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아델라.”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2황비가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당황해 몸을 일으켰다.
“1황비 전하. 왜 여기까지…….”
“페란트의 장례식이잖아. 늦게 와서 미안할 뿐이야.”
1황비는 전에 비해 눈에 띄게 수척해진 얼굴로 시녀의 부축을 받아 무덤 가까이 다가왔다.
2황비가 시녀를 대신해 부축을 맡았다. 카를롯타는 그들의 눈치를 보다가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저는 그럼 먼저 궁으로 돌아가 있겠습니다. 두 분 편하게 말씀 나누세요.”
“그러렴.”
1황비가 허락의 말을 내뱉자 카를롯타는 서둘러 사라졌다.
이내 시녀마저 손짓으로 물린 1황비가 페란트의 무덤 앞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전하, 바닥이 찹니다. 이러시다가 몸이 더…….”
그 순간 1황비가 울음을 터트렸다. 그녀가 2황비의 손을 꽉 움켜쥐며 흐느꼈다.
“아델라, 아델라…….”
“나 여기 있어. 진정해, 록산느.”
2황비 아델라가 다급하게 1황비 록산느를 끌어안고 다독였다.
그러나 록산느는 쉽사리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아델라가 그녀를 추슬러 안으려 했지만 록산느는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인지 바닥에 엎드리듯 쓰러졌다.
“아델라, 나 너무 무서워…….”
“…….”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지금까지 아득바득 쌓아 온 모든 게, 한순간에 이렇게 위태로워졌어…….”
아델라는 말없이 록산느의 흐느낌을 듣고 있었다.
록산느가 더듬더듬 아델라의 팔을 찾아 쥐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아름다운 연푸른색의 눈이 눈물에 젖어 일그러져 있었다.
“아델라.”
“…….”
“아델라…….”
“……응.”
아델라에게서 마침내 대답이 돌아왔다. 록산느는 그녀에게 매달려 처절하게 속삭였다.
“네가 정말로, 진심으로 나를 위한다면.”
“…….”
“나를 위해서 3황자를 죽여줘, 제발, 제발 죽여줘…….”
록산느는 흐느끼며 아델라의 품에 고개를 박았다. 그녀가 어깨를 들썩이며 더운 숨과 눈물을 함께 쏟아 냈다.
[아버지, 그분은…….]
[인사해라, 록산느. 네 새어머니가 될 사람이다.]
그녀의 나이 스물둘. 핀들레이 공작이 후처를 들였다.
록산느는 공작의 후처를 눈에 담은 순간부터 불길함을 느꼈다. 그리고 공작이 늘그막에 아들을 얻으면서 그 불길함은 현실이 되었다.
[아버지! 어떻게 제게 이러실 수 있어요? 황제와 결혼이라니요? 그것도 정비가 아닌 후비라니요? 어떻게……!]
[잔말 말고 따르거라. 나는 네게 선택권을 준 적이 없다.]
[……저는 핀들레이의 후계자입니다.]
[그 자격 또한 결국 가주인 내가 주는 법이지. 핀들레이의 후계자는 조셉이다. 번복은 없어.]
[아버지!]
고작 조셉이, 핀들레이 공작이 ‘선호’하는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록산느는 후계 자리에서 밀려났다.
후계자로 태어나 오롯이 핀들레이 공작가의 번영을 위해 준비해 온 모든 것이 한순간에 쓸모없게 되어 버렸다.
고작 공작의 말 한마디로.
황제와의 결혼이 결정된 그날. 록산느는 아델라를 붙잡고 하염없이 울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나는 앞으로 그 무엇도 빼앗기지 않을 거야, 아델라. 절대로.]
록산느는 언제나 그녀가 닿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를 갈망했다.
핀들레이 공작가에 있었을 때는 그것이 공작위였고, 지금은 황위였다.
하지만 황비인 록산느는 적법하게 황위에 오를 수 없었다. 적법하게 황위에 오를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녀의 자식뿐이었다.
하여 록산느는 레베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녀를 황위에 올릴 준비를 했다.
아니, 사실 레베카가 태어나기 전부터 제 자식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 살을 깎는 노력을 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질 위기에 놓였다.
또다시 제가 원하던 것을 난데없이 나타난 이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델라, 제발…….”
그 애원을 거부할 재간은 없었다.
아델라는 일견 평화롭게까지 보이는 얼굴로 록산느의 등을 감싸 안았다. 여린 등에 볼을 기댄 그녀가 눈을 감고 잠잠히 답했다.
“알겠어.”
“흐으, 흑, 정, 정말……?”
“응, 정말. 어차피 이번 일도 내 잘못이고 내 실책이었는걸.”
그 말에 록산느가 몸을 일으키려 했다.
아델라가 록산느를 감싸 안던 팔을 거두자 록산느가 상체를 세워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아델라는 록산느의 눈물을 닦아 주고 그녀의 이마에 입 맞췄다.
아델라의 얼굴에 더없이 해사한 웃음이 떠올랐다.
“너를 위해 죽을 수 있어서 기뻐. 내게 잘못을 책임질 기회를 줘서 고마워…….”
“흐윽…….”
아델라가 록산느를 끌어안고 그녀의 등을 다독였다. 그녀는 익숙한 체온과 호흡을 가만히 음미했다.
[아버지, 저 저 애를 시녀로 쓰고 싶어요.]
아델라는 몰락 귀족으로 태어나 한평생 술주정뱅이 부모의 술값 대용으로 살았다.
그러던 중, 도박에까지 손을 댄 아버지가 그녀를 어느 귀족의 정부로 팔아넘기려 했고, 도망치다가 잡혀 꼼짝없이 끌려갈 뻔했을 때 록산느를 처음 만났다.
록산느는 그날 처음으로 핀들레이 공작이 반대함에도 제 의견을 굽히지 않았고, 그렇게 아델라를 살렸다.
록산느가 살린 목숨이니 록산느가 필요할 때 바치는 것이 당연했다.
“잘못된 것들은 내가 전부 껴안고 갈게.”
그래서 아델라는 제 구원자에게 다정히 속삭였다.
“그러니 너는 아무것도 포기하지 마.”
* * *
어느덧 사교 시즌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그 말은 곧 건국제가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뜻이었다.
케이든은 방어전의 우승자로 건국제 행진의 선두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해야 할 일은 단지 행진의 선두에 서는 것뿐이 아니었다.
건국제는 제국 안팎으로 굉장히 중요한 행사였고, 선두의 상징성이 두드러졌다.
건국제 행진의 선두에 선 이가 곧 제국의 얼굴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레베카와 루드비히가 괜히 방어전의 승리를 지키려 애썼던 것이 아니었다.
하여 케이든은 행진 이외에도 사신단 맞이, 건국 기념 무도회의 첫 춤 연습 등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디아나는 케이든과 함께 건국 기념 무도회 첫 춤 연습을 하다가 심각하게 입을 열었다.
“케이든.”
“응?”
“이 춤 좀…… 많이…….”
야하지 않나요?
디아나는 뒷말을 속으로 삼키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케이든과 디아나는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몸을 밀착하고 있었다.
‘레베카가 출 때는 이 정도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막상 자신이 당사자가 되니, 함께 춤을 추는 사람과 한 몸이 된 듯한 자세가 굉장히 민망했다.
디아나는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서 일부러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툴툴거렸다.
“대체 왜 건국 기념 첫 춤을 이렇게 만든 걸까요.”
“음, 사실 이건 황가의 체면이 있어서 비밀이긴 한데.”
디아나의 말에 케이든이 난감한 듯 웃음 짓더니 그녀의 귓가에 속닥였다.
“초대 황후이셨던 니오타 핀들레이 님께서 초대 황제인 데이지 블루벨 님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첫 건국 기념 무도회에서 아내를 품 안에 끌어안고 놓지 않느라 춤을 거의 추지 못하셨을 지경이라고 하더군. 그런데 그게 사신단의 눈에는 좋게 비쳤나 봐. 그래서 그 후로 건국 기념 무도회의 첫 춤은 이런 식이 되었다고 들었어.”
“금슬이 좋으셨다니 좋은…… 일이긴 한데. 그래도 조금 민망하지 않아요? 사실은 좀 많이요…….”
“어어, 움직이지 마. 간지럽단 말이야.”
디아나가 불편함을 호소하듯 품에서 바르작거리자 케이든이 그녀의 허리를 감싼 팔에 더 바짝 힘을 주었다.
그 바람에 디아나는 케이든의 가슴에 코를 박았다. 작게 꿍, 하는 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