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케이든? 왜 그러고 있어요?”
그때 불쑥 목소리가 들려왔다. 케이든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휙 들어 올렸다.
그러자 집무실 문 앞에 선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디아나의 모습이 보였다.
케이든은 그녀가 품에 안고 있는 바구니를 발견하고는 무의식중에 입을 열었다.
“디아나, 그건…….”
“아, 벨라의 도움을 받아서 만들어 봤어요. 괜찮은 모양이 나올 때까지 계속 시도하다 보니 전하는 게 조금 늦어졌네요.”
디아나가 민망한 듯 웃으며 케이든의 앞으로 다가와 앉았다.
케이든은 그녀가 내민 바구니 속에 수북이 쌓인, 파트라슈가 먹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예쁘게 모양이 잡혀 있는 쿠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디아나는 케이든에게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조금 불안한 기색으로 그의 얼굴을 힐긋거렸다.
“요즘 모임도 많은데, 훈련까지 늘리셨다면서요? 단것을 좋아하신다고 해서 위로차 만들어 봤는데, 혹시 별로면…….”
“아니, 아니야. 나 단 거 좋아해. 잘 먹을게.”
케이든은 디아나의 말에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그녀가 내민 바구니를 받아 들었다. 그제야 디아나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다행이에요.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볼게요. 저녁 식사 때 뵈어요.”
“어……. 그래. 고마워, 디아나.”
“저야말로 받아 주셔서 고마워요.”
디아나는 그렇게 말하고 사라졌다. 케이든은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 재빨리 손을 들어 제 뺨을 내리쳤다.
찰싹―
“……아프네.”
그러니까, 꿈이 아니라는 말이지.
케이든의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갔다.
그는 몸을 일으켜 파트라슈의 책상 위에 놓인 쿠키를 한 번, 제가 품에 안고 있는 바구니를 한 번 번갈아 일별하더니 코웃음 쳤다.
이게 바로 남편과 일개 사용인의 차이라는 거다, 파트라슈 레밋.
“……아. 그러고 보니.”
희희낙락하며 파트라슈를 비웃던 케이든은 뒤늦게 잊고 있던 용건을 떠올렸다.
‘D. 옵스큐르와 약속을 잡아 보라고 해야 하는데.’
D. 옵스큐르가 보내 준 자료는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그는 단지 자선 단체와 같은 곳의 청렴함을 알아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몇 주 안에는 반드시 대박을 터트리는 투자처에 관한 정보를 제공했다.
꼭 미래를 볼 줄 아는 사람처럼.
‘한 번은 얼굴을 확인해 두어서 나쁠 것 없겠지.’
그에 관해 알려진 사실이 많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의도적으로 본인의 신상을 감추고 있는 것 같아 선선히 약속에 응할지는 모르겠지만.
D. 옵스큐르를 직접 마주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계속해서 신경을 거스르는 이 의구심이 도대체 무엇인지.
케이든은 결의로 눈을 빛내며 파트라슈를 찾아 나섰다. 물론 자랑용으로 바구니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 * *
그로부터 얼마 후, 달도 뜨지 않은 늦은 밤이었다.
세드릭은 피오나가 편지로 알려 준 시각에 옐링 공작저의 뒷문에 도착했다.
후드를 깊게 눌러쓰며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저 멀리 사용인들이 사용하는 것으로 보이는 쪽문이 살짝 열려 있는 게 눈에 띄었다.
그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는 그 안으로 발을 들였다. 문은 삐걱거리는 소리 없이 매끄럽게 열렸다.
어둠에 잠긴 저택은 고요했다. 경비를 서는 기사들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것을 확인한 세드릭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역시 아직은 나에 대한 마음이 남아 있는 게 분명해. 아니라면 이렇게 밤늦게 만나자는 약속에 응하지도, 사람들을 물려 주지도 않았겠지.’
<옐링 소공작님께.
지난번의 무례를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더불어…… 드리고 싶은 말씀도 있고요.
괜찮으시다면 단둘이, 조용히 만날 수 있을까요?>
며칠 전, 세드릭은 고심 끝에 피오나에게 은밀히 서신을 전달했다.
레베카와 루드비히는 세드릭이 피오나와 조금이라도 어색해졌다는 사실을 눈치채면 곧장 그를 버리려 들 것이다.
하지만 세드릭은 기껏 잡은 줄을 놓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들이 알기 전까지만, 계획대로 되돌려 놓으면 돼.’
그래서 세드릭은 레베카와 루드비히에게 보고하지 않은 채 독단적으로 피오나에게 서신을 전달했다.
레베카와 루드비히가 세드릭을 야박하게 버리려 들기 전에, 아직 피오나에게 세드릭을 좋아하는 마음이 남아 있을 때.
조금 과격한 방법이나마 써서 피오나가 그에 대한 의심을 발설하지 못하게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
‘효과는 확실하니까…….’
세드릭은 어두운 정원 한구석, 가제보 앞에 멈춰 섰다. 그가 제 손에 들린 꽃다발을 흘깃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에 들린 꽃다발은 싱싱하고 아름다웠다.
게다가 형태가 묘하게 리를 재단의 자선 파티에서 안타르가 내놓은 것과 비슷했다.
하지만 꽃다발을 묶은 리본 사이, 꽃줄기에 작은 가시가 우둘투둘하게 돋아 있었다.
이것은 세드릭이 직접 개량한 하이에른 꽃이었다.
꽃을 꺾은 지 다섯 시간 이상이 지나면 그 후로는 평범한 꽃에 불과하지만, 갓 꺾은 꽃의 가시에 찔리면 그대로 쓰러지게 된다.
목숨을 위협하는 종류의 독은 아니었다. 다만, 체내로 들어가는 순간 빠르게 전신으로 퍼져 사지를 마비시키는 것일 뿐.
‘독이 퍼지면, 몰래 방으로 들어간 다음에…… 테라스에서 머리부터 떨어진 것처럼 보이게 하는 거야.’
세드릭은 피오나가 발을 헛디뎌 테라스에서 떨어진 것처럼 보이게 한 후, 평생 사지가 마비된 채 죽은 사람처럼 살아야 하는 그녀를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며 오열할 작정이었다.
그간 피오나와 세드릭은 약혼자나 다름없는 관계였으므로, 사람들은 그의 비극을 안타까워할 것이다.
동시에 그가 포섭해 놓은 몇몇 귀족이 이제는 후계자 위를 물려받을 수도 없는 피오나를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마음이 갸륵하다며 그를 치켜세우기 시작하겠지.
옐링 공작은 딸에게 일어난 비극을 믿지 못하고 넋을 반쯤 놓을 것이다.
그러니 그 틈을 타 세드릭이 공작을 위로하고, 피오나를 살뜰히 챙기는 모습을 보인다면…….
‘……정말로 내가 공작이 될 수도 있다.’
긴장과 흥분으로 인해 손에 땀이 배어났다. 그는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러 땀을 닦아 냈다.
그때 작은 기척이 가까워졌다. 세드릭은 재빨리 꽃다발을 등 뒤로 감추고 앞을 바라보았다.
“……하이에른 영식.”
“소공작님.”
세드릭은 사랑에 빠진 남자의 웃음을 가장하며 피오나를 바라보았다.
피오나 역시 작은 웃음을 띠고 그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두꺼운 클로크를 두른 차림새였다. 클로크 아래로 잠옷의 치맛자락이 살짝 드러나는 것을 보아하니 잠들기 전 클로크만 걸치고 나온 듯했다.
세드릭은 여전히 저를 보며 웃는 피오나의 모습에 안도했다. 역시 피오나는 아직 그에게 마음이 남아 있는 것이 분명했다.
“만남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정도로 뭘. 그보다…… 사과를 하겠다고?”
피오나가 조금 머뭇거리며 물었다. 세드릭은 자못 침울한 얼굴로 시선을 내리깔며 무겁게 말했다.
“예. 지난번 만남 때…… 제가 질투로 인해 안타르 경을 깎아내리는 말을 했던 것, 그리고 소공작님의 손에 상처를 입힌 것. 모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리고…….”
세드릭이 말꼬리를 흐리며 등 뒤에 감춰 두었던 꽃다발을 내밀었다. 그의 얼굴에 해사하기 그지없는 미소가 걸렸다.
“좋아합니다, 소공작님.”
“…….”
“아니……. 피오나.”
수줍게 피오나의 이름을 부르는 그는 영락없이 첫사랑에 젖어 있는 소년 그 자체였다.
“…….”
피오나는 잠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이내 손을 뻗어 세드릭의 손에서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예쁘네. 이게…… 하이에른 꽃이야?”
“네. 언뜻 장미와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시면 잎의 모양이 조금 다를 거예요.”
세드릭은 태연한 얼굴로 그녀가 줄기 쪽에 손을 대도록 유도했다. 피오나는 순진한 얼굴로 꽃다발을 헤집었다.
그리고 이내 그가 기다리던 순간이 찾아왔다.
“아……!”
꽃다발을 뒤적이던 피오나가 별안간 얼굴을 찌푸리며 화들짝 손을 떼어 냈다.
그 반응은 분명 가시에 찔린 사람이 내보이는 것이었다.
‘됐다……!’
그 모습을 본 세드릭이 희열에 젖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