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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31/145)

31화

‘……벨라도바?’

유리창 너머, 저 멀리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벨라도바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왜 여기 있지? 이 근처에는 유리온실밖에 없을 텐데…….’

디아나는 의아함에 눈을 깜박였다.

황족만이 출입할 수 있는 유리온실 근처에, 귀족 영애인 벨라도바가 굳이 걸음을 할 이유는 없을 텐데.

아니면 이 근처에서 달리 만날 사람이라도…….

[……알겠습니다.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3황자비 전하.]

“……!”

다음 순간. 디아나는 벨라도바의 인사를 기억해 내는 동시에, 그녀의 맞은편에 서 있는 상대를 확인하고는 저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엘리엇과 플뢰르가 당황해 그녀를 불렀다.

“디아나?”

“아, 잠시만요. 여기 계세요!”

다급히 말을 뱉은 디아나가 온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유리문을 열자마자 앙칼진 목소리가 희미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여긴 너 같은 하급 귀족 따위가 발을 들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썩 꺼져.”

‘누가 동복 남매 아니랄까 봐.’

디아나는 2황자 페란트와 꼭 닮은 모습으로 벨라도바에게 날카로운 말을 늘어놓는 카를롯타를 발견하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안 그래도 최근 들어 표정이 별로더니, 결국 또 아무나 붙잡고 시비를 거는구나.’

벨라도바는 유리온실 안으로 들어온 게 아니고, 단지 근처를 맴돌았을 뿐인 듯한데.

하지만 심기 불편한 카를롯타에게는 그조차 거슬린 모양이다.

황제와 레베카 일가를 제외한 이들에게는 안하무인으로 구는 것이 일상이었으니, 새삼 놀랄 일은 아니었지만.

한편, 카를롯타는 제 축객령에도 난처하게 제자리를 지키는 벨라도바의 모습에 헛웃음을 삼키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것 봐라.’

그녀는 정원에서 마물들이 새장을 빠져나와 날뛴 일로 근신을 명받았다가 간신히 풀려난 참이었다.

그 기념으로 오랜만에 유리온실에서 티타임이나 가지려고 했더니.

웬 버러지 같은 것이 근처에서 알짱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제 축객령을 듣고도 귀가 먼 것처럼 꿋꿋이 제자리에 서 있는 행태가 심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카를롯타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재차 으르렁댔다.

“꺼지라는 말 안 들려?”

“……만나 뵈어야 할 분이 있습니다.”

“하.”

벨라도바는 조금 당황한 얼굴이었음에도 꿋꿋이 대꾸하며 자리를 지켰다.

그녀가 연이어 제 말에 대거리했다는 생각에 카를롯타가 울컥하여 손을 치켜들려던 찰나였다.

“제가 불렀습니다.”

그때 디아나가 목소리를 내며 빠른 걸음으로 벨라도바의 앞을 막아섰다.

그에 벨라도바와 카를롯타가 나란히 어깨를 움찔 떨었다.

‘벨라도바야 그렇다 쳐도, 카를롯타는 왜……?’

디아나는 저를 보며 이상하리만치 당황하는 카를롯타의 모습에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곧 의문을 밀어 넣고 눈썹을 시무룩하게 누그러트렸다.

“제가 오늘 1황자 전하 내외와 유리온실에서 티타임을 가지기로 한 것을 깜박하고 벨라도바를 궁으로 불렀지 뭐예요. 아마 그래서 저를 찾아 돌아다닌 것 같아요. 그렇지, 벨라도바?”

“맞습니다.”

벨라도바는 디아나의 눈치를 보고 재빨리 맞장구쳤다. 이전보다 한결 빨라진 반응이었다.

디아나는 보란 듯 카를롯타를 돌아보았다.

만약 카를롯타가 또다시 꼬투리를 잡는다면 영혼 없는 사과를 뱉어 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카를롯타는 미미하게 두려워하는 듯한 기색을 내비치며 디아나로부터 두어 걸음 물러섰다.

“다, 다음부터는 정신을…… 잘 챙기고 다니시는 것이 좋겠군요. 3황자비의 얼굴을 보아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그럼.”

피로연 때의 2황비와 비슷한 말을 쏟아 낸 카를롯타가 황급히 몸을 돌렸다.

카를롯타의 티타임 용품을 든 채 우왕좌왕하던 사용인들이 디아나에게 몸을 숙여 인사하고는 황급히 제 주인을 따라 사라졌다.

어라, 가 버렸네.

‘뭐지?’

디아나는 카를롯타답지 않은 행동에 미미하게 미간을 찡그렸다.

분명 못해도 세 번쯤은 더 트집을 잡으려 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의구심에 잠겨 있던 와중 귓가로 기죽은 음성이 스며들었다.

“또 이렇게 신세를 지게 되는군요. 면목이 없습니다.”

“아.”

디아나는 상념을 갈무리하고 몸을 돌렸다. 그러자 주눅 든 얼굴의 벨라도바가 눈에 들어왔다.

디아나는 살며시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이곳에는 페란트도, 카를롯타도 없었으므로 말투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애초에 나를 만나려 하다가 생긴 일이잖아요. 별일 아니었는걸요.”

“아닙니다. 알현 순서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어야 했는데, 행여 저를 잊어버리실까 하는 마음에……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죄송합니다.”

벨라도바가 깍듯이 사과했다.

이어서 허리를 깊이 숙인 그녀가 잠잠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사가 많이 늦었지요. 그때도, 조금 전에도.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3황자비 전하.”

“…….”

“전하께서 구해 주시지 않았더라면, 저는 제 마음에 담아 둔 이에게 고백조차 하지 못하고 목을 매달았을 겁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민망할 정도로 정중한 감사 인사에 디아나는 조금 부끄러워졌다.

이윽고 몸을 바로 세운 벨라도바가 웃으며 말했다.

“그 은혜를 갚고 싶습니다.”

“은혜라고 할 것까지야…….”

“저를 3황자비 전하의 사람으로 삼아 주십시오.”

그 말에 디아나가 멈칫했다. 벨라도바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그날 저를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저는 틀림없이 자진했을 겁니다.”

“…….”

“전하께서 살려 주신 목숨이니, 전하를 위해 쓸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디아나는 말없이 벨라도바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맑고 투명한 분홍색의 눈은 흔들림 없이 견고했다.

‘……좋은 눈이네. 믿어 봐도 괜찮을 만큼.’

한편, 디아나가 벨라도바를 관찰하는 것처럼 벨라도바 역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밀조밀하고 귀여운 인상의 얼굴에서 서서히 표정이 씻겨 나갔다. 그러자 놀랍도록 무감정하고 서늘한 얼굴이 되었다.

벨라도바는 그 차이에 전율했다.

잠시 후, 디아나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벨라도바.”

“예, 전하.”

“정말 괜찮겠어요?”

“…….”

“내가 어떤 사람일 줄 알고 그렇게 함부로 목숨을 걸어요.”

디아나는 일부러 무표정한 얼굴로 벨라도바를 겁주었다.

하지만 벨라도바는 물러서지 않았다.

“제가 본 전하께서는 좋은 분이었습니다. 처음 보는 이의 곤경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실 만큼.”

“…….”

“그러니 저를 전하의 사람으로 삼아 주십시오.”

벨라도바는 말을 마친 후 긴장한 상태로 디아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억겁 같던 몇 초가 흐른 후.

디아나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가 눈까지 접어 웃으며 답했다.

“좋아요, 벨라.”

벨라는 그 순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이 순간의 선택으로 이득을 보는 쪽은 디아나가 아니라, 자신이 될 것이라고.

* * *

다음 날, 케이든과 디아나의 점심 식사 자리.

케이든은 고기를 썬 접시를 디아나 쪽으로 밀어 주며 물었다.

“그건 그렇고, 정말 황후 폐하께 시녀들을 보내 달라고 하지 않아도 되겠어?”

“네. 저는 벨라만 있으면 충분해요.”

괜히 황후의 시녀들까지 옆에 두었다가는 오히려 행동에 제약이 늘 것이 뻔했다.

디아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었다.

케이든은 모의 전투가 코앞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디아나와 식사라도 함께하기 위해 꼬박꼬박 궁으로 돌아왔다.

디아나는 그가 피로할 것을 염려했지만, 어느새 그와 함께 식사하는 것이 지나치게 익숙해진 탓에 식사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아, 그리고 그대가 주었던 쪽지 말이야. 파트라슈에게 조사를 맡겼더니 정말이라더군.”

케이든은 포도 한 알을 입에 넣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설마하니 정말로 대지 속성의 중급 정령사가 불법 투견장 같은 곳에 매여 있을 줄이야.

게다가 비타스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 나쁜 곳이었다. 악질적인 운영 방식과 계약 조건은 노예를 길들이는 것이라고 해도 다름없었기에.

케이든을 비타스에 가도록 주도한 것은 디아나였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화색을 띠었다.

“정말요? 다행이네요.”

“확실히 그렇지. 안타르가 제4연대에 들어왔으니 이번에는 정말 우승을 노릴 만하겠어. 식사가 끝나면 파트라슈가 데려오기로 했으니, 인사라도 나누자고.”

그 말을 뱉는 케이든의 얼굴에서는 수심이 많이 걷혀 있었다.

디아나는 그것이 기꺼워 빙긋 웃었다. 그러다가 문득 든 생각에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다치시면 안 돼요.”

그러자 케이든이 장난스럽게 턱을 괴고 웃었다.

“왜?”

“왜냐니, 그야 당연히…….”

“하긴. 내가 다치기라도 하면 그대가 내 몸을 마음껏 만지작댈 수도 없겠군.”

“콜록.”

디아나가 당황해 콜록댔다. 그녀는 급하게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식당 안에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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