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왜 울어. 마음 아프게.”
케이든은 고통으로 인해 찡그린 얼굴로 웃어 보였다.
그가 간신히 손을 들어 디아나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 행동에 지금껏 도자기 인형처럼 무감하던 디아나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케이든은 그런 표정 짓지 말라고 이야기하려다가 말고 정신을 잃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무릎 위로 툭 떨어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디아나는 숨 쉬는 것을 잊었다.
“전하께서…….”
“빨리 황궁의를…….”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한층 커졌다. 그 속에서 레베카가 냉정하게 목소리를 키웠다.
그녀는 파트라슈가 루드비히를 붙잡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에 굉장한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다들 소란 떨 것 없다. 어차피 곧 황궁의가 도착할 거고, 모의 전투 중 이 정도 부상은 흔한…….”
바로 그때.
“……!”
레베카는 돌연 섬뜩한 살기가 숨통을 죄는 느낌에 황급히 말을 멈추고 시선을 내렸다.
디아나가 피 웅덩이 위에 주저앉아, 마찬가지로 피투성이인 케이든을 끌어안은 채 살벌한 얼굴로 저를 노려보고 있었다.
디아나는 케이든을 레베카에게서 지키려는 듯이 조금 더 세게 끌어안았다.
그녀의 마음속에 ‘미련’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던, 레베카에 대한 일말의 감정마저 모조리 잘려 나갔다.
‘우리는 당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그렇게 당신 마음대로, 당신이 내키는 대로.
언제든 죽이고, 살리고, 해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사실 디아나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마음 한구석에서 레베카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녀가 자신을 토사구팽하고 죽인 사실이 현실 같지 않았다.
어쩌면 부정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디안. 디안이라고 부르마.]
레베카와 함께했던 시간은 단연코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찬란했던 시기였으니까.
회귀하고 난 후 마주한 레베카는, 그녀가 티끌 하나 없이 사랑하던 시절의 ‘레베카’였으니까.
하지만…….
[디, 아나…….]
제 몸이 찢기는 고통에도 저 하나 안심시키려 애써 웃음을 지어내는, 피투성이가 된 케이든의 표정을 눈에 담은 순간 깨달았다.
‘당신은 나의 적이야.’
디아나 서즈필드가 사랑했던 ‘레베카’는 없다.
그리하여 지금 이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환상을 모조리 거두어 낸, 날것 그대로의 ‘레베카 듄 블루벨’뿐이었다.
디아나는 이제야 제 안의 모든 미련을 털어 내고 있는 그대로의 레베카 듄 블루벨을 마주 볼 수 있게 되었다.
선과 악은 판을 뒤집듯 나누어지지 않는다.
디아나 본인 또한 ‘선’이라 말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불분명한 와중에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은 틀렸어.’
제 목적을 위해, 다른 이들의 소중한 것을 서슴없이 뺏어 가는 레베카의 방식은 분명 잘못되었다는 것.
그리고 디아나는 더는 레베카에게 그 무엇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케이든이라면 더더욱.
‘……뭐지?’
한편, 레베카는 내내 조용하고 순하기만 하던 디아나가 독기 어린 눈으로 저를 노려보자 크게 당황했다.
디아나의 눈빛은 단순히 사랑하는 이가 부상을 입어 분노한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더 짙고, 강렬한 어떤 것.
레베카조차 그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지는 감각을 느꼈을 정도로 지독한 무언가.
레베카가 당황해 말을 멈춘 사이, 디아나가 입술을 움직였다.
“베제트 경께서 저를 공격하셨어요.”
그다지 크지는 않으나 또렷한 목소리였다.
사람들이 그 말에 너 나 할 것 없이 놀라 숨을 들이켰다.
“베제트 경께서……?”
“깃발을……?”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하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파트라슈와 루드비히처럼, 깃발 역할을 하는 이의 몸 어딘가를 붙잡는 것만으로도 깃발을 뺏었다고 인정되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 굳이 깃발을 공격했다니.
거기에 그 대상이 레베카의 측근으로 이름 높은 제1연대의 부연대장이라니.
하지만 디아나는 확신에 찬 태도로 말을 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똑똑히 봤습니다. 폭발이 일어났을 때, 베제트 경께서 오페라 다이아몬드를 이용해 안타르 경의 장벽을 뛰어넘으셨고, 그 너머로 저를 공격하셨어요. 케이든 전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저를…….”
디아나는 말끝을 흐리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분노가 북받쳐 끝으로 갈수록 목소리가 떨렸다.
사람들의 귀에는 그것이 눈물을 참느라 떨리는 것처럼 들렸다.
그들이 하나둘 묘한 기색으로 레베카와 베제트를 응시했다.
“그게 사실이냐?”
그때 기묘해진 분위기에 쐐기를 박는 물음이 들려왔다.
사람들은 소란을 보고 관중석에서 내려온 황제의 앞에 급히 허리를 숙였다.
“잠시 지나가겠습니다.”
사람들이 케이든의 주변에서 물러나자, 황궁의와 1황자 내외가 다급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3황자비 전하.”
케이든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은 황궁의가 안타까운 음성으로 조심스레 디아나를 불렀다.
디아나는 입술을 한번 꾹 말아 물고는 천천히 케이든을 똑바로 눕혔다.
플뢰르가 눈물 젖은 눈으로 그런 그녀의 등을 끌어안았다.
황궁의가 케이든의 등을 치료하는 사이.
저 멀리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는 부연대장의 앞까지 다가간 황제가 무감정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묻잖나.”
“아, 아닙니다. 저는…….”
“네가 감히 기사도 아닌 자를, 그것도 황족을 해하려 한 것이 사실이냐.”
지금에야 지독한 무기력과 향락에 빠져 어지간한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황제지만.
그는 젊었을 적 대륙을 두려움에 떨게 했을 정도로 강대한 황제였다.
부연대장은 그 위압감을 버티지 못하고 덜덜 떨다가 혀를 씹었다.
그는 디아나가 공격을 눈치챌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적잖이 당황스러운 상태였다.
‘1황녀 전하…….’
부연대장이 도움을 구하는 눈길로 레베카를 쳐다보자, 그녀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빠르게 수신호를 했다.
그 움직임을 확인한 부연대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 수신호는 레베카가 그를 어떻게든 빼내 주겠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3황자비의 말을 제외하면 명백한 증거는 없다.’
그는 한결 진정된 모습으로 허리를 꼿꼿이 펴고 섰다.
“실수였습니다.”
“실수라고?”
“예. 저는 모래 장벽을 세운 이를 공격하여 장벽을 무너트리려 한 것이지, 3황자비 전하를 공격하려 했던 것이 아닙니다. 허공에서 순간적으로 몸을 가누지 못해 일어난 사고입니다.”
부연대장은 당당하게 말을 맺었다.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디아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시선 한 자락 주지 않은 채 고집스럽게 케이든에게 눈을 고정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희게 질린 얼굴이 유달리 눈에 띄었다.
그 안쓰러운 모습을 본 사람들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명확한 증거는 없다지만…….’
레베카의 측근인 부연대장.
그리고 레베카의 적이나 다름없는 케이든의 부인, 디아나.
이 모든 일이 과연 우연이기만 할까?
혹시…… 레베카가 케이든을 자극하기 위해 디아나를 노린 것은 아닐까?
아무리 황위가 탐나도 그렇지, 설마 아무런 힘도 없는 민간인을……?
3황자비도 뭔가 느낀 것이 있으니까 저렇게 확신하는 거 아니겠어?
그런 의구심이 사람들 사이로 소리 없이 퍼져 나갔다.
황제는 잠시 디아나의 옆얼굴을 바라보다가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실수로 인한 일이라고 해도 황족을 해할 뻔한 일이니 처벌이 없을 수는 없다. 우선 끌고 가.”
“알겠습니다.”
황제의 명을 받은 기사들이 부연대장을 이끌고 사라졌다.
그는 레베카가 자신을 어떻게 해서든 빼내어 줄 것이라 믿고 있었기 때문에 고개를 당당하게 치켜든 채 걸음을 옮겼다.
쯧, 하고 혀를 찬 황제가 방어전의 종식을 선언했다.
“마지막에 사고가 발생하긴 했지만, 마무리는 해야겠지. 이번 방어전은 제4연대의 승리다. 그렇게 마무리한 줄로 알아. 이상.”
황제는 성의 없이 말을 늘어놓은 후 휘적거리며 본궁으로 사라져 버렸다.
몇 년 동안 고정되어 있던 승자의 자리가 뒤바뀌는 순간.
“……!”
사람들 사이에서 숨죽인 비명이 터져 나온 것은 당연지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