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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55/145)

55화

“이런. 조심하셔야죠.”

디아나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살랑―

한낮의 햇살을 닮은 금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흐트러졌다. 레베카와 닮은 듯 다른 연푸른색의 눈이 곱게 휘어졌다.

루드비히 카드몬드가 태양을 등진 채 그녀를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3황자비 전하?”

“……아, 감사합니다.”

디아나는 상대가 루드비히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재빨리 무구한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그와 대조되게 허리를 감싼 그의 팔을 떨쳐 내는 손길은 매섭고 단호했다.

디아나는 루드비히의 팔에서 벗어나자마자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루드비히는 순식간에 텅 비어 버린 제 손을 말없이 내려다보다가, 이내 다시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괜찮으시다면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오늘 다과회를 여셨다고 들었는데요. 길이라도 잃어버리신 겁니까?”

디아나는 그가 자꾸 자신에게 말을 붙이려는 이유를 알 수 없어 빠르게 자리를 뜨고 싶었다.

그녀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내저으며 한 발 더 물러났다.

“아니요. 그리고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후작님께 폐를 끼칠 수는 없죠.”

“3황자비 전하.”

“이만 가 보겠습니다.”

루드비히는 디아나가 물러난 거리만큼 가까이 다가오며 무어라 말하려고 했으나, 그녀는 못 들은 척하며 몸을 돌렸다.

“아니면.”

그러나 이어진 말에 디아나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혹, 누군가를 찾고 계셨습니까?”

“…….”

디아나는 움찔 걸음을 멈추었다.

잠시간 제자리에 멈춰 서 있던 그녀가 이윽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러자 루드비히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누구를 찾고 계시는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도움을 드릴 수도 있는데요.”

“…….”

루드비히가 유혹하듯 눈을 사르르 접어 웃었다. 감미로운 속삭임이 허밍처럼 허공을 울렸다.

디아나는 말없이 그를 응시하다가 발을 떼었다.

루드비히는 제게 가까워지는 그녀의 모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곧 당황으로 바뀌었다.

“잠깐, 어디까지 다가오는…….”

루드비히는 디아나가 걸음을 멈추지 않자 오히려 당황했다.

그가 주춤 뒤로 한 걸음을 물리는 사이, 그녀는 그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흰 손이 루드비히를 향해 뻗어졌다. 그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루드비히의 생각과는 다르게 그녀는 그의 어깨에 붙어 있는 얇은 머리카락을 떼어 내고는 곧장 몸을 물렸다.

디아나는 양손을 아래로 모아 쥔 채 빙긋이 웃었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에 감겨들었다.

“카드몬드 후작님.”

“…….”

“저는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면 도움을 받지 않아요.”

“…….”

“그리고 후작님께서는 저와 가까운 이가 아니시죠.”

그 말에 루드비히가 눈을 떴다.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 디아나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녀의 등 뒤로 연분홍빛 머리카락이 사르르 흐트러졌다.

루드비히는 꽃잎 같은 그 색채를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역시, 마냥 바보는 아니었군.’

루드비히는 며칠 전. 레베카로부터 페란트의 이상 행동을 보고받고 한참이나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생각에 잠겼다.

사실, 2황자 페란트는 예전부터 이따금 레베카의 명령에 불만을 가진 적이 여럿 있었다.

하지만 그는 굳이 제 어머니와 반목하면서까지 제 욕심을 차리려 들지 않았다.

애초에 2황비가 그를 그렇게 길렀다. 자기 자신의 욕망보다, 레베카의 욕망을 우선하도록.

하지만 최근 페란트의 행보는 어떻게 생각해도 ‘그답지’ 않았다.

왜 그답지 않아졌을까?

혹시 옆에서 누군가 그를 자극하거나 부추긴 걸까?

그렇다면 페란트가 이상해진 것이 언제부터였지?

더 나아가서, 도대체 언제부터 그들의 계획이 어긋나기 시작했지?

[……3황자비.]

바로 디아나 서즈필드가 황궁에 들어오면서부터.

[…….]

어찌 보면 비약이나 다름없는 의심이었다.

서즈필드 자작 측에서 케이든 쪽으로 눈에 띌 만큼의 자금이 흘러들어 가지 않은 것도 진즉 확인을 마쳤다.

하지만 실제로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이 살아가던 케이든이 디아나로 인해 생기를 찾고 의지를 다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루드비히가 디아나에게 관심을 둘 이유는 충분했다.

“……흠. 왜인지 알 것 같기도 하고.”

루드비히는 조금 전을 회상하며 무표정하게 중얼거렸다.

연푸른 눈에 신기루 같은 흥미가 떠올랐다가, 곧 스러졌다.

* * *

한편, 같은 시각.

디아나는 루드비히를 피해 자리를 벗어나는 동안 내내 양손을 모아 쥐고 있었다.

그녀는 루드비히의 시선이 닿지 않는 거리가 되어서야 걸음을 멈췄다.

“후…….”

긴 숨을 뱉어 낸 그녀가 이내 조심스럽게 손을 펼쳤다.

그 안에는 아까 루드비히의 어깨에서 떼어 낸 머리카락이 들어 있었다.

디아나는 그것이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붙잡아 들고 살폈다.

‘……갈색.’

햇빛에 반짝이는 머리카락은 세드릭 하이에른과 같은 짙은 갈색이었다.

* * *

세드릭 하이에른이 옐링 공작위를 물려받은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이 디아나가 밤새 고민해 내린 결론이었다.

세드릭이 남들의 눈이 닿지 않을 때 보였던 태도 변화.

루드비히와의 만남을 암시하는 짙은 갈색 머리카락.

그리고 회귀 전, 세드릭이 옐링 공작위에 오른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레베카를 지지하기 시작했던 것.

그 모든 조각을 종합해 보니 결론은 하나였다.

피오나 옐링의 죽음은 계획된 것이며, 그 범인은 레베카 듄 블루벨이다.

‘……하긴. 이 일이 내가 레베카의 시녀가 되기 전부터 준비되었던 것이라면, 굳이 내게 이야기해 줄 필요까지는 없었겠지.’

디아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만큼 레베카를 잘 아는 이는 없을 것이다 자신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녀가 모르던 레베카의 모습이 하나둘 드러났다.

그럴수록 디아나는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절절히 깨달았다.

그로 인해 눈을 가리고 있던 안개를 걷어 낼 수 있게 되었으니 오히려 잘된 일이긴 하지만.

‘문제는 세드릭이 도대체 어떤 식으로 피오나의 자살을 유도했냐는 건데.’

회귀 전에도, 딸의 죽음에 눈이 돌아간 옐링 공작이 미친 듯이 단서를 찾아 헤맸지만 결국 증거라고 할 만한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증거가 없으니 세드릭과 레베카의 흉계를 입증할 방법도 없다.

그렇다면 사실상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이 모든 일의 근본이 되는 원인을 제거하는 것.

즉, 세드릭 하이에른을 피오나 옐링에게서 떼어 놓는다.

그보다는 피오나 옐링이 세드릭 하이에른에게서 관심을 끊게 만든다, 라고 하는 편이 정확하겠지.

‘누가 봐도 더 마음이 있어 보이는 쪽은 피오나였으니까.’

다과회 때, 디아나는 세드릭을 관찰하는 동시에 피오나 역시 눈에 담았다.

피오나는 다른 때에는 제 나이답지 않게 능숙하게 표정을 숨길 줄 알았지만, 세드릭을 바라볼 때만큼은 그를 향한 마음을 얼굴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그 마음을 끊어 내게 하거나, 다른 이에게로 돌려야 할 듯싶었다.

똑똑.

“들어와.”

때마침 노크를 하며 뮈젤이 찾아왔다. 오늘 역시 하녀로 분장한 그녀는 품 안에 감춰 온 서류 뭉치를 디아나에게 내밀었다.

“피오나 옐링에 관한 모든 자료입니다. 특히 취향에 대해 상세히 기술해 놓았습니다.”

“고마워, 뮈젤.”

디아나는 반색하며 몸을 일으켰다. 서류의 첫 장에는 피오나 옐링의 이상형에 관련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짙은 갈색을 선호함, 곱슬머리를 선호함, 잘생긴 사람을 선호함, 몸이 좋은 사람을 선호함…….’

세드릭 하이에른은 대외적으로만큼은 흠잡을 곳 하나 없는 완벽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꿍꿍이를 가지고 있다고 말해봤자 모함이라는 오해를 받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러니 현재로서 피오나의 죽음을 막을 가장 좋은 방법은, 그녀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것.

하여 디아나는 뮈젤에게 피오나의 이상형과 취향 등을 상세히 알아 오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여기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 있을 리가…….’

……어라?

피오나의 취향을 머릿속으로 하나둘 조립해 보던 디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짙은 갈색의 곱슬머리. 좋은 몸.

거기에 세드릭 이상으로 수려한 외모까지 지닌 이가 딱 한 사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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