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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52/145)

52화

어린 영식과 영애들의 춤이 끝난 후로는 자유롭게 춤을 추거나, 교류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갓 데뷔탕트를 치른 이들은 상기된 얼굴로 저들끼리 무리를 짓기도 했으며, 혹은 다른 귀족들과 어울리며 이런저런 조언을 귀담아들었다.

그렇게 사람들의 활기가 절정에 달했을 무렵.

케이든은 1황자 부부와 대화를 나누며 무도회장 저편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그의 시선 끝에 있는 것은 밀라드에게 알랑거리는 투도크 백작의 모습이었다.

‘지난번의 일 때문에 누님 쪽에 붙기로 마음을 바꿔 먹었나 보지.’

케이든은 차게 웃었다.

투도크 백작은 그 살기를 느낀 것인지 힐끔힐끔 케이든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꿋꿋이 밀라드와 서즈필드 자작에게 말을 붙이려 노력했다.

‘분명 눈에 띄지 말라고 말했을 텐데, 기어코 여기까지 기어들어 오는 배짱은 높게 쳐 줘야 하나.’

하지만 케이든은 행여 투도크 백작이 다른 이들에게 디아나에 대해 안 좋은 소리를 떠들고 다니지는 않을지, 그것이 디아나의 귀에 들리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어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는 동안 케이든의 마력이 주인의 심리를 따라 불안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디아나는 마력이 날뛰려는 조짐을 감지하자마자 서둘러 그의 손을 붙잡았다.

“케이든, 혹시 어디 불편해요?”

“……음?”

“열은 안 나는 것 같은데…….”

케이든은 갑작스러운 물음에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의아함을 나타냈다.

그러나 디아나는 일부러 부산을 떨며 한 손으로 그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가, 볼을 만져 보았다가, 손을 잡기를 반복하며 그의 마력을 가라앉히는 데 집중했다.

그러한 노력 덕인지 다행히 케이든의 마력은 얼마 지나지 않아 차츰 가라앉았다.

‘그래도 예전에 비해 진정되는 속도가 조금 더 빨라진 것 같네. 나아지고 있는 건가?’

디아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손을 물렸다. 정확히는 그러려고 했다.

“제 손을 잡고 싶으셨던 거라면 그냥 이야기를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비.”

케이든이 손가락을 움직여 깍지를 끼며 손등에 입을 맞추지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심지어 케이든은 단순히 입을 맞추는 데 그치지 않고 그녀의 살갗을 살짝 깨물었다. 아프지는 않았으나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그 감각에 디아나가 흠칫하며 숨을 멈춘 사이, 케이든은 능글맞게 웃으며 그녀와 거리를 좁혔다.

“또 하고 싶은 건 없으십니까? 예를 들면 이런 거라든가.”

케이든의 입술이 이마에 가볍게 내려앉았다. 촉, 하는 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자 볼이 달아올랐다.

“아니면 이거?”

이번에는 그가 코끝에 입을 맞췄다. 디아나는 간지러움을 견디느라 저도 모르게 케이든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사이 그의 입술이 콧잔등을 타고 점차 아래로 내려왔다.

“아니면…….”

케이든의 목소리가 점차 가라앉았다. 검은 눈에 위험한 빛이 깃들며 그의 시선이 디아나의 입술로 향했다.

그가 주는 감각에 정처 없이 휩쓸리던 디아나는 입술이 맞닿기 직전, 황급히 손을 들어 올려 그를 막았다.

“케이든, 그만. 그만요.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그녀의 얼굴은 드물게도 눈에 띄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것을 본 케이든은 눈을 한번 깜박이고는 짓궂은 미소를 띠며 그녀의 손바닥을 살짝 핥았다.

거리가 워낙 가까웠기에 젖은 살이 마찰하는 질척한 소리, 감각이 고스란히 들리고 느껴졌다.

디아나는 순간 털이 쭈뼛 서는 듯한 감각에 작게 신음을 삼켰다.

그녀가 눈을 뾰족하게 뜨며 그를 나무랐다.

“그런 뜻 아니라니까요.”

“알았어. 그렇다고 칠게.”

“정말이지…….”

디아나는 한숨처럼 웃으며 케이든과 아옹다옹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소리 죽여 키득거렸다.

“어머. 두 분께서는 아직도 신혼이신가 보네요.”

“그러게 말이에요. 아까 투도크 백작께서 3황자 부부가 곧 갈라설 거라고 떠드는 소리를 들었는데, 아무래도 아닌 것 같죠?”

“저 모습을 봐요. 저게 어떻게 갈라서기 직전인 부부의 모습이겠어요?”

“하긴. 저분들이 갈라서면 제국에는 남아나는 부부가 없겠네요.”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

사람들은 케이든과 디아나의 사이좋은 모습을 흐뭇한, 혹은 설레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물론 모두가 그런 반응인 것은 아니었다.

“……이런 자리에서 망측하게 대체 뭐 하는 짓거리인지.”

밀라드는 무도회장 저편에서 케이든과 디아나의 모습을 보고는 사정없이 눈살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최근 케이든이 입지를 넓혀 가고, 그에 따라 약혼자인 레베카의 입지가 위협받게 되어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정작 그가 가진, 가져야 할 것들을 빼앗아 간 이들은 저리 속이 편해 보이니 분통이 터졌다.

그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다스리기 위해 와인을 물처럼 마셔 댔다.

하지만 외려 그것이 그의 속에서 들끓는 울분에 불을 붙였다.

밀라드는 결국 참지 못하고 서즈필드 자작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버지, 정말 이대로 두고 보실 겁니까? 저 애를 이용해서 무슨 수라도 써야 할 것 아니에요!”

밀라드가 씨근덕대며 작게 소리쳤다.

그러자 케이든과 디아나의 모습을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던 서즈필드 자작이 밀라드를 돌아보았다. 그가 전에 없이 엄중한 태도로 경고했다.

“섣부르게 굴지 마라, 밀라드 서즈필드. 고작 네 감정 하나 해소하자고 설치다가 1황녀 전하의 심기를 거스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사실 서즈필드 자작은 조금 전의 광경으로 인해, 밀라드보다는 디아나 쪽이 제 야망을 이루기 적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레베카와 밀라드는 아직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다.

레베카는 밀라드가 그녀를 찾아가면 상냥히 맞아 주었으나, 그녀가 먼저 밀라드를 찾는 일은 없었다.

그에 반해 케이든과 디아나는 척 보아도 정신없이 서로에게 빠져 있다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래서 서즈필드 자작은 뛰어난 장사꾼답게 어디에 투자해야 제게 이익이 될지 빠르게 따져 보았다.

그의 선택은 디아나였다.

‘대체 저 사생아가 뭐라고.’

밀라드는 처음 보는 자작의 모습에 찔끔하며 어깨를 움츠렸으나, 곧 억울함에 이를 악물었다.

최근 서즈필드 자작은 이상하리만치 디아나에게 관대하게 굴었다.

정작 적통 자식은 그 자신이었는데도.

“……저는 1황녀 전하께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저 사생아에게 가 보시든지, 어머니와 함께 돌아가시든지, 마음대로 하십시오.”

서즈필드 자작의 태도에 상심한 밀라드가 싸늘히 말을 내뱉고는 발을 떼었다.

그는 사람들을 헤치고 레베카의 곁으로 돌아갔다.

“1황녀 전하.”

“아, 서즈필드 영식.”

레베카는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파트너가 오래 자리를 비우면 안 되지.”

“아…….”

밀라드는 흡사 겨울을 빚어 놓은 듯 신비롭고 아름다운 그녀의 외모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전하. 부디 용서를.”

그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녀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확신했다.

‘나의 선택이 옳다.’

위대하고 아름다우신 분.

이 땅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보다 매혹적이신 분.

아버지께서도 지금은 잠시 눈이 어두워지셨다지만, 곧 깨닫게 되실 것이다.

최후의 승리자는 레베카 듄 블루벨이 되리라는 걸.

그리고 그 곁에는 자신이 함께하리라는 걸.

밀라드는 경외와 애정을 한가득 담아 레베카의 손등에 입술을 내렸다.

* * *

‘더워…….’

디아나는 결국 케이든의 장난을 버티지 못하고 휴게실로 향하는 길이었다. 볼에 손등을 대어 보니 화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디아나는 억울한 기분마저 들었다.

“대체 왜 저러시는 거지?”

아무리 익숙해지기 위함이라지만, 최근의 케이든은 정말이지 작정한 사람처럼 그녀에게 들러붙곤 했다.

‘이 정도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아니면…….]

그때 문득 조금 전, 갈증을 느끼는 듯한 표정으로 제 입술을 바라보던 케이든의 모습이 떠올랐다.

디아나는 당황해 우뚝 걸음을 멈췄다. 잠시 정지해 있던 그녀가 무의식중에 중얼거렸다.

“물론 싫은 건 아닌데…….”

아니, 잠깐. 그렇다고 좋다는 뜻은 아닌…….

‘……아닌가?’

이제는 멀쩡한 사고마저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디아나는 고개를 휘휘 저어 잡생각을 털어 버린 후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역시 좀 진정되면 돌아가야겠네…….”

그녀는 볼을 식히고 무도회장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근처의 빈 휴게실을 찾아 들어갔다.

그러나 문이 닫히기 직전.

“……써 가게?”

“조금 더 있다가 가지.”

“미안. 파트너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잖아.”

복도 반대쪽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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