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하여간 변태야, 정말…….”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케이든의 가슴을 찰싹찰싹 때린 후 그를 방에서 내쫓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 이후로도 한참이나 침대에 주저앉은 채 볼을 식혀야 했다.
간신히 진정이 되어 침대에서 내려가려던 찰나. 발끝이 땅에 닿는 것과 동시에 잊고 있던 약속이 퍼뜩 떠올랐다.
“아, 맞다. 안타르…….”
“안타르 경이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푹 주무시는 것 같길래 제가 전하를 대신해서 설명해 드리고 왔으니까요. 그보다 우선 세수부터 하세요.”
마침 세숫물을 든 채 방 안으로 들어오던 벨라도바가 디아나의 중얼거림을 듣고 대꾸했다.
그에 안도의 한숨을 쉰 디아나가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녀는 벨라도바가 떠 온 세숫물로 세안을 마친 후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나중에 만나서 미안하다고 사과해야겠네. 일은 어떻게 됐어?”
“유혹에는 자신도 없고, 하고 싶지 않다고 하더군요. 다만 친구가 되는 것 정도는 괜찮다며 승낙했습니다.”
“정말?”
“네. 대신 한 가지를 부탁드리고 싶다고 하더군요.”
벨라도바의 말에 디아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뭔데?”
“그가 자신을 비 전하의 전속 호위로 삼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호위라…….”
디아나가 잠잠히 생각에 잠겼다. 잠시 무언가를 재 보던 그녀가 고민으로 미간을 살짝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물론 대외적으로야 한 사람쯤 있어서 나쁠 것 없겠지만…… 너무 비효율적이지 않을까? 나는 호위가 딱히 필요하지 않은걸.”
디아나는 어둠의 상급 정령사였다. 그런 그녀가 목숨의 위협을 겪을 가능성은 굉장히 낮았다.
‘게다가 요즘 들어 이상하게 마력이 늘어난 것도 같고.’
문득 생각난 사실에 마력 양을 확인해 보니, 확실히 전날보다 눈에 띄게 마력의 양이 늘어나 있었다.
‘왤까. 딱히 한 건 없는데…….’
디아나는 의문스러운 눈으로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으나, 곧 시선을 거두고 의구심을 털어 버렸다.
마땅히 짐작 가는 이유도 없었거니와, 제게 해가 되는 일이 아니었기에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안타르의 호위 임명에 회의적인 반응을 내비친 디아나와 달리 벨라도바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야 모의 전투 때문에 정신도 없었고, 공식적으로 황궁 밖에 나가실 일이 없었다지만……. 지금은 사교 시즌이고, 황궁 바깥 파티에 참석해야 할 일도 갈수록 늘어나실 텐데 미리 정해 두는 게 낫지 않을까요?”
“흠…….”
“게다가 그렇게 되면 안타르 경과 옐링 소공작이 자연스럽게 마주칠 기회도 늘어나겠죠.”
“아, 확실히 그러네.”
디아나는 벨라도바의 말을 듣고 자신이 잊고 있던 부분을 떠올렸다.
확실히 안타르를 호위로 삼는다면, 파티에 그를 동행하여 피오나 옐링과 마주치게 할 기회가 늘어날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방어전에서 레베카가 나를 노렸던 것도 그렇고, 내가 대응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위협을 받게 될 수도 있으니까…….’
그때를 생각하니 케이든으로 인해 들떴던 심장이 다시금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이윽고 평소의 차분함을 되찾은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 중으로 케이든한테 말해 놓을게. 아마 그도 별 이견 없이 동의할 거야.”
“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그간 투자했던 곳들에서 서서히 흑자가 나기 시작했다며 투자금을 일부 돌려보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잘됐네. 절반 정도는 재투자하고, 나머지 절반은―”
* * *
<더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데 힘써 주십시오.
―D. 옵스큐르>
“…….”
케이든은 D. 옵스큐르라는 서명이 적혀 있는 쪽지, 금화가 가득 담긴 상자, 그리고 여러 자선 단체의 정보가 적힌 서류 뭉치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검은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쪽지를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D. 옵스큐르라.’
그의 시선이 힐긋 옆쪽을 향했다. 그곳에는 파트라슈가 조사해 온 후원자의 신상이 적혀 있었다.
<데인 옵스큐르.
남, 54세.
아를라스 왕국 출신의 떠돌이. 다만 현재는 정보 길드 윙즈의 수장인 것으로 추정됨.
외모에 대해서는 특별히 알려진 바 없음. 계속 조사 중.>
파트라슈의 보고에서 시선을 떼어 낸 케이든이 다시 D. 옵스큐르의 쪽지로 시선을 옮겼다.
“‘더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 달라’…….”
쪽지에 적힌 말을 읊던 케이든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럴 재력도, 정보도 가지고 있는 자가 굳이 이걸 나한테 전달했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나를 황제로 지지하려는 것 같은데.
평소라면 기뻐했을 일이었다. 황위를 계승할 자는 귀족 의회를 통해 선출되긴 하지만, 결국 황권의 기본은 민심.
민심을 얻지 못한 황제는 온전한 황제라 할 수 없으니, 기꺼이 저 서류에 적힌 단체들을 후원했겠지.
D. 옵스큐르가 보내온 자료의 단체들은 무수한 자선 단체 중에서도 특히나 뒤로 돈이 새지 않고, 윗사람들이 청렴하고 바른 이들인 곳들이었다.
이렇듯 능력 있는 자가 저를 지지한다니, 분명 좋은 일인데…….
“왜 이렇게 찝찝하지.”
나쁜 느낌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하지만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마치, 그가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것처럼.
“…….”
이후 한참이나 알 수 없는 석연찮음과 실리 사이에서 갈등하던 케이든은 한숨을 푹 내쉬며 파트라슈를 불렀다.
“이 자료에 적힌 단체들에 후원해. 그리고 D. 옵스큐르에 대한 정보는 계속 알아보고.”
“알겠습니다.”
* * *
‘아, 기분 좋다.’
늦은 밤. 페란트는 황궁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기분 좋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게 바로 사람이 사는 거지…….”
그는 술에 취해 몽롱하게 중얼거렸다. 취기 때문인지 아닌지, 몸이 붕 떠 있는 듯 기묘한 해방감마저 느껴졌다.
‘내 의지로 사람들을 만난다는 게 이렇게 즐거운 일이었나…….’
페란트는 요즘 전에 없이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전에는 레베카가 지정해 준 이들과 억지로 어울리고, 그러느라 기력을 소진해 딱히 다른 이들과 어울릴 생각을 하지 않고 제 궁으로 돌아가곤 했다.
하지만 제 의지로, 자신에게 필요한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니 이제야 살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2황자 전하.]
[전하, 이번에 저희 가문에서 열리는 전시회에…….]
레베카의 곁에서 떨어져 나오니, 사람들은 ‘레베카’를 찾는 것이 아닌 ‘페란트’를 찾기 시작했다.
페란트는 이제야 온전히 제 삶이 제 것이 되었다는 감각에 취해 황궁으로 돌아왔다.
페란트는 2황비 아델라, 2황녀 카를롯타와 한 궁을 쓰고 있었다.
편의상 2황비궁이라 불리는 궁 앞에 페란트가 탄 마차가 멈춰 섰다.
그는 조금 비틀거리며 마차에서 내려서려다가 창밖을 보고 멈칫 얼굴을 구겼다.
2황비 아델라가 정문 앞에서 불빛을 등진 채 서 있었다. 그 곁에는 조금 불안해 보이는 얼굴의 카를롯타가 함께였다.
“……안 주무셨나. 쟤는 또 왜 나와 있어.”
쳇, 하고 혀를 찬 페란트가 마차에서 내렸다.
그가 땅을 디디자마자 2황비가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곧장 뺨을 내리쳤다.
짜악―!
페란트의 얼굴이 휙 돌아갔다. 입 안이 터졌는지 비릿한 맛이 났다.
취기가 단숨에 달아났다. 페란트는 기분이 또다시 나락에 처박히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2황비는 언뜻 경멸이 느껴지는 눈으로 제 아들을 힐난했다.
“네가 정녕 미쳤느냐.”
“…….”
“대답해 봐라. 내가 그리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일렀는데! 3황자가 멋모르고 활개 치고 다니는 이 시기에, 우리가 나서서 1황녀 전하께 도움은 되지 못할망정……!”
“―그놈의 1황녀 얘기 좀 그만하십시오,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