그와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할 말이 뭐지?”
레베카가 평소대로 돌아온 것을 확인한 루드비히가 만족스러운 기색으로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옐링 공작이 3황자 측으로 넘어가 버렸으니, 슬슬 다시 균형을 맞출 준비를 해야지요.”
하나를 주었으니, 하나를 빼앗는다.
지극히 단순한 이치를 들먹이며 그가 웃었다.
“이젠 굳이 1황자 전하를 살려 둘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