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결국 기다리다 못한 케이든이 의아한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고 눈을 뜨려던 순간, 그녀가 그의 가슴팍에 고개를 툭 기댔다.
케이든은 당황으로 굳었다가, 연분홍빛 머리카락 사이로 작게 훌쩍이는 소리가 나자 급하게 그녀를 끌어안고 등을 다독였다.
“디아나,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면 약이 너무 썼어?”
“제 걱정할 때가 아니라고 했잖아요……. 약은 썼어요…….”
“아, 참. 그렇지. 미안. 쓴 거 나아질 때까지 나 때릴래?”
디아나는 드물게도 작게 칭얼거리며 케이든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툭툭 때렸다.
케이든은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명확히 파악하지 못했지만 우선 그녀를 달래기 위해 아무런 말이나 늘어놓았다.
“많이 걱정했나 보네. 하긴, 피를…… 많이 흘렸을 텐데, 무서웠겠지. 다음부터는 더 조심할게. 내가 아무리 못 미덥긴 해도 계약도 못 지키고 죽는 몹쓸 놈이 될 생각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에요.”
그 순간 디아나가 케이든의 말을 자르며 불시에 고개를 휙 들었다.
눈가가 발갛게 달아오른 채로 원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디아나를 본 케이든이 숨을 멈췄다.
디아나는 눈물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그를 정면으로 직시하며 울음 섞인 말을 뱉었다.
“계약이나 그런 것 때문이 아니라, 저는…….”
“…….”
“그냥 순수하게 당신을 걱정하는 거라고요.”
말을 맺는 디아나의 눈가로 또다시 눈물이 왈칵 흘러내렸다.
방어전이 끝난 뒤로 벌써 일주일가량이 지났다.
그동안 사람들은 방어전의 결과를 두고 매일매일 들썩였다.
결국 베제트가 디아나를 공격하려 했다는 명확한 증거는 찾지 못했지만,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기묘한 분위기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당시 방어전에서 벌어진 일들을 전해 들은 귀족들은 열에 여덟이 은연중 레베카의 짓이었을지도 ‘모른다’라며 은근히 떠들고 다녔다.
이는 당시 케이든을 끌어안고 울던 디아나의 모습이 사람들의 눈에 무척이나 안쓰럽게 비친 탓도 있었다.
하여 레베카는 현재 적잖은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건국제 행진 담당을 빼앗긴 것만으로도 매분마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텐데.
대외적으로는 아무런 능력도, 힘도 없다고 알려진 디아나를 공격하려 했다는 소문까지 암암리에 돌자 레베카의 이미지는 상당히 추락했다.
하지만 디아나는 레베카가 타격을 입었다는 사실을 오롯이 기뻐할 수가 없었다.
레베카로 인해 부상을 입은 케이든이 며칠 내내 깨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디아나는 케이든이 눈을 뜨지 못하는 동안 피가 마른다는 말이 어떠한 것인지 몸소 체감했다.
외상이 잘 아물어 가고 있다는 황궁의의 말을 들어도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
디아나는 엘리엇과 플뢰르가 몇 번이고 만류했지만 고집스레 케이든의 곁에 붙어 있으며 그를 간호했다.
잠시라도 눈을 뗐다가는 그가 또다시 죽을 것만 같다는 강박과도 같은 불안이 밀려온 탓이었다.
디아나는 이제 레베카로 인해 그 무엇도 잃고 싶지 않았다.
케이든은 디아나가 손에 담고 있는 것 중 가장 귀한 것이었다.
디아나는 눈물에 젖은 눈매를 일그러트리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저는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아.
그 말을 듣는 순간, 케이든은 저도 모르게 나지막한 탄식을 흘렸다.
문득 목 안쪽이 뜨거워졌다. 그는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 되어 숨을 삼켰다.
어떻게 당신은…… 이처럼 한결같이 나를 수렁에서 건져 올리는 걸까.
당신은 어떻게 언제나 나도 몰랐던, 나에게 가장 필요한 말과 가장 필요한 행동을 건네는 걸까.
대체, 어떻게…….
“어쩌자고 이래, 그대…….”
케이든은 결국 디아나를 품에 깊숙이 끌어안고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고 나서야 꽉 막혔던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외려 그 사실이 더욱 절망스럽게 느껴졌다.
[걱정하지 마세요. 전하께서 황태자 자리에 오르고 나시면 꼭 이혼해 드릴 테니까요.]
케이든은 디아나의 말을 떠올리며 소리 없이 자조했다.
그래, 우리는 결국 계약으로 맺어진 관계이자 끝이 정해져 있는 관계에 불과한데.
……이제 와서 내가 당신을 보내 주고 싶지 않다고 하면.
당신이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나를 경멸하게 될까.
케이든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내 놓을 수 없는 물음만 목 안으로 삼키며, 한참이나 디아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 * *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케이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황궁의는 역시 체력과 회복력 하나는 괴물 같다며 혀를 내둘렀다.
“이 정도면 오늘 밤 열리는 축하연에 참석하셔도 괜찮을 듯싶습니다. 물론 금주는 하셔야 하지만요.”
“용케도 축하연 취소는 되지 않았군.”
“황후 폐하께서 애쓰셨지요.”
케이든의 말에 황궁의가 의료함을 닫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전통적으로 모의 전투가 끝나면 그로부터 열흘 후에 황궁에서 우승자를 위한 축하연이 열린다.
1황비는 케이든이 쓰러져 있는 사이, 그의 의식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축하연을 취소해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가뜩이나 레베카의 이미지가 추락한 이때, 축하연까지 열었다가는 케이든이 레베카를 제치고 방어전에서 승리했다는 이미지만 공고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축하연에 참석해도, 참석하지 않아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될 것이고.
축하연에서 귀족들이 하나둘 케이든에게 접근하기 시작할 것이라는 점도 문제였다.
하지만 1황비는 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디아나가 다칠 뻔하고, 케이든이 큰 부상을 입은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황후가 그녀를 막아섰던 것이었다.
[황궁의의 말에 따르면 3황자는 곧 깨어날 거네. 그러니 축하연은 예정대로 준비하지.]
[‘곧’이라는 애매한 말만으로 국고와 인력을 낭비하는 일은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3황자가 축하연 전까지 깨어날 거라는 보장도 없는데…….]
[1황비. 자네는 꼭 3황자가 축하연 전까지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듯하군. 내 말이 틀렸나?]
지금껏 실질적인 권력을 잡고 있었던 것은 1황비라 할지언정, 황후는 황후였다.
황후는 결혼 전 대륙에서 발하나스 제국을 제외하고는 가장 강력하다 일컬어지는 라비크 왕국의 유일한 공주였고, 현왕의 유일한 누이였다.
태어난 순간부터 몸에 밴 위엄은 쉽사리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내내 조용히, 1황비와 나서서 대적하는 일 없던 황후가 이렇게까지 강경하게 나온 것은 처음이었기에 1황비는 퍽 당황했다.
[모의 전투의 승자를 위한 축하연은 오랜 전통이었네. 그리고 고작 축하연 준비 한 번으로 휘청거릴 나라였다면 진작 망했겠지.]
거기에 평소 이러한 싸움에 관여하지 않던 황제까지 나서서 말을 더하니 그녀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1황비는 이를 갈며 물러났다. 다만 현재 레베카의 세력이 다소 술렁이고 있었기 때문에 황후에게 달리 보복할 여력은 없어 보였다.
“아무튼 고맙네. 괜히 나 때문에 고생하는군.”
케이든은 셔츠 단추를 마저 잠그고서 황궁의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황궁의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의료함을 챙겨 나가려던 그가 잠긴 문을 열기 전 문득 고개를 돌리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발작은 좀 어떠십니까?”
“발작? 그러고 보니…….”
케이든은 새삼스럽게 자신이 최근 발작으로 인해 괴로워해 본 적이 없음을 깨닫고 조금 놀란 얼굴이 되었다.
‘결혼식 당일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은데.’
케이든은 날짜를 헤아리다가 픽 웃음을 흘렸다.
어쩐지 디아나와 결혼한 후부터 모든 일이 이상하리만치 잘 풀리는 느낌이었다.
결혼을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1년 후의 이혼에 대한 생각도 따라왔다. 케이든은 또다시 시무룩해졌다.
‘몸은 멀쩡한 대신 머리가 이상해지신 건가, 저런…….’
케이든이 홀로 피식거리며 웃다가 시무룩해하길 반복하는 모습을 본 황궁의가 해괴한 것을 본 듯한 얼굴로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황궁의가 사라지고 얼마 되지 않아 노크 소리를 내며 디아나가 찾아왔다.
그녀는 오래간만에 제대로 치장한 모습으로 생긋 웃었다.
“준비는 다 끝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