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어서 오십시오, 3황자 전하!”
재단의 가장 큰 후원자인 케이든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리를 재단의 회장이 헐레벌떡 그를 맞으러 뛰어나왔다.
리를 회장은 파티에 참석한 다른 손님들이 놀란 눈으로 저를 바라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케이든의 앞에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3황자 전하. 전하 덕분에 수많은 아이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사실 최근 리를 재단의 재정 상태는 굉장히 위태로웠다.
리를 재단은 다른 유명 재단과 비교했을 때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다. 그랬기에 그만큼 후원자도 적었다.
그는 그간 부족한 운영비 대부분을 사비로 충당해 왔지만, 그의 눈에 띄는 거리의 아이들이 많아질수록 그에 들어가는 비용 또한 만만치 않게 늘어났다.
결국 재단의 존속마저 위태로워졌을 때. 기적처럼 거액의 후원금을 보내 준 것이 바로 3황자 케이든이었다.
최근 1황녀 레베카 다음으로 유력한 황위 계승 후보인 케이든이 리를 재단을 후원했다는 소식은 금세 귀족들 사이로 퍼져 나갔다.
케이든과 연줄을 쌓고 싶어 하는 귀족들은 앞다투어 리를 재단에 후원 문의를 넣었고, 그 결과 회장은 재단과 아이들을 모두 지킬 수 있게 되었다.
그 고마움은 차마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던지라 회장은 케이든이 그를 말릴 때까지 몇 번이고 허리를 굽혔다.
회장이 자세를 바로 하며 디아나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나저나 이분께서는…….”
“이쪽은 내 부인인 디아나 블루벨이네.”
“반갑네.”
디아나가 부드러이 미소 지으며 고개를 살짝 까딱였다.
그에 회장이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케이든을 만나 벅찬 마음에 다소 들떠 말을 쏟아 냈다.
“오오, 이분께서 소문으로만 듣던 그 운명적인 만남의 주인공이시군요.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십니다. 다음에 괜찮으시다면 함께 고아원 시찰이라도…… 헉! 죄, 죄송합니다! 늙은이가 기쁜 마음에 그만 실언을……!”
회장은 한발 늦게 제 말실수를 깨닫고는 기겁하며 허리를 숙였다.
직전까지만 해도 들떠 있었던 게 무색할 정도로 순식간에 온몸의 피가 식어 내렸다. 그는 식은땀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이럴 수가.’
지금까지 그가 후원을 요청하며 귀족들을 만나러 다닐 때, 귀족들은 대부분 같은 반응을 내보였다.
[고아원이라고?]
[예. 혹 못 미더우시다면 리를 재단에서 운영하는 시설들을 한번 방문해 보신 후 후원을 결정하시는 것도…….]
[지금 감히 나보고 그딴 더럽고 냄새나는 곳에 발을 들이라는 건가?]
드물게 성격 나쁘고 인색한 귀족은 후원을 요청하며 찾아온 그를 구타해 내쫓은 적도 있었다.
물론 대다수 귀족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실질적으로 재단의 지원을 받는 환경이나 아이들을 보는 건 꺼리곤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관대함과 여유를 과시하기 위해 돈을 쓰는 것이지, 비쩍 마른 길거리의 아이들과 눈을 맞추고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는 건 아니었으므로.
귀족들마저 그러했는데, 황족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회장은 그리 생각하며 두려움에 어깨를 덜덜 떨었다. 그는 횡설수설하며 제 말을 주워 담으려 노력했다.
“그래도 보내 주신 후원금 덕분에 시설 보수는 완벽하게 끝마쳤습니다. 황궁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겠지만, 그래도 냄새는……. 아, 아닙니다. 역시 시간이 남는다면 고급 레스토랑이라든가 연극 등을 보러 가시는 것이…….”
“리를 회장.”
“예, 예?”
하지만 예상했던 폭언, 혹은 폭력 대신 어깨에 부드러운 손길이 내려앉았다.
놀라 고개를 들자 케이든과 디아나의 웃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회장은 순간 제 눈을 의심했다.
케이든이 작게 웃음 지으며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뭘 그렇게 긴장하나. 자네가 못할 말을 한 것도 아닌데.”
“그, 그렇지만…….”
“정말 괜찮아요. 저 아이들 좋아하거든요.”
케이든이 회장을 다독이자 디아나 역시 맞장구쳤다.
회장은 혼란스럽게 눈을 깜박였다. 그러나 케이든과 디아나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다음에 시간이 나면 아내와 함께 둘러보러 가도록 하겠네. 갑자기 들이닥쳤다고 해서 놀라지나 말게.”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실수하지 않고 잘 대할 수 있을지는 조금 걱정되지만요.”
다정한 말에 회장은 울컥 목이 메는 것을 느꼈다. 그는 조금 감동받은 눈으로 3황자 부부를 바라보았다.
‘……이분들이라면.’
이분들이라면 정말 좋은 지도자가 되어 주실지도 모른다.
그는 내심으로 그런 생각을 품고 두 사람을 안으로 안내했다. 주책맞게 눈물이 조금 나올 것만 같았다.
* * *
“어머, 저기 좀 보세요.”
“3황자 전하 내외이시네요.”
“그 뒤에는…… 이번 방어전에서 크게 활약했다던 그 기사 아닌가요?”
“생각보다 인물이 제법…….”
사람들은 케이든과 디아나, 안타르가 리를 회장의 안내를 받아 자선 경매장에 들어오자 숨죽여 술렁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지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케이든은 한결같이 다정한 태도로 디아나를 에스코트할 뿐이었다.
케이든과 디아나는 경매장 앞줄에 나란히 앉았고, 안타르는 그 근처에 앉았다.
디아나는 자리에 앉으며 힐긋 옆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오른쪽 블록의 좌석에서 세드릭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피오나였다.
케이든, 디아나가 착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경매장의 불이 서서히 어두워지고 소란이 가라앉았다.
이윽고 경매장이 완전히 어둠에 잠겼다. 잠시간의 정적 후, 무대 위로 조명이 쏟아지며 리를 회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점잖게 인사하는 리를 회장의 모습에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그는 자세를 바로 한 후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바쁘신 와중에도 이 자리를 빛내 주신 후원자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럼 지금부터 제4회 리를 자선 경매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상품은 여성용 귀걸이 한 쌍입니다!”
리를 회장이 전시대를 덮고 있던 천을 걷어 내며 외쳤다.
전시대 쿠션 위에는 큼지막한 에메랄드 귀걸이 한 쌍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50만 모트부터 시작하겠습니다.”
“50만.”
“네, 첫 입찰자가 나왔습니다! 열을 셀 때까지 50만 모트보다 높은 금액을 제시하는 분이 없다면 이 귀걸이는 저분께 낙찰됩니다!”
이후로도 입찰자가 두어 명 정도 더 나왔다.
여성용임이 분명해 보이는 귀걸이였으나 입찰자는 전부 남성이었다.
그 모습을 본 케이든이 디아나의 귓가로 고개를 기울이고 속닥였다.
“역시 후원 물품으로 대체하는 게 나았군. 까딱했다가는 그대를 다른 남자에게 보냈을 수도 있겠어.”
자선 경매에서 판매되는 상품은 대개 기부된 것들이다. 그리고 상품을 판매한 돈은 전부 그 재단의 운영 자금으로 사용된다.
보통의 자선 경매일 경우 그렇지만, 리를 재단에서는 부족한 운영비를 충당하기 위해 한 가지 묘수를 냈다.
“……네, 70만 모트! 70만 모트에 낙찰되었습니다! 기부자와 구매자 확인은 경매가 모두 끝난 후 차례로 진행될 예정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바로 물건을 기부한 사람과 구매한 사람의 식사 자리를 주선하는 것.
이것은 수도 귀족들 사이에서 나름 이목을 끌었고, 리를 재단이 오늘날까지 근근이라도 명맥을 이어 올 수 있던 원천이었다.
경매가 모두 끝나면, 물건을 기부한 사람, 그 물건을 구매한 사람을 나란히 무대로 부른 후 그들을 연회장으로 안내한다.
다른 이들 또한 경매가 끝나면 연회장에서 식사하게 되지만, 경매로 맺어진 이들에게는 개별 테이블이 주어진다.
이후 그들이 좋은 관계를 이어 나갈지, 혹은 못 본 척하며 지나갈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서로의 정체를 알지 못한 채 무작위로 맺어진다는 점에서 특히나 미혼 남녀의 적잖은 흥미를 끌었다.
디아나가 노리는 것은 바로 그 한 번의 식사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