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특히나 엘리엇은 근처의 귀족들이 그를 희한한 눈으로 힐끔거리는데도 좀처럼 눈물을 그칠 줄 몰랐다.
‘케이든…….’
그러나 엘리엇은 북받치는 마음을 좀처럼 진정시킬 수 없었다.
[1황자 전하, 부디…… 제 아들을, 부탁드립니다…….]
엘리엇이 케이든을 보기 위해 3황비 궁으로 갈 때마다 그를 따듯하게 맞아 주었던 3황비는, 죽기 직전 그에게 그리 부탁했다.
당시의 엘리엇은 툭하면 황자의 자질이 부족하다며 귀족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마력을 다루는 능력은 전무, 그것만으로도 치명적인 상황에 그는 몸마저 약해 툭하면 앓아눕기 일쑤였다.
그와 대비되게 레베카는 많은 마력을 타고났고, 어린 나이임에도 불의 상급 정령과 계약했을 정도로 뛰어난 자질을 지니고 있었다.
모두가 엘리엇을 황족의 껍데기를 쓴 반편이라고 헐뜯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안녕하세요, 1황자 전하.]
그런 상황에서 3황비는 레베카가 태어난 이후, 황후를 제외하면 처음으로 그의 앞에서 비웃음이 아닌 진짜 ‘미소’를 보여 준 이였다. 마음이 가는 것이 당연했다.
엘리엇은 침대에 누워 있지 않을 때면 3황비 궁에 놀러 가곤 했다. 3황비는 언제나 친구처럼 그를 맞이해 주었다.
그래서 엘리엇은 케이든이 태어난 이후로는 아예 그곳에서 살다시피 했다.
처음에는 엘리엇에게 섭섭해하던 황후도 붕 떠 버린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3황비를 외면하지 못하고 점차 그녀를 친구처럼 여겼다.
하지만 3황비는 1황비의 견제 탓에 나날이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태생적으로 치열한 황궁이 어울리지 않는 성격이었다.
결국 3황비는 황후가 백방으로 그녀의 병을 낫게 할 방법을 수소문해 주었음에도 시름시름 앓다가 숨을 거두고 말았다.
꼭 3황비의 유언이 아니었더라도, 엘리엇은 이미 케이든을 제 몸처럼 아끼고 있었으므로 3황비의 죽음 이후 홀로 남은 케이든을 열과 성을 다해 돌봤다.
정통성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신 대신, 인품과 능력 둘 모두를 갖춘 케이든을 황위에 세우려 애썼다.
그럼에도 케이든은 언제나, 매 순간 생사의 고비를 넘어야 했다.
그런 그가 이렇듯 장성하여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고, 레베카를 제치고 건국제의 선두에 서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하긴, 듣기로 엘리엇 전하께 케이든은 자식이나 다름없다고 했으니까.’
디아나는 짠한 마음에 플뢰르와 함께 엘리엇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어?’
그때, 디아나는 익숙한 인영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개를 살짝 돌리자 단상 너머, 황궁 정문에서 누군가 이쪽으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파트라슈 레밋?’
디아나는 파트라슈의 모습을 보고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파트라슈 역시 제4연대의 일원으로, 케이든의 뒤를 따라 행진에 참여해야 할 텐데.
대관절 그가 행진을 앞두고 이곳까지 달려 나올 이유가 무엇이 있단 말인가?
그러나 파트라슈는 점차 그녀에게 가까워졌다. 디아나는 그가 제게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더더욱 혼란스러워했다.
그사이, 인파를 헤치고 디아나에게 다가온 파트라슈가 그녀에게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3황, 자비 전하.”
“레밋 경. 대체 왜 여기…….”
“잠시 귀를, 좀.”
파트라슈가 숨을 헐떡거리며 띄엄띄엄 말했다.
디아나와 함께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던 플뢰르와 엘리엇이 재빠르게 몸을 물려 주었다.
디아나는 그들에게 가볍게 묵례해 고마움을 표하고는 몸을 기울였다. 파트라슈가 그녀와 얼굴을 가까이하고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속삭였다.
“비 전하, 혹 케이든 전하께서 뭔가 말씀하신 적 없으십니까? 어디를 가야 한다거나, 해야 할 일이 있다거나.”
“행진에 참여할 준비를 해야 하니 이따가 보자고……만 말씀하셨는데요.”
파트라슈의 말에 대답하던 중 문득 선득한 불안감이 심장을 스치고 지나갔다.
디아나가 설마설마하는 순간. 파트라슈가 난처하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3황자 전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쿵.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일순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는 느낌이었다.
‘최근에는 마력이 흔들리는 일이 전혀 없길래 힐라사도 물려 두었는데. 왜 하필 이때…….’
디아나는 손끝이 떨려 와 양손을 세게 모아 쥔 채 가까스로 입술을 달싹였다.
“……케이든이 사라진 걸 알게 된 지 얼마나 됐어요?”
“삼십 분이 조금 더 지났습니다. 사용인들에게 물어보니 비 전하께서 3황자궁을 벗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지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아직 황궁 안…… 적어도 수도에는 계시겠네요.”
“예. 그래서 황궁부터 수색 중인데, 다른 사람들의 귀에 이 소식이 들어가면 곤란하여 최소한의 인력으로 찾는 중이라 수색이 더딥니다. 행진 시작까지 이제 겨우 한 시간 반 남았는데……. 우선 알겠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파트라슈는 마음이 급한지 디아나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꾸벅 고개를 숙인 후 황궁 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디아나는 파트라슈와 대화하던 그 자세로 굳어 있었다. 심장이 쿵쿵 뛰며 귓가가 먹먹해졌다.
‘설마 또 발작이라도 일어난 건…….’
[디아나.]
저를 보며 녹아내릴 듯 웃던 그가 싸늘하게 식어 있는 모습을 상상한 그녀가 저도 모르게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아나!”
그 순간, 주변의 소음이 확 가까워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싶더니 플뢰르가 그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디아나, 괜찮아요? 무슨 일이에요?”
“아…….”
플뢰르의 부름에 퍼뜩 정신이 되돌아왔다. 시선을 돌리자 플뢰르와 엘리엇이 걱정을 한가득 담은 표정으로 그녀를 살피고 있었다.
디아나는 초점을 되찾은 눈으로 재빨리 웃어 보였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눈만 굴려 주위를 살폈다.
안 그래도 디아나는 건국제의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케이든의 아내로서 굉장히 주목받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제4연대 소속 기사인 파트라슈가 다녀가자 사람들은 이제 거의 대놓고 그녀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힐끔대고 있었다.
‘찾으러 가야 하는데.’
디아나가 초조하게 빠져나갈 길을 찾았다. 그러나 황족의 자리는 단상 바로 앞, 눈에 가장 띄는 곳이었다.
이렇듯 시선이 쏠려 있는 상황에서 그녀가 갑자기 자리를 비우면 의아함을 느끼는 사람이 늘어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케이든의 실종 소식이 알려질 가능성도 커진다.
‘어떻게 해야…….’
디아나는 절망스럽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였다.
“디아나.”
플뢰르가 다정한, 그러나 동시에 단단한 미소를 띠고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디아나가 놀라 고개를 돌리니 그녀가 싱긋 웃고는 한 손으로 입 모양을 가리며 속삭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케이든 전하께 무슨 일이 생긴 거죠?”
망설이던 디아나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자 엘리엇이 몸을 기울여 물었다.
“찾으러 갈 거예요?”
“……네.”
디아나가 주먹을 움켜쥐며 결연히 답했다.
잠시간 청보랏빛 눈을 들여다보던 엘리엇이 부드럽게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났구나, 케이든.’
그는 케이든에 대한 걱정과 애정으로 그득한 디아나의 눈을 마주 보며 빙긋이 웃었다.
“혼자서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큰 도움은 못 되더라도, 우리는 가족이니까.”
가족.
그 단어가 새삼스럽게 가슴에 박혀 들었다.
지금껏 디아나에게 가족이란 서로의 살을 파먹는 존재일 뿐이었다.
그러나 플뢰르와 엘리엇이 저 단어를 내뱉자 어쩐지 굉장히 든든하게 들렸다.
디아나는 목이 메는 듯한 먹먹한 기분에 간신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것을 확인한 엘리엇이 싱긋 웃었다.
“좋아요. 그럼…….”
다음 순간. 그가 돌연 고통스럽게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제 가슴을 움켜쥐더니, 옆으로 쓰러졌다.
쿵! 하는 제법 큰 소리와 동시에 플뢰르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허억, 큭……!”
“세상에, 여보!”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놀라 플뢰르를 쳐다보았다가, 엘리엇이 쓰러진 것을 보고 비명을 지르며 달려왔다.
“1황자 전하!”
“괜찮으십니까!”
평소 몸이 약해 자주, 전조 없이 쓰러지곤 했던 엘리엇이기에 의심은 없었다.
사람들이 저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옹기종기 모여들고, 그들의 시선이 오롯이 엘리엇 하나에 쏠린 순간.
‘가요, 디아나.’
‘고마워요.’
플뢰르와 시선을 주고받은 디아나가 곧장 인파에 섞여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