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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44/145)

44화

“숙녀들의 대화를 엿듣는 것은 신사의 도리가 아니라 말씀드렸을 텐데요.”

나긋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등 뒤에서 그의 손을 잡아챘다.

“……!”

페란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자 스산한 미소를 띤 루드비히가 쉿, 하며 다른 손으로 휴게실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달칵.

아주 작은 소음과 함께 휴게실의 문이 틈 없이 닫혔다.

루드비히는 그 후에야 페란트의 손을 놓아주며 몸을 뒤로 물렸다.

그의 얼굴에 자리하고 있던 미소가 남김없이 사라졌다.

“분명 말씀드렸을 텐데요. 지금은 특히나 더 행동거지를 조심해야 할 때라고요.”

“너 이 새끼……!”

“3황자의 부상에 깊은 유감을 표하며 다녀도 모자랄 판에, 저런 멋모르는 영애들에게 패악질이라도 부릴 생각이셨습니까.”

페란트는 싸늘하게 저를 질책하는 목소리에 관성적으로 목을 움츠렸다.

그러나 곧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울컥 치받쳤다.

‘내가 대체 왜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 거지?’

[그러면 2황자 전하께서는 태어났을 때부터 1황녀 전하의 도구나 다름없었던 거로군요.]

[1황녀 전하께서 너무도 당연하게 2황자 전하가 전공을 세울 기회를 빼앗아 가시는 게 아닐까 염려가 되는 마음에…….]

저 영애들의 말에 틀린 구석이 있나?

페란트는 태어난 순간부터 모든 의지를 거세당한 채, 어머니인 2황비에 의해서 오로지 레베카를 위한 도구로 길러졌다.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그렇게 배웠으므로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레베카가 익숙하게 그를 모욕하고 수치를 줄 때마다. 사람들이 뒤에서 그를 비웃을 때마다.

회의감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지?

나는 왜…… 무조건적으로 누님의 말에 복종하며 살아야 하는 거지?

왜?

“…….”

루드비히는 주먹을 움켜쥐고 부들부들 떠는 페란트를 한심하게 쳐다보았다가, 이내 입가에 그림 같은 미소를 걸며 그의 어깨를 다정히 도닥였다.

“전하.”

“…….”

“페란트 전하.”

“…….”

“많이 피로하시다면 이만 돌아가 쉬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다른 분들께는 제가 잘 설명하겠습니다.”

제대로 연기하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방해하지 말고 사라지라는 축객령이었다.

페란트는 루드비히의 웃는 얼굴을 마주하면 그 번지르르한 낯을 한 대 갈기고 싶어질 것 같아 제 발끝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이를 악물었다.

“……그러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돌아가시는 길에는 부디…… 헛소리에 귀 기울이시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루드비히는 페란트의 매무새를 가볍게 가다듬어 준 후 몸을 돌려 사라졌다.

페란트는 루드비히가 사라질 때까지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가, 그가 모퉁이 너머로 사라진 후에 실소를 터트렸다.

“하, 이제는 저딴 후작 놈까지 나를 가르치려 드는군.”

페란트는 잠시 어깨까지 들썩이며 소리 없이 웃어 댔다. 한 손에 얼굴을 파묻어 보아도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손 틈새로 언뜻 보이는 그의 눈에 광기가 스쳐 지나갔다.

페란트는 어느 순간 웃음을 뚝 멈추고는 천천히 몸을 폈다.

2황비가 늘 강조했던 ‘바른 자세’가 된 그가 입매를 사납게 뒤틀었다.

침을 퉤 뱉은 페란트는 곧 루드비히가 사라진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 버렸다.

그가 사라지자 복도에는 완전한 적막이 찾아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달칵.

루드비히가 손수 닫았던 휴게실의 문이 작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조그맣게 벌어진 틈 사이로 바깥을 살피던 청보랏빛 눈동자가 다시금 휴게실 안으로 사라졌다.

“갔나 봐요.”

“하아, 다행입니다…….”

디아나의 말에 벨라도바가 탄식을 뱉으며 소파에 눕듯이 등을 기댔다.

디아나의 앞에서 예의가 아닌 행동이라는 점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긴장이 턱 풀린 탓에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벨라도바의 맞은편에 앉은 뮈젤은 그녀와 대조되게 멀쩡한 낯이었다.

뮈젤은 신기한 것을 보듯이 벨라도바를 응시하며 혀를 끌끌 찼다.

“역시 아가씨들이란.”

“무례하네요.”

“어쩌겠습니까. 저는 귀족도 아닌걸요.”

뮈젤은 어깨를 으쓱이며 얄밉게 대꾸했다.

벨라도바는 그녀를 노려보다가 디아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전하, 정말 저런 자에게 믿고 일을 맡겨도 되는 건가요?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무례를 저지르는 것밖에 없는 듯한데요.”

“무려 한 달여간이나 더 신뢰를 쌓아 온 저보다는 그쪽이 의심스러운 게 당연한 거 아닙니까? 저는 비 전하의 길드 소속이라고요.”

디아나는 이제 익숙해진 뮈젤과 벨라도바의 다툼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벨라도바를 시녀로 들이고 난 후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두 사람은 지극히 상극이었다.

디아나가 원활히 움직이기 위해서는 뮈젤과 벨라도바 역시 서로에 대해 알아 두어야 했기에 두 사람을 소개해 주었다.

[뮈젤. 이쪽은 벨라도바 레제타. 벨라, 이쪽은 뮈젤.]

디아나는 두 사람이 썩 나쁘지 않은 관계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뮈젤은 사소한 일 하나하나에도 예의를 차리려 드는 벨라도바를 피곤하게 여겼고, 벨라도바는 격 없는 편인 뮈젤을 싫어했다.

‘어차피 또 저러다가 말겠지.’

디아나는 딱히 두 사람을 말리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간의 경험에서 터득한 지혜였다.

“그보다 두 사람 다 고마워. 덕분에 큰 도움이 되었어.”

디아나가 뮈젤과 벨라도바를 번갈아 바라보며 싱긋 미소 지었다.

모의 전투가 열렸던 당시.

디아나는 관중석에서 개인전이 시작되길 기다리다가, 레베카가 페란트를 밀치고 지나가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리고 홀로 남겨진 페란트가 일그러진 얼굴로 주먹을 말아 쥐는 것 또한.

[그러고 보니…….]

회귀 전, 페란트는 디아나가 누명을 쓰고 목이 잘린 순간까지 목숨을 잃지 않기는 했다.

하지만 디아나는 레베카의 시녀로 지내는 동안, 페란트가 이따금 레베카의 등 뒤에서 그녀를 노려보곤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레베카에게 드러내 놓고 반항하거나, 그녀의 명을 따르지 않은 적은 없으니 금세 관심을 거두었지만.

[이용할 수 있겠네.]

디아나는 페란트의 얼굴에서 여러 질척한 감정들을 읽어 내고는 달갑게 미소 지었다.

그래서 일부러 페란트가 혼자가 되기를 기다린 뒤, 휴게실의 문을 약간 열어 둔 채로 그가 지닌 굴욕감과 열패감을 정확히 자극했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휴게실 바깥에 힐리사들을 배치해 두었는데, 다행히 페란트는 그녀의 의도대로 레베카에게 어느 정도의 반감을 품은 듯이 보였다.

‘사냥제 전까지 2황비의 세력만 쳐 내도 큰 수확이니까.’

균열은 만들어 뒀다. 이제는 균열에 제때 박아 넣을 못을 준비할 차례였다.

* * *

축하연이 끝난 이후.

케이든은 안정적으로 유력한 황위 계승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모의 전투의 결과를 보고 그에게 줄을 대고 싶어 하는 귀족이 많아졌으며,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3황자궁의 형편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아졌다.

파트라슈는 망설임 없이 장부에 승인 도장을 찍으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예산 걱정을 하지 않고 연무장 보수 요청서를 결재할 수 있다니…….”

케이든은 파트라슈가 감격하는 모습을 보고 픽 웃어 버렸다.

‘확실히…… 어마어마하군.’

케이든은 책상 위로 턱을 괸 채 서류들을 살피며 내심 혀를 내둘렀다.

그는 예전의 자신이 문자 그대로 얼마나 ‘끈 떨어진 연’ 신세였는지 요즘 들어 뼈저리게 체감하곤 했다.

사용인들의 월급과 성의 보수 유지비, 기사들의 장비 수리비 등을 걱정하지 않고 결재할 수 있다는 것이 아직도 생소하게 느껴졌으니까.

꼬르륵.

그때 집무실에 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파트라슈는 곧장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점심 식사 시간입니다, 주군.”

“하여간 한 끼라도 거르는 법이 없군. 네 배꼽시계가 어지간한 시계보다 정확하겠어.”

“어차피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니 당연한 것 아닙니까? 주군께서는 비 전하와 함께 드실 거죠?”

움찔.

파트라슈의 물음에 케이든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는 서류를 슬그머니 들어 올려 교묘하게 얼굴을 감췄다.

그 작태를 본 파트라슈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설마 또 따로 드시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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