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핀들레이 영지 곳곳에서 변종 마물이 대거 출현했다는 소식에 황제는 급히 근위대를 호출했다.
논의 끝에 제2연대를 맡은 옐링 공작이 수도에 남아 황궁을 지키기로 하고, 그 외 연대들은 핀들레이 영지의 참사를 막기 위해 파견되었다.
파견 임무의 총사령관은 윅스빌 공작이었다.
“나타난 변종 마물은 총 4종. 각각 은둔형, 돌진형, 비행형, 군집형입니다. 우선은 핀들레이 영지의 자체 전력으로 이 숲에 마물들을 몰아 두었다더군요.”
핀들레이 영지 외곽에 자리한 숲의 입구.
임시로 세워진 막사 안에서 윅스빌 공작이 각 연대장에게 보고서를 나누어 주며 말을 이었다.
“제5연대가 북쪽의 비행형 마물과 은둔형 마물을 맡겠습니다. 돌진형 마물은 방어와 공격 둘 모두가 중요하니 제4연대가, 마지막으로 군집형 마물은 제1연대와 제3연대가 도맡는 것으로 하지요. 1황녀 전하께서는 제1연대와 제3연대를 지휘해 주십시오.”
“……알겠네.”
윅스빌 공작은 익숙하고 빠른 태도로 인원을 분배했다.
평소 1황녀 레베카와 2황자 페란트는 한 몸처럼 움직이기에 아무도 그의 결정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히려 그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가 페란트를 자극했다.
‘또 누님의 뒤치다꺼리나 하라고?’
미친 사람처럼 제 팔에 상처를 내던 2황비의 모습을 떠올리자 절로 이가 갈렸다.
페란트는 핏발이 선 눈으로 윅스빌 공작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나와 제3연대가 은둔형 마물을 맡겠네.”
“……예?”
“그편이 더 효율적이지 않겠나. 아무리 공작이라고 한들 비행형과 은둔형 마물 모두를 처리하려 들다가는 사상자만 늘 것 같은데. 차라리 내가 제3연대를 지휘해서―.”
“안 됩니다.”
하지만 윅스빌 공작은 페란트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분노한 페란트가 책상을 쾅 내리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체 왜 들어 보지도 않고……!”
“‘왜’라고 물으셨습니까? 전하께서는 효율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전하의 명예를 위해서 그런 제안을 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평소 윅스빌 공작은 언제나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싱글싱글 웃고 다니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 태도가 공작치고는 상당히 소탈하고 가벼운 편이라, 딸과 관련한 일이 아니면 항상 진중한 옐링 공작과의 상성이 맞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하지만 지금의 윅스빌 공작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는 전시에도 제 욕심에 눈이 멀어 날뛰는 이에게까지 웃음을 내보이는 머저리가 아니었다.
그가 더없이 싸늘한 눈으로 페란트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간 2황자 전하께서는 언제나 1황녀 전하와 함께이셨지요. 두 분께서는 계속해서 합을 맞춰 오셨고, 그렇기에 손발이 맞는 두 연대가 함께 움직이는 것이 더 빠르고 안전하게 군집형 마물을 말살할 수 있으리라 판단해 이런 결정을 내린 겁니다. 우두머리를 먼저 제거해 증식을 막는다고 해도 남은 새끼들의 수가 어마어마할 테니까요.”
“그런……!”
“그리고 2황자 전하께서는 1황녀 전하의 곁에 있어야 안전하실 겁니다.”
고저가 없어 더욱 칼날 같은 말이 페란트를 꿰뚫었다.
레베카는 말없이 주먹을 말아 쥐는 페란트를 힐긋거렸다.
“공작, 그만하면 됐네.”
레베카가 나직한 목소리로 공작을 만류했다. 그러나 공작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차디찬 얼굴로 일갈했다.
“애꿎은 명예욕에 눈이 멀어 제3연대의 기사들을 희생시킬 생각은 마십시오.”
“…….”
“알아들으셨습니까?”
페란트가 말없이 이를 악물었다. 그의 턱에 힘이 들어간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결국 그는 말없이 막사를 나가 버렸다. 레베카가 윅스빌 공작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건네고는 그를 따라 나갔다.
윅스빌 공작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눈을 접어 미소를 띠었다.
“3황자 전하께도 무운을 빕니다. 해 질 녘에 이곳에서 다시 뵙지요.”
“공작도 부디 몸조심하게.”
* * *
각 연대는 연대장들의 회의가 끝나자마자 제각기 도맡은 변종 마물을 처리하기 위해 흩어졌다.
이번에 출연한 군집형 변종 마물은 다리가 열 개 달린 거미의 형상을 취하고 있다는 말에 기사들이 질색했다.
레베카는 기사들의 가장 앞에서 페란트와 나란히 걸으며 윅스빌 공작이 건넨 자료를 확인했다.
“피와 살점을 섭취하면 더욱 강해져 날뛰니, 되도록 시체는 불에 태우거나 아군의 뒤쪽으로 옮겨 혼란을 막을 것……. 란트, 혹시 내가 미처 처리하지 못한 시체는 네가 처리하거라.”
“…….”
“페란트, 듣고 있니?”
“…….”
레베카가 재차 말을 걸었으나 페란트는 고집스럽게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걸었다.
그에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려던 그녀가 움찔했다. 머릿속으로 떠나기 전, 루드비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2황자를 더 자극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2황비 전하는 저희가 어떻게 막을 수 없겠지만…… 전하께서라도 2황자를 다독여 주셔야 합니다. 2황자께서 전하에 대한 반감을 다 거둘 때까지는 되도록 그를 자극할 만한 말은 하지 마세요. 다그친다거나, 간섭하려 드는 것 전부 안 됩니다.]
루드비히는 페란트가 제멋대로 사람들을 만나고 다닐 때부터 그를 예의 주시해 왔다.
그래서 그가 지금 레베카에 대한 반감이 얼마나 심한지, 얼마나 속으로 들끓고 있는지를 눈치채고 레베카에게 경고했다.
‘……참자.’
레베카는 페란트를 다그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애써 심호흡을 했다.
그녀는 고민 끝에 조심스럽게 말문을 뗐다.
“페란트.”
“…….”
“네가 타고난 마력량이 적은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투 감각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야. 밖으로 나돌아 다니는 시간을 줄이고, 훈련에 더 매진한다면 분명 다음에는 홀로 움직일 수 있을 거야.”
레베카는 본인이 할 수 있는 가장 다정한 음성을 냈다.
그러자 내내 그녀를 없는 사람 취급하며 걷던 페란트가 우뚝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레베카는 그가 이제야 제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고 생각하며 만족스럽게 말을 이었다.
“내가 훈련을 도와주마. 너는 더 나아질 수 있…….”
“그만하세요.”
그러나 페란트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잠시 발을 멈췄을 뿐이었다.
헛웃음을 지은 그가 한 손으로 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뭐? 타고난 마력량이 적은 주제에, 훈련도 하지 않고 바깥으로 나돌기만 해?
도와준다고?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내내 속에서 들끓던 것이 끝내 폭발했다.
마침내 이성을 잃은 페란트는 기사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조차 있고 레베카를 향해 악을 썼다.
“저는 누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머저리가 아닙니다! 누님을 위한 도구는 더더욱 아니고요!”
“페란트, 너 지금…….”
“그렇게나 제3연대 기사들의 목숨이 걱정된다 하시니, 우두머리는 저 혼자 잡으러 가겠습니다. 제 목숨에까지 간섭하려 들지 마십시오.”
“그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레베카가 그를 따라 목소리를 높였으나 페란트는 하급 정령을 불러내 순식간에 숲의 안개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등 뒤로 레베카가 쫓아오려는 기척이 느껴졌으나 그는 이를 악물고 날 듯이 달려 추격을 따돌렸다.
‘내가 누님 옆에 있어야 안전하다고? 그 말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 주지, 공작.’
레베카는 그간 페란트가 마냥 바깥으로 나돌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그는 나름대로 사람들을 만나면서 틈틈이 훈련에도 매진했다.
그 결과 소환할 수 있는 정령의 개체 수와 지속 시간이 상당히 늘어난 상태였다.
그로 인한 자신감과 레베카에 대한 반감이 그의 걸음을 부추겼다.
페란트는 이내 보고에서 들었던, 군집형 마물들이 몸을 감추고 있다는 동굴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