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케이든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카를롯타의 뒤를 따라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카를롯타는 후원과 이어진 숲으로 걸음을 들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어느 정도 눈물을 그쳤으나, 간간이 불안한 기색으로 제 목을 내려다보았다.
‘어디까지 가는 거지.’
케이든은 점점 덥수룩해지는 주변의 수풀을 힐긋 일별했다.
황궁의 후원과 이어지는 숲은 황족의 산책을 위해 만들어진 것인지라 그다지 넓지 않았다.
만약 케이든이 사라진 것을 눈치챈 파트라슈가 수색을 시작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숲에 다다를 텐데 굳이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온 이유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깨어졌다.
“잠깐…….”
카를롯타가 쉰 목소리로 내뱉은 말에 케이든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들은 숲 한가운데에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눈에 띄는 구조물은 보이지 않았다. 2황비의 모습 역시.
“……찾았다.”
다음 순간. 카를롯타가 작게 중얼거리고는 수풀 사이의 한 곳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드드득―
그러자 분명 땅바닥이었던 곳에서 네모반듯한 입구가 나타났다. 흙과 풀로 뒤덮인 출입구는 잘 살펴보아도 위치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티가 나지 않았다.
‘황궁에 이런 곳이 있었다고?’
케이든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카를롯타는 입구를 손으로 붙잡은 채 눈물이 말라붙은 얼굴로 가만히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젠장.’
<아래에서 불길한 기운이 느껴진다. 그래도 들어갈 텐가?>
머릿속으로 엘판드가 위험을 경고했다. 케이든 역시 2황비가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채 그를 끌어들였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잖아.’
<……그래. 그게 너지.>
엘판드는 혀를 끌끌 차면서도 더는 그를 만류하지 않았다.
케이든은 숨을 한번 깊게 들이쉰 후 입구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가 몸을 낮춰 착지하자 작게 쿵, 소리가 났다.
‘몸이…… 무겁군.’
땅 아래로 내려서자마자 무언가가 어깨를 짓누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케이든의 등 뒤로 카를롯타가 그를 따라 들어오는 기척이 났다. 이내 입구가 닫히며 햇빛이 사라졌다.
그 대신 땅 아래를 밝히는 것은 2황비의 등 뒤에서 빛나는 촛불뿐이었다.
“어서 오렴, 로티. 고생했다. 이리 온.”
2황비가 카를롯타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다정하게 팔을 벌렸다.
그 행동에 카를롯타가 눈에 띄게 어깨를 움찔했다. 불안한 눈길로 제 목에 걸려 있는 고리를 힐긋 일별한 그녀가 주춤주춤 제 모친에게로 다가갔다.
“어, 어머니. 저…….”
“그래, 무서웠지. 이제 풀어 줄게. 괜찮아. 다 괜찮아, 아가.”
2황비는 카를롯타를 꼭 끌어안고 등을 두드려 준 후, 집게 모양의 마도구를 이용해 그녀의 목을 감싸고 있는 고리를 잘라 냈다.
탱그랑―
반으로 갈라진 고리가 땅바닥을 굴렀다. 고리에 서려 있던 마력이 흩어졌다.
카를롯타는 목을 죄던 고리가 사라지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나 2황비는 제 할 일을 마쳤다는 듯 그런 딸에게 눈길을 주지도, 그녀를 부축하지도 않았다.
집게 모양 마도구를 아무렇게나 내던진 2황비가 케이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엉망으로 얼굴을 구긴 채 그 우습지도 않은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케이든이 사납게 물었다.
“이게 다 뭐 하는 짓입니까, 2황비 전하.”
2황비의 곁에는 제각기 손에 무기를 든 장정 수십이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며 서 있었다.
2황비는 그들의 한가운데서 몸을 빙글 돌리며 소녀처럼 웃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케이든에게 단 한 번도 미소를 보여 주지 않았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썩 정상은 아닌 듯했다. 하는 말 역시 마찬가지였다.
“행복해지려는 것이지.”
2황비, 아델라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3황자를 죽여서 이곳에 시체를 감춰 두면, 아마 제국이 멸망하는 날까지 아무도 찾지 못할 것이다.’
이곳은 어린 카를롯타가 길을 헤매다가 우연히 발견한 지하 밀실이었다.
지금의 카를롯타는 그 기억을 잃은 듯했지만, 2황비는 제 딸아이가 비밀이라며 속삭였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훗날 1황비를 위해서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2황비는 때가 되자 이 지하 밀실을 마력 구속구를 응용해 개조했다. 그리고 고용한 용병들에게는 밀실에 설치된 것과 반대의 파장을 지닌 마도구를 미리 지니게 해 케이든에게만 불리한 전장을 만들었다.
2황비는 어떻게 해서든 케이든을 죽여 이곳에 묻을 작정이었다.
‘만약 3황자를 죽이는 데 성공하면 이대로 영영 실종된 것으로 만들면 돼. 만약 내가 죽고, 3황자가 이곳에서 살아 나가더라도 1황비 전하께 화살이 돌아가지 않도록 준비해 뒀으니 건국제 행진에 서는 것만이라도 막는다.’
2황비는 혹 케이든을 죽이는 데 실패하고 자신이 죽을 경우를 대비해 미리 유언장을 남겨 두었다.
<제 아들, 페란트는 다른 누구도 아닌 3황자의 계략으로 인해 죽은 것입니다. 어미인 제가 그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습니다. 이제라도 3황자를 제 아들 가는 길의 길동무로 삼겠습니다.>
2황비는 자신이 케이든을 죽이려 시도한 것이 1황비를 위해서가 아닌, 오로지 자신의 독단적인 복수인 것처럼 말을 꾸몄다.
만약 2황비가 죽지 않고 이곳에서 살아 나간다면 그 유언장은 감쪽같이 불탈 것이나, 그녀가 죽는다면 1황비 측의 사람에 의해 공개될 것이다. 모든 과오를 끌어안고 가는 것은 그녀 하나여야 했으니까.
한편, 케이든은 미친 사람을 보듯 2황비를 노려보며 말을 짓씹어 뱉었다.
“……행복, 이라고요.”
“그래. 네 그 지긋지긋한 목숨을 거두면 행복이 찾아올 테니까. 너 하나만 없다면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 3황자.”
2황비의 그 말이 비수가 되어 케이든의 마음을 꿰뚫었다.
어린 시절, 레베카를 치켜세우며 자신을 깔아보던 사람들의 눈빛이 떠올라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혔다.
[너만 없으면 되는데.]
그 말이 저주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세상은 그가 없어도 잘 굴러갈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가 죽어 사라진다면 기뻐 날뛸 이들이 사방에 널리고 널렸다.
그래서 한때는 죽음을 바랐다.
이렇듯 어딜 가나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일 바에는 차라리 죽음에게라도 환영받고 싶었던 때가,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당신이 그 누구보다 행복해지길 바라요.]
이제는 아니었다.
케이든 본인보다 더 그의 행복을, 삶을 바라 주는 이가 그의 곁에 있었다.
디아나의 존재로 인해, 케이든은 2황비의 저 말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상처받지 않고 단호히 입을 열었다.
“아니.”
“……뭐?”
“내 목숨을 거두는 것이 ‘모두’가 아니라, 당신과 1황비가 행복해지는 길이겠지. 내 말이 틀렸나?”
케이든은 존대를 그만두었다. 그가 뱉은 말에 2황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남김없이 사라졌다.
케이든은 소름을 감추며 익숙하게 금빛 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2황비 주변에 서 있는 장정의 수를 헤아리던 그가 눈썹을 설핏 일그러트렸다.
‘마력이 짓눌린 기분이군. 저들은…… 마도구라도 지니고 있는 건가.’
그는 저와 달리 힘겨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 용병들을 보며 입 안으로 쯧 혀를 찼다.
의미 없는 대화는 끝났다. 2황비와 케이든 모두 그것을 알고 있었다.
표정이 사라진 얼굴로 케이든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2황비가 입술을 달싹였다.
“죽여.”
짧은 명령이 떨어지고, 그와 동시에 수십 명의 정령사가 케이든에게 달려들었다. 서느런 얼굴의 케이든이 검을 고쳐 쥐고는 땅을 박찼다.
* * *
“무슨 일이니, 루비. 급한 게 아니면 나중에 얘기하자. 조금 피곤하구나.”
레베카는 제 방 창가에 걸터앉아 창문 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무심히 중얼거렸다.
그녀는 근신 중이었지만 사실 그녀를 포함해 그녀의 측근들은 사람들의 시선만 조심할 뿐, 전처럼 자유롭게 백염궁을 드나들었다. 그들에게 황제의 명이란 고작 그 정도의 의미였다.
행진이 시작되기 전의 짧은 틈을 타 레베카를 찾아온 루드비히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걸음을 떼었다.
촤라락―
루드비히는 망설임 없는 손길로 커튼을 쳤다. 그 바람에 시야가 가로막힌 레베카가 인상을 쓰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게 무슨 짓…….”
“고작 이 정도로 지치시면 안 됩니다.”
“……뭐?”
“금세 지나갈 풍파를 견디지 못하고 나가떨어지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전하이시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