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3황자비가 정령사일 가능성이라.’
레베카는 디아나의 첫인상을 곰곰이 상기했다.
그녀와 제대로 마주한 것은 결혼식 피로연 때.
그때의 디아나는 방치당하며 큰 사람답지 않게 완벽한 예법과 미소를 선보였다.
그로부터 느껴지던 묘한 초연함. 혹은 이질감.
그것이 혹시나 그녀가 정령사였기 때문에 새어 나온 ‘여유’라면?
“…….”
연푸른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허황한 가정이었지만, 동시에 마냥 무시할 수는 없을 정도로 거슬렸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레베카는 결국 디아나에게서 느껴지던 묘한 위화감을 지나치지 못했다.
그녀는 마음을 정한 즉시 방어전에 참가하는 일반 기사들의 대기실로 갔다.
레베카가 지휘하는 제1연대의 부연대장이 대기실에 찾아온 그녀를 발견하고는 황급히 뛰어와 부복했다.
“1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잠시 나 좀 보지.”
레베카는 그들을 보고 웅성대는 기사들을 힐긋 일별하고 걸음을 돌렸다. 부연대장이 그녀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샐러맨더.”
레베카는 불의 하급 정령을 시켜 주위에 듣는 귀가 없음을 확인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
“베제트 경.”
“하문하십시오.”
“지난 몇 년간 방어전의 우승은 항상 제1연대의 차지였던 것을 알고 있겠지.”
“예. 잘 알고 있습니다.”
부연대장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방어전은 본디 누가 상대 진영의 깃발을 빠르게 빼앗는지, 본인 진영의 깃발을 지켜 내는지 등을 종합해 순위를 판가름했다.
그 과정에서 각 연대는 필요에 따라 협력할 수 있으나, 그 경우 깃발을 빼앗은 것으로 인정되지 않으며, 단순히 둘 중 한쪽으로 전력이 흡수된다고 쳤다.
최근 몇 년의 방어전은 줄곧 레베카와 2황자 연합의 승리였다.
다른 두 연대를 맡은 두 공작들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 우승에는 관심 없이 저들끼리 싸우기 바빴고, 2황자 페란트는 레베카의 편이었으니까.
2황자 페란트는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레베카에게 제 깃발을 넘기고 그녀의 깃발을 지키는 역할을 맡곤 했다.
레베카는 본진의 깃발을 빼앗길 염려를 덜고 그저 케이든의 깃발을 빼앗는 데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에 반해 케이든은 제 진영의 깃발을 보호하는 것과 동시에, 레베카 진영의 깃발을 빼앗아야 했다.
단순히 공격력만 놓고 본다면 케이든이 레베카와 페란트보다 우세했으나, 제4연대에는 본진을 안전하게 지켜 낼 만한 이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하여 지금까지의 방어전에서는 모두 레베카가 우승을 차지했다.
두 공작의 연대는 사실상 방어전에 참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으니 실격 처리되기 일쑤였고.
레베카는 페란트의 지원을 받아 케이든의 깃발을 빼앗고 우승을 차지했다.
‘방어전’이라는 이름의 뜻처럼, 방어전에서는 상대방 진영의 깃발을 빼앗는 것보다 본인 진영의 깃발을 빼앗기는 것이 더 치명적이었다.
방어에 적합하지 않은 케이든 본인의 능력으로 깃발을 지켜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시피 했다.
‘제깟 게 날뛰어 봐야 의미 없는 발악일 테지.’
냉랭하게 평가를 내린 레베카가 말을 이었다.
“나는 이번 방어전에서, 깃발 대신 각 연대에서 한 사람씩을 뽑아 표식을 대신하게 하자고 제안할 생각이야.”
“예?”
“그럴 이유가 생겼어. 어차피 그편이 방어전의 취지와는 더 맞을 테니 황제 폐하께서도 크게 개의치 않으실 거다.”
방어전은 결국 실전에서 자국 군주의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 실행되는 것.
아마도 황제는 큰 이견 없이 레베카의 제안을 받아들여 줄 가능성이 컸다.
“단, 깃발의 역할을 할 자는 기사가 아니며 각 연대장과 각별한 사이일 것. 그래야 다들 경각심을 가지고 경기에 임할 테니까.”
말은 그렇게 했으나 사실상 디아나를 끌어내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다.
케이든의 주변 인물 중 레베카가 제시한 조건에 맞는 이는 객관적으로 디아나뿐이었다.
레베카가 노리는 것이 바로 그 부분이었다.
“3황자 측에서는 아마 3황자비를 깃발 대용으로 내세울 거다. 경은 경기 중간에 나와 페란트가 시선을 끌면, 그 틈을 타 몰래 3황자비를 공격해 보도록. 조금 다치는 것 정도는 상관없으니 목숨에만 지장이 없게 해.”
만약 디아나가 정말로 정령사임을 숨기고 있다면, 공격을 피하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든 힘을 사용할 것이고.
만약 그녀가 정령사가 아니라면…… 뭐, 안타깝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레베카에게는 디아나의 부상보다 제 의구심을 확인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한편, 부연대장은 대외적으로 연약하다 알려진 3황자비를 공격하라는 명에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어째서 그런 명령을…….”
“내가 경에게 질문할 권리를 주었던가?”
하지만 레베카가 서느런 음성으로 그의 말을 끊어 냈다.
그 음성에 퍼뜩 정신을 차린 부연대장이 황급히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앞에 고개를 숙였다.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부디 용서를.”
“됐으니 대답부터.”
“목숨을 바쳐서라도 명하신 바를 이행하겠습니다, 나의 주군이시여.”
그제야 레베카의 얼굴에 미약하게나마 만족감이 차올랐다.
부연대장은 엄숙히 몸을 낮춰 레베카의 흙투성이 신발 위로 입을 맞췄다.
* * *
마도구를 통해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짧았던 휴식의 끝을 알렸다.
“곧 방어전이 시작될 예정입니다. 각 연대는 속히 단상 앞으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 안내를 들은 사람들이 하나둘 단상 앞으로 모여들었다.
이윽고 그들이 각 연대별로 정렬해 서자, 진행을 맡은 관료가 말을 이었다.
“방어전을 시작하기에 앞서, 1황녀 전하께서 한 가지를 건의하셨습니다.”
“……건의?”
“무엇을?”
뜻밖의 말에 기사건 관람객이건 할 것 없이 모두가 웅성거렸다.
레베카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걸음을 떼어 단상 위로 올라섰다.
관료가 마도구 앞에서 물러서자 그녀가 대신 그 앞에 서서 입을 열었다.
“저는 이번 방어전에서 각 연대를 상징하는 표식을 깃발이 아닌 사람으로 지정하자는 의견을 내었습니다. 그편이 방어전의 취지에도 걸맞고, 사기를 북돋는 데 도움이 되겠지요. 참고로 황제 폐하께서는 이미 허가하셨습니다.”
‘뭐?’
디아나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레베카는 본디 이렇듯 갑작스럽게 행동을 바꾸는 이가 아니었기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황제가 있는 쪽을 바라보자, 그는 자신에게 쏠리는 사람들의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팩 찌푸리고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레베카는 매끄러운 목소리로 사람들의 주의를 다시 자신에게 가져왔다.
“방어전의 취지를 부각하기 위한 제안이니만큼, 표식의 역할을 할 자는 기사가 아닌, 객관적으로 각 연대장과 각별한 관계인 사람으로 한정하겠습니다. 혹 이의가 있는 분이 있다면 지금 발언해 주십시오.”
사람들은 그녀의 말을 듣고 웅성거렸다.
갑작스럽긴 했으나, 레베카의 제안을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어 보였다.
케이든 또한 그 점이 의심스러워 눈을 가늘게 뜬 채 레베카를 바라보았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레베카가 아무런 꿍꿍이도 없이 이런 돌발 제안을 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녀의 말과 행동에서 달리 수상쩍은 구석을 찾지 못했기에 무작정 반대하기도 어려웠다.
그사이, 레베카는 사람들을 한번 휘 둘러보더니 당연한 태도로 말을 마무리 지었다.
“달리 이견은 없는 모양이니 각 연대에서는 표식의 역할을 할 자, 편의상 ‘깃발’이라고 불릴 이들을 선출해 주시길 바랍니다.”
레베카는 그 말을 남기고는 단상에서 사뿐사뿐 내려왔다.
미간을 좁힌 케이든의 주위로 제4연대의 기사들이 모여들었다.
“주군.”
“어떻게 할까요? 생각나는 사람은 없으십니까?”
기사들이 웅성댔으나 케이든은 레베카의 속을 짐작하는 데 골몰해 있어 말이 없었다.
그러자 기사들은 누구를 깃발로 내세워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객관적으로 전하와 각별한 관계인 사람이라고 하면…… 1황자 전하 내외나, 레밋 경 정도일 텐데.”
“하지만 기사가 아니어야 한다는 조건도 있었잖아.”
“1황자 전하 내외께서는 몸이 아주 약하시니…… 부탁드리기에도 조금 그렇지 않나.”
두런두런 의견을 주고받던 기사들의 시선이 문득 관람석 쪽으로 향했다.
“……?”
그들의 시선 끝에 있는 것은 눈을 깜박이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3황자비, 디아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