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레베카는 서늘한 일갈을 내뱉은 후 페란트와 함께 케이든에게 달려들었다.
쾅!
사슬과 칼날이 부딪치며 굉음이 울렸다.
검을 크게 만들어 레베카와 페란트를 동시에 막아낸 케이든이 소리쳤다.
“패트!”
“걱정 마십시오, 주군!”
케이든의 외침에 파트라슈가 들고 있던 해머의 형태를 바꾸었다.
작은 날개를 양쪽 발에 붙인 그가 기사들 사이를 헤치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눈으로 따라잡기 힘들 정도였다.
“막아!”
“그쪽으로 간…… 으악!”
그 바람에 제1연대의 기사들이 우왕좌왕하다가 한쪽 방어선을 무너뜨렸다. 파트라슈가 곧장 그 틈을 파고들었다.
레베카가 입매를 뒤틀며 재차 검을 휘둘렀다.
“……잔재주를 가르친 모양이구나.”
“등 뒤에 여유가 생기니 본인의 특성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자리에 인재를 배치할 여유도 자연스럽게 생기더군요.”
본래 파트라슈는 몸집이 날랜 것이 특기였다.
그러나 전에는 깃발을 지킬 필요성도 있었기 때문에 차마 과감하게 그를 곁에서 떼어 둘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안타르가 있어 방어조에 기울이는 신경을 거둘 수 있게 된 케이든은 과감하게 파트라슈에게 깃발을 맡기기로 했다.
레베카와 페란트는 여기서 케이든의 발을 묶는다고 생각했겠지만, 오히려 묶인 건 그들이었다.
케이든이 레베카와 페란트를 잡아 두는 사이, 파트라슈가 레베카의 깃발을 빼앗고, 안타르는 케이든의 깃발을 지킨다.
그것이 이번 방어전에서의 전술이었다.
‘할 수 있어.’
케이든은 엘판드까지 소환한 후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제4연대의 기사들은 분명 레베카의 기사들보다 훈련도, 무구도 부족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다른 연대로 옮겨 갈 수 있음에도 케이든을 믿고 따르는 마음 하나로 제4연대에 남아 주었다.
그런 그들이 가장 자신할 수 있는 것은 죽을 만큼 노력하는 것, 그리고 버티는 것.
케이든의 생각대로, 이번이 그들에게도 마지막 기회인 것을 아는 제4연대의 기사들은 거세게 상대를 몰아붙였다.
그 바람에 레베카와 페란트 연합의 전진이 생각보다 지지부진했다.
그사이 파트라슈는 어느새 제1연대의 성벽 근처에까지 다다라 있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아무리 케이든이라 할지라도 홀로 두 개의 연대를 막아내는 것은 확실히 힘에 부쳤다.
그는 슬슬 마력이 줄어드는 것을 느끼고 숨을 몰아쉬었다.
힐긋 시선을 돌리니 파트라슈가 공중제비를 돌며 저를 붙잡는 제1연대의 기사를 걷어차는 모습이 보였다.
케이든은 힘겨운 와중에도 그걸 보고 픽 웃어 버렸다.
‘살판났군.’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이대로라면 낙승이었다.
처음으로, 정말로 레베카를 꺾고 방어전의 우승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저쪽도 잘 막아내고 있는 듯하고.’
레베카와 페란트를 상대하는 도중에도 시야 구석에 드문드문 안타르가 만들어 낸 거대한 모래벽이 보였다.
“넘어가! 넘어가라고!”
“젠장, 발이 빠져서 올라갈 수가 없잖아!”
“타지도 않아……!”
제1연대의 기사들은 안타르가 만들어 낸 모래벽 앞에 무력했다.
모래벽을 넘어 디아나에게 접근하려 해도, 모래에 발이 푹푹 빠져 그럴 수가 없었고.
불이나 물 등으로 태우고 굳혀 보려 시도해 보아도 금세 그 자리를 새로운 모래가 덮어 버렸다.
현재 황궁 기사 중 대지 속성의 중급 정령사는 옐링 공작을 제외하면 안타르가 유일했다.
‘정말이지 기적 같은 타이밍이군.’
케이든은 약간의 사심을 담아 페란트의 복부를 걷어차며 속으로 혀를 찼다.
때마침 안타르를 영입하지 않았다면, 올해 역시 레베카에게 패배하고 건국제 행진의 선두 역시 그녀의 차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디아나가 전해 준 쪽지, 그리고 그로 인해 알게 된 안타르의 존재가 상황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그러고 보니 디아나는…….’
거기까지 생각이 흐르자 자연스럽게 디아나에게로 시선이 돌아갔다.
그 직후. 케이든은 디아나를 향해 뻗어 나가는 흰 불꽃을 목격했다.
그리고 디아나가 충격받은 듯 굳어 있는 모습도.
생각을 할 틈도 없이 입술이 벌어졌다.
“-엔카!”
* * *
조금 전.
‘어?’
디아나는 성벽에 올라앉아 전투를 관전하던 도중, 시야 구석에서 누군가를 발견하고 눈을 깜박였다.
‘제1연대의 부연대장이잖아. 저 사람은 보통 방어조를 지휘하는 역할일 텐데, 왜 이쪽으로 오는 거지?’
디아나의 미간이 설핏 좁혀졌다.
그는 교묘하게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서 디아나에게로 조금씩 접근하고 있었다.
디아나는 고개를 숙여 안타르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경! 괜찮나!”
“……괜찮습니다, 아직은.”
안타르는 힘겨운 기색으로 모래벽을 유지하고 있었다.
다른 기사들 역시 안타르가 만들어 낸 모래벽을 돌아서 접근하는 이들을 막아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펑!
“크아악!”
그때 레베카와 케이든의 부근에서 불꽃이 폭발했다.
그로 인해 한 기사가 새까맣게 탄 손을 붙잡고 비명을 내질렀다.
안타르를 비롯한 모두의 시선이 폭발과 그로 인해 비명을 지르는 기사에게로 쏠려 있을 때.
“……!”
멀지 않은 곳에서 마력이 한번 크게 일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디아나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그쪽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어?’
디아나는 정확히 저를 향해 불꽃을 날리는 부연대장과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주먹만 한 오페라 다이아몬드를 움켜쥐고 있던 그는 디아나와 눈이 마주칠 줄 몰랐는지 당황한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모든 것이 아주 느리게 느껴졌다.
짧은 사이, 디아나는 본능과도 같은 감각으로 누군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눈을 굴려 옆쪽을 바라보자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아.”
혼란스러운 사람들 틈에서 정확하게 제가 있는 쪽을 바라보고 있는 레베카였다.
그 순간, 디아나는 이 일을 레베카가 지시했다고 깨달으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레베카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마력이라도 움직였다가는 그 즉시 정령사라는 사실을 들킬 것이 뻔했으니까.
하여 디아나는 저를 향해 매서운 속도로 뻗어져 오는 불꽃을 보고도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녀가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던 때.
“엔카!”
귓전을 온통 뒤흔들 만큼 날카로운 고함과 함께, 눈앞에 금빛 나비의 무리가 나타났다.
빛의 하급 정령, 엔카들이 누군가 쏟아부은 것처럼 무리를 지어 디아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
엔카들은 불꽃이 몸에 닿자마자 소리 없이 비명을 질렀다. 그들은 날갯짓할 틈도 없이 불꽃에 타올라 사라졌다.
‘이건…….’
케이든?
디아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레베카가 있던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후 이어진 일련의 광경에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쿨럭!”
케이든이 지나치게 많은 수의 역소환으로 인해 피를 토하고.
그 여파로 레베카의 검을 가로막고 있던 엘판드가 빛 알갱이로 흩어졌으며.
서걱―
장애물이 사라진 레베카의 검이 그대로 케이든의 등을 내리그었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파트라슈가 루드비히의 손을 붙잡고 경박스럽게 만세를 외치는 소리도 멀게만 느껴졌다.
디아나는 손끝 하나 까딱하지 못한 채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케이든을 살피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비 전하!”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녀를 깨웠다.
퍼뜩 시선을 내리자 어느새 모래벽을 거둔 안타르가 성벽과 이어진 계단을 만들어 놓고 외쳤다.
“내려오십시오!”
그에 디아나가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안타르가 만들어 준 계단을 밟고 땅으로 내려왔다.
‘케이든.’
디아나는 사람들을 아무렇게나 밀치며 케이든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케이든이 있는 곳으로 다가갈수록 피비린내가 짙어졌다. 손끝이 덜덜 떨리며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케이든?”
실바람 같은 소리만이 간신히 잇새로 흘러나왔다.
디아나는 케이든이 쓰러진 곳에서 몇 발자국 떨어진 채 우뚝 멈춰 섰다.
쿵, 쿵.
먹먹한 귓가로 심장이 뛰는 소리만 커다랗게 울렸다.
코끝을 휘감은 혈향이 이미 지나간 과거를 억지로 끄집어냈다.
[생각해 보면 영애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쁜 인상은 아니었어. 오히려…….]
[좋았지. 친구 하고 싶었을 정도로.]
“전하! 정신 차리십시오!”
“케이든 전하!”
제4연대의 기사들이 케이든의 상처를 찢어 낸 옷으로 동여매며 울부짖었다.
피 웅덩이가 점차 번져 갔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이 피에 젖는다.
그 모습이 마치, 회귀 직전 보았던 처형장의 광경 같았다.
“…….”
디아나는 말없이 몇 발자국을 떼었다.
케이든의 곁에 멈춰 선 그녀가 옷자락이 피에 젖어 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끌어안았다.
“디, 아나…….”
케이든은 의식이 가물가물한 와중에도 디아나가 제게 가까이 다가왔음을 느끼고 그녀를 불렀다.
디아나가 그 부름을 듣고 시선을 내리자 그가 애써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다친 곳은…… 없지?”
“…….”
“괜찮아?”
“…….”
“……왜 울어. 마음 아프게.”
케이든은 고통으로 인해 찡그린 얼굴로 웃어 보였다.
그가 간신히 손을 들어 디아나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 행동에 지금껏 도자기 인형처럼 무감하던 디아나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