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오늘은 몇 분이나 버틸 수 있으려나. 저번처럼 급소를 꿰뚫릴 뻔해서 상대를 바로 죽여 버리면 판돈이 적어질 텐데.’
이윽고 안타르는 체념 어린 숨을 삼키며 계단을 내려갔다.
비타스의 사장은 안타르가 정령사가 된 후로 그에게 마물을 상대하라 명했다.
처음에는 소형 마물이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물의 몸집과 살상력은 높아졌다.
거기에 피로까지 누적되자 그는 말 그대로 매 경기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있었다.
오늘은 특히나 몸이 천근만근이었던지라 불안감이 더욱 커졌다.
안타르는 제발 사장이 그나마 상대하기 수월한 마물을 데려오길 바라며 제 대기실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그가 셔츠의 단추를 풀고, 늘 입던 바지를 찾아 입었을 때 문이 벌컥 열렸다.
“이제야 온 거냐? 분명 경기가 시작하기 전에 관중석을 돌아다니며 귀빈들에게 눈도장이라도 찍어 놓으라고 했을 텐데.”
“……사장님.”
문을 열고 들어온 자는 비타스의 사장이었다.
안타르는 저를 보자마자 얼굴을 팩 구기는 그를 향해 잠잠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하지만 사장은 성큼성큼 안타르에게 다가가더니 곧장 그의 정강이를 빡 소리 나게 걷어찼다. 안타르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리고 누가 이렇게 다 가려 놓으랬어? 벗으라고! 상처가 잘 보여야 멍청이들이 더 흥분해서 돈을 많이 걸 것 아니야!”
사장은 거친 손길로 안타르의 셔츠를 찢듯이 빼앗아 벗겼다.
그 바람에 멍과 흉터들을 고스란히 드러내게 된 안타르가 등 뒤로 주먹을 꽉 쥐었다.
마음만 같아서는 저자를 죽여 버리고 싶었으나 그는 온갖 보호 마도구들을 몸에 칭칭 감고 있는 자였고, 자신에게는 책임져야 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니 참자. 참을 수 있다.
오늘이 지나면 적어도 며칠 동안은 저자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될 테니까.
안타르는 속으로 그렇게 되뇌며 사장의 폭언과 폭력을 견뎠다.
그러길 얼마간. 멀리서 함성이 들려오자 사장이 혀를 차고는 문을 향해 까딱 고갯짓했다.
“5분 후면 경기 시작이다. 채비하고 나오도록 해.”
“……예.”
“하여간 지지리 말 안 듣는 놈 같으니.”
사장이 안타르의 발치에 침을 퉤 뱉고 밖으로 나갔다.
방을 나서는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더없이 장사치다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안타르는 눈을 꾹 감았다 뜨는 것으로 애써 분노를 삭였다. 심장에 한 손을 올린 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노에스, 언제나 미안. 오늘도 잘 부탁해.”
그러자 그와 영혼이 연결된 정령이 그를 위로하듯 낑낑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에 안타르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고는 작은 단도를 들고 경기장으로 향했다.
경기장 입구와 이어지는 복도에서 벌써 사장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다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늘 새롭고 짜릿한 경기가 준비되어 있는 비타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비타스의 자랑! 안타르를 소개합니다!”
관중들의 환성이 귓전을 쩌렁쩌렁하게 메웠다.
안타르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명이 환하게 밝혀진 경기장으로 발을 들였다.
곧 자신의 자리에 멈춰 선 안타르가 긴장해 단검을 고쳐 쥐었다.
탁한 푸른색의 눈이 경기장 저편의 철창을 노려보았다.
‘제발 적당한 마물이 나오길.’
그는 그렇게 빌고 또 빌었다. 이 순간에도 몸 상태가 조금씩 나빠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사장은 그의 기대를 어김없이 배신했다.
“……이 정도면 안타르에 대한 설명은 충분히 드린 것 같고, 상대를 소개해야겠죠? 오늘은 제가 아주 특별한 친구를 데려왔습니다!”
사장의 말에 맞추어 경기장 저편의 철창이 스르륵 열렸다. 그리고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소개합니다! 핀들레이 영지에서 며칠 전 발견되었다던 변종 마물입니다!”
대형 마물보다 더욱 섬뜩한 모습의 변종 마물이었다.
크아악!
변종 마물은 철창이 열리자마자 밖으로 뛰쳐나와 처절하게 포효했다.
‘……미친 새끼.’
그 섬뜩한 울음소리에 안타르는 찰나 공포로 굳었다. 관중과 사장 또한 일순 말을 멈추었을 정도였다.
‘통제조차 할 수 없는 괴물을 데려오면 어쩌자는 건지.’
안타르는 형형한 눈길로 사장을 노려보며 이를 으득 갈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변종 마물은 사람들이 무어라 말을 이을 틈도 주지 않고 안타르에게 달려들었다.
‘살아남는 게 먼저다.’
안타르는 일부러 시간을 끌려던 계획을 철회하고 단검을 내던졌다. 그가 마력을 움직이며 입을 열었다.
“노에스!”
콰앙!
간발의 차로 솟아오른 돌벽이 마물의 발길질을 막고 폭발하듯 부서졌다.
그 잔해들로 곧장 날카로운 창을 만들어 쥔 안타르가 이를 악물고 마물에게 달려들었다.
‘단숨에 급소를 노리는 수밖에 없어.’
이 경기를 오래 끌면 끌수록 그가 살아날 확률은 희박해진다.
마물이 갓 우리를 뛰쳐나와 흥분해 있는 지금이 유일한 틈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안타르는 그런 생각으로 온 힘을 다해 마물의 심장 부근에 창을 찔러 넣었다.
정확히는 찔러 넣었다, 라고 생각했다.
콰직!
보통의 돌보다 정령의 힘으로 수백 배는 단단한 창이 마물의 가죽에 막혀 맥없이 부러졌다.
‘무슨 가죽이 저렇게……!’
경악하는 것과 동시에 강한 충격이 온몸을 강타했다. 마물이 분노로 날뛰며 앞발로 안타르를 후려친 것이었다.
쾅!
“커헉!”
안타르의 몸이 경기장 외벽에 강하게 부딪혔다. 안 그래도 만신창이였던 몸에서 순식간에 피가 터졌다.
‘그만…….’
안타르는 피를 토해 내며 사장 혹은 관중 중 누구라도 이 상황에서 저를 구해 주기를 바라 간신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주, 죽은 건가?”
“됐다! 땄다!”
“아니야! 아직 안 죽었어!”
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사람이 죽어 나가건 말건 그저 경기의 승패를 따져 대는, 돈에 눈먼 벌레들뿐이었다.
안타르는 뒤늦게 미약한 헛웃음을 지었다.
인간이 아닌 것들에게 대체 뭘 기대한 건지.
안타르는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저 멀리서 마물이 그를 발견하고 입을 쩍 벌린 채 달려오는 모습이 느리게 시야에 박혀 들었다.
‘노에스…….’
몸 상태가 죽음에 가까워져서인지 정령과의 연결도 희미하게 느껴졌다. 안타르는 어떻게 해서든 힘을 끌어내 보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끝이구나.’
그리 체념하며 눈을 감는 순간.
“마력을 그렇게 다루면 안 되지.”
작은 속삭임이 귓가에 들리더니 누군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놀라 뒤를 돌아보았으나 보이는 것이라곤 난장판이 된 경기장의 잔해뿐이었다.
“무슨…….”
“이렇게 손을 앞으로 뻗고.”
안타르가 당황해 입을 벌렸으나 고운 목소리는 제 할 말만을 내뱉었다.
정체불명의 여인은 등 뒤에서 그를 감싸 안 듯이 선 채로 그와 겹친 손을 들어 올렸다.
직후 여인의 몸에서 마력이 살벌하게 일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퍼져 있는 마력을 모아서 한 점을 겨냥하듯이. 단번에 숨을 끊어.”
여인의 마력이 저를 겨냥하는 것도 아닌데 그 움직임에 뒷덜미로 소름이 돋아났다.
안타르는 본능적으로 여인이 보여 준 움직임을 따라 남은 마력을 긁어모았다. 언뜻 등 뒤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잘했어, 안타르.”
푸욱!
그 말과 동시에 흙바닥에서 날카로운 가시가 솟아나더니 그대로 마물의 심장을 꿰뚫었다.
키에에엑!
꼬챙이에 꿰인 듯한 형상이 된 마물이 발광했다. 하지만 안타르가 만들어 낸 가시가 마물의 발버둥보다 우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물은 비명을 멈추고 허공에 축 늘어졌다. 그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사장이 악을 썼다.
“스, 승리! 비타스의 안타르, 승리했습니다!”
그러자 관중석에서 폭발적인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 소란 사이로 가느다란 속삭임이 울렸다.
“돌아보지 말고 들어. 당신의 삶을 바꿀 기회를 줄게.”
“……!”
“기회를 잡고 싶다면 경기가 끝나고 곧장 뒷문으로 나와.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은 10분뿐이야.”
“잠깐……!”
안타르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그를 붙잡고 있던 온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안타르는 유령에 홀린 기분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에게 비타스의 사장이 호쾌한 웃음을 터트리며 다가왔다.
“잘했다, 안타르! 완전히 대박이야! 오늘은 너와 네 애들 전부가 배부르게 식사할 수 있을…….”
“사장님, 경기가 끝났으니 저는 이만 들어가 봐도 될까요. 상처 때문에 조금…… 피곤하네요.”
그때 안타르가 사장의 말을 끊으며 한 손으로 복부를 감쌌다.
그의 손 틈으로 피가 새어 나오는 것을 발견한 사장이 기분 좋게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 오늘 수고했다. 돈은 저녁에 전달해 주마.”
“……감사합니다.”
안타르는 영혼 없이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몸을 돌려 뒷문 쪽으로 내달렸다.
그 움직임에 온몸의 상처가 비명을 질렀으나 그런 것을 의식할 새도 없었다.
사람들이 모두 경기장에 몰려 있을 시간이었기에 경기장을 제외한 곳은 인기척 하나 없이 조용했다.
“어디, 어디 있습니까.”
안타르는 뒷문 근처에 다다라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혹시나 아까의 일이 제 망상이나 꿈이었을까 두려워 심장이 둥둥 뛰었다.
그러나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상처는 치료하고 나올 줄 알았는데.”
숨이 가빠 띄엄띄엄 상대를 부르자 허공에 물감을 칠하듯 스르륵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