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그놈의 1황녀 얘기 좀 그만하십시오, 제발!”
쩌렁쩌렁한 고함이 2황비의 말을 삼켜 버렸다.
2황비는 페란트의 행태에 순간적으로 말을 잃었다. 그가 그간 쌓여 왔던 울분을 터트렸다.
“제발 그만 좀 하십시오.”
“…….”
“어머니께서 1황비 전하와 1황녀 전하를 얼마나 아끼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친자식인 저보다 더, 본인의 목숨보다 더 아끼신다는 거! 아주 잘 알고 있다고요!”
고함을 내지르던 페란트가 눈물 고인 눈으로 ‘하’ 헛웃음을 내뱉었다.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문제이지요.”
“너, 지금, 지금 뭐라고…….”
2황비가 숨을 몰아쉬며 무언가를 말하려 했으나, 이를 빠득 간 페란트는 그녀를 휙 지나쳐 궁 안으로 들어갔다.
성큼성큼 발을 옮기는 그의 곁으로 카를롯타가 따라붙었다.
“오빠, 요즘 대체 왜 이래? 진짜 미쳤어?”
“꺼져. 너까지 상대할 기분 아니다.”
페란트가 살벌하게 뇌까렸다. 하지만 카를롯타는 굴하지 않고 그의 뒤를 쫓았다.
“오……!”
“너 지금 거리에서 우리에 대해 뭐라고 떠드는지 알기나 하냐?”
“뭐?”
결국 울컥한 페란트가 몸을 돌리며 카를롯타를 노려보았다.
카를롯타는 그저 얼떨떨한 기색이었다. 그는 그 모습을 보고 실소했다.
‘저럴 줄 알았지, 내가.’
이내 웃음기를 남김없이 지워 낸 페란트가 카를롯타에게 바짝 다가섰다. 그가 으르렁대듯 말을 짓씹어 뱉었다.
“넌 평생 이렇게 살 거야? 남이 손짓하면 손짓하는 대로 불려 가고, 짖으라고 하면 짖는 개새끼처럼?”
“오빠, 그게 무슨 말……!”
“멍청한 년.”
쾅!
카를롯타가 뒤늦게 목소리를 높였으나 페란트는 그녀를 무시한 채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카를롯타는 이후 한참이나 페란트의 방문을 두드리며 그를 불러 보았지만, 방 안에서는 무언가 깨지는 소리만이 간간이 울려 퍼질 뿐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몸을 돌린 카를롯타는 복도를 지나 제 방으로 돌아가는 내내 초조하게 손톱 옆의 살을 물어뜯었다.
살이 갈라지며 피가 나고, 진물이 배어나 손가락이 발갛게 부어오르는데도 그녀는 강박적으로 손가락을 뜯었다.
“대체 왜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저러는 거야?”
카를롯타는 페란트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왜 이제 와서 새삼 그들의 존재 의의를 들먹인단 말인가?
페란트와 카를롯타는 애초에 1황비가, 레베카가 황궁 내에서 제 수족처럼 다룰 이가 필요하지 않았다면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2황비는 기억하는 순간부터 늘 그렇게 말했고, 카를롯타 역시 납득했다.
게다가 레베카가 황위에 오르면 그들 또한 그 곁에서 떵떵거리며 한평생 평화롭게 살다가 갈 수 있는데.
지금 그들의 위치조차 갖지 못해 안달하는 귀족들이 발에 채일 정도로 널렸건만.
페란트는 대체 뭐가 불만인 걸까?
‘죽으려면 혼자 죽든가, 나는 죽기 싫은데……!’
카를롯타는 혹 페란트 때문에 자신마저 레베카에게 밉보여 버림받게 될까 봐 전전긍긍했다.
그녀는 이후로도 한참이나 복도를 서성거리다가 제 방으로 돌아갔다.
한편, 2황비는 페란트가 궁 안으로 들어가 버린 이후 충격으로 비틀댔다.
“어떻게…….”
제 자식이, 제가 낳고 가르친 자식이 감히 1황비와 1황녀에 대한 모욕을 서슴없이 입에 담았다는 것이 더없이 충격이었다.
2황비는 숨을 몰아쉬다가 반쯤 넋을 놓은 채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1황비와 1황녀의 거처인 백염궁이었다.
“어머, 2황비 전하.”
백염궁의 하녀가 단신으로 찾아온 2황비를 보고는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러나 2황비는 평소와 다르게 제 매무새와 표정을 수습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 하고 물었다.
“1황비 전하께서는 어디 계시느냐.”
“2층의 욕탕에 계실 겁니다.”
2황비는 그 말에 달리 대답하지 않고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1황비의 절친한 친구이자 충신임을 알고 있는 사용인들은 아무도 그녀를 제지하지 않았다.
2층에 올라서자 욕탕 앞을 지키고 있던 시녀들과 기사가 그녀를 향해 묵례했다.
“2황비 전하를 뵙습니다.”
“안에 아무도 없느냐.”
“1황비 전하께서 물리셨습니다.”
“알았다. 근처에 아무도 두지 말라 일러라. 너희들도 물러나.”
“예.”
사용인들은 2황비의 명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곧장 따랐다. 2황비는 지친 얼굴로 욕탕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희뿌연 수증기가 훅 쏟아져 나왔다.
2황비는 반사적으로 눈을 찌푸렸다가, 안개처럼 보이는 수증기 너머 희붐한 인영을 발견하고는 표정을 풀었다.
“……1황비 전하.”
“아델라?”
창밖을 내다보며 물에 몸을 담그고 있던 1황비가 반색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목욕을 위해 머리를 풀어 내린 그녀는 소녀라고 보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여전히 천진하고, 아름다웠다.
2황비, 아델라는 잠시 1황비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그 곁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델라가 욕탕 바깥쪽에 걸터앉자 1황비가 그 곁으로 자리를 옮겼다.
“전하…….”
아델라는 주위에 1황비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자마자 냉정하던 표정을 무너트렸다.
그러자 1황비가 나른하게 그녀를 보며 웃었다.
“둘만 있을 때는 이름으로 부르기로 했잖아. 말도 편하게 하고.”
“…….”
“아델라.”
“……록산느.”
다정한 질책이 섞인 부름에, 결국 아델라는 허물어지듯 1황비, 록산느의 곁에 엎드렸다.
록산느는 제 코앞으로 내려온 아델라의 얼굴을 다정하게 쓸어내렸다.
“아델라.”
“응.”
“페란트가 또 말썽을 부렸다며?”
2황비 궁 앞에서 있었던 일은 곧장 록산느의 귀에 들어왔다.
아델라 역시 그것을 알았기에 달리 설명을 늘어놓지 않고 눈만 감았다. 그녀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응. 미안해.”
“뭘 미안해. 미안해하라고 한 소리 아니야. 너는 나한테 미안해할 필요가 없어.”
록산느는 물속에서 상체를 일으켜 아델라를 끌어안았다. 아델라는 록산느의 가슴께에 고개를 기댄 채 숨을 골랐다. 상냥한 손길이 아델라의 머리카락을 위로하듯 쓸어내렸다.
아델라는 그 손길을 가만히 느끼다가 중얼거렸다.
“록산느.”
“응.”
“나는 널 위해 뭐든 할 수 있어.”
“알아.”
“……정말로?”
“응.”
록산느가 잠잠한 답을 흘리며 아델라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 조용한, 하지만 더없이 견고한 신뢰에 문득 목이 메었다. 아델라는 눈물을 참기 위해 록산느를 마주 끌어안으며 독하게 눈을 빛냈다.
‘어떻게 해서든.’
네 바람은 무슨 수를 써서든 내가 이루어 주겠다.
설령 그를 위해 필요한 것이 내 목숨일지라도.
* * *
얼마 후, 케이든과 디아나는 수도의 한 자선 단체에서 열리는 파티에 참석했다.
두 사람은 채비를 마치고 나란히 손을 잡은 채 3황자궁에서 나왔다.
디아나는 마차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안타르를 발견하고는 조금 감탄했다.
“예복이 정말 잘 어울리시네요, 안타르 경.”
“……감사합니다, 비 전하.”
안타르는 쑥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큼 헛기침을 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안타르는 며칠 전 케이든의 허가를 받고 디아나의 전속 호위로 임명되었다.
호위 기사들은 종종 주인을 따라 파티에 참석해야 하는 일도 있었기에, 파티용 예복과 제복 역시 따로 지급받았다.
안타르는 그중 파티용 예복을 차려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은색 장식들이 가미된 예복에 더해 한쪽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는 푸른 망토가 그의 눈과 굉장히 잘 어울렸다.
케이든 역시 파티용 예복이 안타르에게 굉장히 잘 어울린다는 것은 동의하는 바였다.
하지만 그는 안타르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리던 찰나.
갈색 곱슬머리 아래로 발갛게 달아올라 있던 귀를 보고는 굉장히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착각이겠지.’
대부분의 기사는 숙녀들의 칭찬을 어색해했다. 오히려 헤벌쭉 웃지 않고 귀만 붉힌 안타르의 반응이 점잖은 축에 속했다.
그래, 그러니 이 석연찮음은 그저 기우이리라.
케이든은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제 안에서 피어나려는 추한 감정을 짓밟아 꺼 버렸다.
그는 이내 티끌 한 점 묻어나지 않는, 쾌활한 미소를 띠며 디아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