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페란트는 이내 보고에서 들었던, 군집형 마물들이 몸을 감추고 있다는 동굴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는 새까만 동굴을 내려다보며 잠시 숨을 골랐다.
안쪽이 하나도 들여다보이지 않을 만큼 짙은 어둠이 저를 향해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는 듯한 모습에 본능적으로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그는 이를 악물고 두려움을 털어 내듯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할 수 있어.”
여기서 되돌아갔다가는 웃음거리밖에 더 되겠는가. 그리고 레베카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운디네.”
페란트가 나직이 물의 하급 정령을 부르며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물로 이루어진 사슬이 생겨났다. 그는 그것을 세게 움켜쥐었다.
숨을 후, 크게 들이쉰 페란트가 땅을 박찼다.
“으아아아!”
그는 공포를 감추기 위해 우렁찬 함성을 내지르며 동굴 안으로 뛰어들었다.
한 뼘 정도 되는 작은 거미 형태의 마물들이 어둠 속에서 끽끽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정신없이 사슬을 휘둘러 그들을 베어 냈다.
서걱―!
페란트가 사슬을 휘두를 때마다 마물들이 무참히 죽어 나갔다. 그는 생각보다도 훨씬 더 수월하게 마물들을 도륙하자 점차 미소를 띠다가, 끝내 희열에 찬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하하하! 그래! 이거 보라지! 내가 누님 옆에서만 안전할 수 있다고? 나도……!”
끼이이이익.
그 순간, 새끼 마물들의 울음소리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낮고 묵직한 울음소리가 동굴을 울렸다. 페란트는 뒷덜미에 소름이 쭈뼛 돋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동굴 천장에 웅크려 있는 우두머리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저건…….’
저건 잡을 수 없어.
직감과 함께 운디네가 그의 귀에 속삭였다.
‘도망쳐.’
머릿속으로 전해지는 뜻을 이해하는 것보다 본능이 빨랐다.
페란트는 저도 모르게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다가 몸을 홱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여유로웠던 얼굴이 창백하게 물들었다.
끽끽끽끽.
등 뒤로 우두머리 마물의 울음소리와 그에 반응하는 새끼 마물들의 울음소리가 겹쳐 들렸다. 등 뒤로 빠르게 기척이 가까워졌다.
“큭, 거의 다 왔……!”
헐떡이며 달리던 페란트가 저 앞에서 희붐하게 빛나는 출입구를 보고 안도의 미소를 띠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그가 도륙했던 새끼 마물들의 피를 밟고 크게 휘청였다. 순간 심장이 그대로 멎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
쾅!
페란트는 커다란 소리를 내며 울퉁불퉁한 돌바닥을 굴렀다. 그 즉시 마물들이 그를 덮쳤다.
“끄아아악!”
고통스러운 비명 소리가 동굴을 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마물들은 제 배를 채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페란트는 마물 틈으로 희미하게 아른거리는 동굴 입구를 향해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뻗었다. 그의 입이 힘겹게 뻐끔거렸다.
“누, 누…….”
레베카 누님.
우습게도 이러한 상황이 되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레베카의 이름이었다.
이내 그의 시야에 조금이나마 보이던 빛줄기까지 마물의 몸뚱이에 가려졌다.
* * *
푹―!
케이든은 마지막 돌진형 변종 마물의 목에 검을 찔러 넣었다.
비명을 내지르며 발버둥 치던 마물은 이내 미동 없이 축 늘어졌다.
케이든이 마물의 목에서 검을 뽑아내며 외쳤다.
“다 정리됐나!”
“이쪽은 끝났습니다!”
“이쪽도요!”
기사들은 마물의 사체를 들춰 마물이 살아 있지는 않은지 확인한 후 외쳤다.
상황이 종료되었음을 확인받자 기사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아구구, 앓는 소리를 내며 땅에 주저앉거나 무기에 기댔다.
대검에 기대어 숨을 고르던 부연대장이 씩 웃었다.
“그래도 안타르가 합류해서 그런가, 사망자는 한 명도 없군요. 쓸 만한 방어 전력이 있다는 게 이렇게 든든한 일일 줄이야.”
“과찬이십니다.”
“뭐가 과찬이야, 인마! 좀 더 자신감을 가지라고.”
다른 제4연대 기사들이 겸손은 기만이라며 안타르를 에워싸고 그에게 장난을 걸었다.
안타르는 아직도 이런 시끌벅적한 애정이 낯설었지만 싫지는 않았기에 그들을 내버려 두었다.
한편, 파트라슈는 케이든이 제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전하, 왜 그러십니까?”
“어, 아니. 그냥…….”
케이든은 반사적으로 대답하려다가 급하게 말끝을 흐렸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파트라슈는 그가 입을 닫았음에도 딱히 캐묻지 않았다.
케이든은 눈썹을 설핏 구긴 채 제 손바닥을 응시했다.
‘……왠지 마력이 전보다 줄어든 것 같은데. 착각인가?’
<마냥 착각은 아닐지도. 어차피 네가 원래 지니고 있던 마력이 120이라고 했을 때, 110으로 줄어든 것 정도다. 네 몸으로 다룰 수 있는 마력은 100이 한계이니 차이는 없어.>
엘판드가 케이든의 머릿속으로 대답을 흘렸다. 그는 그 말을 듣고 안도했지만, 여전히 마력이 줄어든 이유에 대해서는 알 수 없어 의아스러웠다.
‘뭐, 마력이 100 이하로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면 상관없지. 애초에 마력 과잉으로 태어났으니까.’
케이든은 이내 어깨를 으쓱여 상념을 털어 냈다.
“사체를 수습해라. 돌아가…….”
그 순간.
쿵―!
숲이 통째로 흔들리는 듯한 진동과 함께 땅이 울렸다. 기사들은 허둥지둥 손으로 땅을 짚어 중심을 잡았다.
“뭐, 뭐야?”
흔들림은 얼마 지나지 않아 멎었으나 당황은 가시지 않았다. 기사들이 어리둥절한 시선을 주고받으며 웅성거렸다.
그때, 케이든이 멀리서 희미하게 마력이 일렁이는 것을 감지하고는 고개를 홱 돌렸다.
검은 눈이 가늘어졌다. 잇새로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아무래도 제1연대와 제3연대 쪽에 문제가 생긴 것 같군.”
숲 건너편, 레베카와 페란트가 향한 방향에서 불꽃과 빛이 정신없이 번쩍이고 있었다.
케이든은 급하게 제4연대의 기사들을 수습해 그쪽으로 달려갔다.
케이든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레베카는 드물게도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우두머리를 상대하고 있었다.
케에에엑!
우두머리는 보고로 접했던 것보다 끔찍하게 보였다. 심지어는 입에서 사슬까지 뱉어 냈다.
“샐러맨더!”
레베카는 다급하게 하급 정령을 불러내어 사슬을 비껴가게 했다.
케이든이 검을 만들어 내고 그녀의 곁에 합류하며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그는 말끝에 입을 벌리고 달려드는 우두머리의 턱을 걷어찼다. 정령의 기운을 빌려 걷어찬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우두머리가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레베카는 케이든을 발견하자마자 오만상을 구겼다.
“네가 왜……! 필요 없으니 돌아가!”
레베카가 고함을 내지르며 케이든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케이든이 기겁하며 그녀의 검을 피했다.
“지금이 이럴 때입니까! 페란트 형님께서는 어디에……!”
케이든은 말을 내뱉는 것과 동시에 핏발 선 눈으로 으득 이를 가는 레베카의 모습, 그리고 익숙한 형태의 사슬을 뱉어 내던 우두머리의 특성을 상기하고 탄식했다.
‘아.’
죽었구나.
하지만 어쨌거나 절반의 피를 공유하던 페란트의 죽음을 애도할 틈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우두머리가 다시 한번 레베카를 향해 사슬을 뱉어 냈다.
케이든은 검을 봉으로 바꾸어 그 사슬을 봉에 휘감기게 한 후 팔에 힘을 주었다.
부웅―!
역으로 붙잡힌 우두머리가 허공에 떠올라 포물선을 그리며 레베카 쪽으로 날아들었다. 케이든이 목소리를 높였다.
“베십시오!”
“명령하지 마.”
레베카가 욕설을 내뱉었으나 그녀 또한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재빠르게 검을 휘둘러 우두머리의 등을 베었다.
“엘판드!”
케이든이 봉을 다시 검으로 바꾸어 사슬을 떨쳐 내며 외쳤다. 그러자 빛무리와 함께 나타난 흰 표범이 우두머리의 등에 난 상처에 다시 한번 발톱을 휘둘렀다.
“시체부터 처리해야 합니다!”
케이든이 우두머리를 상대하며 외쳤다. 그에 어느 정도의 냉정을 되찾은 레베카가 몸을 돌려 기사들의 시체를 태우기 시작했다.
이윽고 한 구의 시체만이 남아 있던 순간이었다.
크에엑!
목숨의 위협을 느낀 우두머리가 비명을 내지르고는 케이든을 피해 달아났다. 그리고 막을 틈도 없이 땅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를 향해 입을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