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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67/145)

67화

“안타르 경과 너무 가까이 지내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당신께 해가 될지도 몰라요.”

그 말에 피오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세드릭의 말이 농담이라고 생각하는 듯 피식 웃었다.

“뭐?”

“물론 안타르 경께서 잘못된 계약으로 비타스에 묶여 있던 것은 저 또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매일같이 피가 튀는 곳에서 지낸 사람이 정상일 리가…….”

“하이에른 영식.”

피오나는 세드릭의 말을 듣던 중 이상함을 느끼고 우뚝 발을 멈추었다.

그러자 세드릭이 그녀를 따라 당황한 얼굴로 멈춰 섰다. 그가 무구한 눈으로 피오나를 바라보았다.

“소공작님?”

“…….”

피오나는 잠시간 세드릭의 눈을 빤히 응시했다.

그는 여전히 그녀가 아는 그대로의 맑고, 다정하고, 선량한 ‘세드릭 하이에른’의 모습이었다.

‘……착각인가?’

그래, 세드릭이 안타르를 일부러 깎아내렸을 리가 없지.

세드릭은 그저…… 너무 어렸을 적부터 저런 말을 들어 와서 그랬을 뿐일 거야.

피오나는 애써 합리화하며 다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녀는 점잖은 어조로 세드릭의 오해를 정정해 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런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 평민이든 귀족이든 우리는 결국 다 같은 사람이고, 안타르 경은 보기 드물게 선하고 정직하지. 그는 내 친구야. 영식도 안타르 경과 제대로 대화를 나누어 보면…….”

그때, 울컥한 세드릭이 손에 힘을 꽉 주며 피오나를 휙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피오나는 세드릭과 코앞에서 얼굴을 마주하게 된 채로 숨을 멈추었다.

낯선 얼굴의 세드릭이 사나운 기색으로 말을 짓씹었다.

“당신의 파트너는 접니다. 소공작님의 파트너는 저라고요. 세드릭 하이에른이란 말입니다. 그런 기사 나부랭이가 아니라……!”

당신은 나를 사랑해야 해.

나를, 죽을 만큼 사랑해야 해.

그래야 해.

강박 같은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세드릭이 악에 받친 목소리로 고함을 치려는 순간.

피오나가 그에게 붙잡힌 손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옅은 신음을 삼켰다.

“윽…….”

그 소리에 퍼뜩 이성이 돌아왔다. 사색이 된 세드릭이 급하게 손에 힘을 풀며 피오나를 살폈다.

“소, 소공작님.”

“아야…….”

“정말 죄송합니다. 방금은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괜찮으십니까?”

세드릭은 제가 세게 쥐었던 피오나의 손을 살피기 위해 손을 뻗었다.

탁―!

“……아.”

피오나는 저도 모르게 그 손을 뿌리치고는 흠칫 놀랐다. 그녀는 굳어 버린 세드릭을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미안. 몸이 좋지 않아서, 오늘은 일찍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

“그럼 제가 모시겠습니다. 마차를…….”

“아니.”

“…….”

“혼자 돌아갈게. 그러니 영식도 늦지 않게 돌아가.”

“…….”

“알겠지?”

“……예.”

세드릭은 허벅지 옆으로 주먹을 꽉 움켜쥔 채 애써 미소를 보였다.

피오나는 그에게 고개를 가볍게 숙여 인사한 후 플로어를 내려가 문밖으로 사라졌다.

세드릭은 차마 그 모습을 지켜보기가 힘겨워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아…….’

등 뒤로 식은땀이 주룩 흘러내렸다. 눈앞에 레베카와 루드비히의 싸늘한 얼굴이 아른거리는 듯했다.

세드릭이 낭패한 기색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젠장. 내가 의심을 샀다는 걸 알면 당장에라도 나를 없애려 들 거야.’

레베카와 루드비히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옐링 소공작을 갈아치우는 것은 철저히 은밀하게, 또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니 그들은 세드릭이 피오나의 의심을 샀다는 소식을 접하면 곧장 그를 폐기하려 들 것이다.

‘내가 어떻게 잡은 줄인데.’

이런 식으로 놓칠 수는 없지.

세드릭의 눈에 섬뜩한 빛이 떠올랐다. 그는 천천히 사람들 사이를 가로질러 파티장을 벗어났다.

무슨 수를 내야 했다.

* * *

‘또 왔군.’

케이든은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태도로 책상 위에 놓인 금화 상자를 바라보았다.

상자 아래에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두꺼운 서류 뭉치가 놓여 있었다. 슬쩍 들춰 보니 이번에는 투자처 목록인 듯했다.

케이든이 손을 뻗어 상자를 열어 보았다. 수북이 쌓인 금화 위에는 여느 때와 같은 쪽지가 놓여 있었다.

<더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데 힘써 주십시오.

―D. 옵스큐르>

“……웃기는 자로군.”

케이든은 끝내 헛웃음을 흘렸다.

D. 옵스큐르는 여러모로 그의 관심을 끄는 사람이었다.

옵스큐르는 매번 그에게 ‘황위를 물려받고 싶다면 이걸 하라’고 말하는 것처럼, 성의 없는 쪽지를 곁들여 자금과 정보를 보내왔다.

어떻게 보아도 케이든을 황제로 지지함이 역력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런 그에게 얼굴 한번 내비치지 않고, 이렇다 할 말조차 건네지 않는다.

쪽지에는 언제나 ‘더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 달라’라고 적혀 있을 뿐이었다.

그 점이 묘하게 그의 심기를 거슬렀다.

상대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데, 자신은 상대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점이.

한동안 생각에 잠겨 쪽지를 내려다보던 케이든이 고개를 돌렸다.

“패트.”

“예?”

“이거…… 아니, 그보다 뭘 먹고 있는 거야?”

케이든은 입 안 가득 무언가를 우물거리는 파트라슈의 모습에 놀라 인상을 찡그렸다.

파트라슈는 아랑곳하지 않고 쿠키 하나를 더 입에 집어넣으며 불명확한 발음으로 말했다.

“아까 비 전하께서 다들 요즘 고생한다며 3황자궁 사람들에게 돌리신 건데요? 전하께서는 못 받으셨습니까?”

“……뭐? 디아나가?”

“예.”

파트라슈는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든은 누가 봐도 직접 만든 것처럼 보이는 쿠키를 노려보았다. 불만스러운 낯의 그가 손을 뻗어 파트라슈의 접시를 가로챘다.

“이리 내놔.”

“아, 왜요! 이건 저한테 주신 거라고요!”

“남편인 나도 못 먹고 있는데 네가 왜 먹어?”

“허, 그래 봤자 1년 후면 남편도 아니게 되실…… 헙.”

파트라슈는 쿠키를 사수하기 위해 바동거리다가 생각을 그대로 입 밖으로 내뱉고는 헙 하고 입을 다물었다.

케이든은 접시를 쥔 채 움직이지 않았다. 파트라슈는 슬그머니 접시의 반대쪽 끄트머리에서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용히 문 쪽으로 향하는 그의 등 뒤로 소름 끼치게 다정한 부름이 들려왔다.

“패트.”

“잘못했습니다악!”

파트라슈는 뒷덜미가 오싹해지는 느낌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무실 문을 박차고 도망쳤다.

나날이 도망치는 속도만 빨라지는 그는 눈 깜짝할 새에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케이든은 한숨을 푹 내쉬며 접시를 파트라슈의 책상 위에 도로 내려놓았다. 그는 심란한 기색으로 쿠키를 바라보았다.

‘……내가 생각해도 쪼잔한 것 같긴 하다만.’

왜 나는 안 주지?

그래도…… 내가 남편인데.

“아…… 나 너무 지질한 것 같은데.”

케이든은 자신의 구질구질함에 탄식하며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쪼그려 앉았다.

디아나에 대한 그의 마음은 나날이 지칠 줄 모르고 커져만 갔다.

괜히 안타르가 디아나에게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닌지 경계하게 되고, 이제는 하다못해 파트라슈와 사용인들에게 나눠 줬다는 쿠키마저 질투가 났다.

이러다가 디아나가 밟는 땅, 입는 옷에까지 질투를 느낄 지경이었다.

‘작정하고 들이댈 때마다 혹하는 기색이 없진 않아 보이는데…….’

지난번, 디아나의 방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속옷을 발견했을 때.

케이든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디아나를 유혹했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꽤 훌륭한 유혹이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디아나는 그의 몸에서 눈을 떼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디아나는 결국 눈을 질끈 감고 그의 시선을 피해 버렸다.

그 행동이 꼭 디아나와 제 마음이 아직 같지 않다는 것을 재차 상기시켜 주는 느낌이라 조금 슬펐다.

“케이든? 왜 그러고 있어요?”

그때 불쑥 목소리가 들려왔다. 케이든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휙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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