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145)

27화

“수장님.”

“으악.”

디아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다소 책을 읽는 듯 고저 없는 목소리로 작게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자 창문을 타고 방 안으로 넘어오던 뮈젤이 고개를 갸웃했다.

“비명이 참 특이하시네요. 그보다 잠시 비켜 주시겠습니까? 이러다가 남의 눈에 띄기라도 했다가는 저희 모두 곤란할 것 같아서요.”

확실히, 황자비의 방 창문을 넘는 수상한 그림자……라는 소문이라도 났다가는 여러 가지로 곤란했다.

디아나는 그제야 벌렁거리는 심장을 추스르고 옆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 틈을 타, 또다시 낯선 얼굴로 변장한 뮈젤이 날렵하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뮈젤은 디아나가 틈 없이 커튼을 친 후에야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때쯤 평정을 되찾은 디아나가 심각하게 미간을 좁히고 물었다.

“뮈젤.”

“예, 수장님.”

“꼭 이렇게 극적으로 등장했어야만 했을까? 우리에겐 문이라는 훌륭한 통로가 있는데.”

“저도 딱히 극적인 걸 좋아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다만 수장님 방 근처의 경비가 대폭 늘어났더군요. 아마 3황자 전하께서 하신 일이 아닐까 싶은데요.”

그 말에 디아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케이든이 독살 미수 사건 이후로 과하게 그녀를 챙기려 드는 것을 몸소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제 입으로 인정하기에는 어쩐지 낯이 뜨거워지는 기분인지라, 디아나는 소심하게 항의했다.

“명색이 부길드장인데 그 정도도 못 피해? 언제는 식은 스튜 먹기라며.”

“스튜도 스튜 나름이지요. 3황자 전하는 아무래도 스튜라기보다는 괴작에 가까우신 것 같아서.”

“괴작이라니. 사람한테 그런 말을 쓰면 안 돼.”

“금실이 좋아 보여서 다행입니다.”

“…….”

언제는 마물이라며 무서워하더니, 뮈젤은 이제 디아나가 생각보다 더 무른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는지 뻔뻔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디아나는 결국 본전조차 찾지 못하고 입술을 닫았다. 그사이 매무새를 정돈한 뮈젤이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보다 일전에 명하셨던 일들에 관해 보고드려야 할 것 같군요.”

“……!”

그녀의 말에 디아나의 표정이 삽시간에 달라졌다. 뮈젤 또한 장난기를 접어 두고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먼저 첫 번째로 부탁하셨던 위장 신분, 완성되었습니다. 이름은 데인 옵스큐르. 서류상으로는 아를라스 왕국 출신의 떠돌이입니다.”

“아를라스 출신이면 과거 추적도 어렵겠네. 잘했어. 가면은?”

“여기요. ……그런데 설마 어딘가에 직접 나서시려는 겁니까?”

뮈젤이 미심쩍은 얼굴로 어깨에 메고 있던 작은 가방을 뒤져 디아나에게 가면을 건네주었다.

디아나는 뮈젤의 물음을 잠시 옆으로 밀어 두고 가면을 이리저리 살폈다.

뮈젤이 가져온 가면은 갈색 부엉이의 얼굴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듯 정교하고 단단했다.

디아나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늘이고는 가면을 쓴 채 고개를 돌렸다.

“어때?”

“솔직히 말씀드려도 됩니까?”

“아니, 됐어.”

“예.”

“그보다 직접 나설 일이 있냐고 물었지?”

디아나는 가면을 벗어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그녀가 손끝으로 가면을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그 질문에는 세 번째 명령에 대한 보고를 들은 뒤에 답해 줄게. 내가 말했던 사람은 찾았어?”

“찾았습니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답이었다.

디아나는 뮈젤의 빠르고 정확한 대답이 마음에 들어 작게 웃었다.

“그래?”

“네. 이름은 안타르. 불법 격투장 비타스의…… 투견이더군요.”

뮈젤은 말을 꺼내 놓으면서도 ‘정말 이런 사람을 찾으신 게 맞나?’ 싶어 반신반의하듯 디아나의 얼굴을 흘긋 살폈다.

하지만 디아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담담히 뮈젤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기묘한 분위기에 압도된 뮈젤이 다시금 시선을 거두어들이고 보고를 이어 갔다.

“원래는 빈민가에 머물던 자였는데, 최근에는 형편이 어려워졌는지 비타스에 정기적으로 출근하더군요. 아무래도 돌보는 아이들이 많아진 탓 같습니다.”

디아나는 가만히 눈을 내리깐 채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머릿속에 과거, 안타르를 처음 보았던 날의 기억이 펼쳐졌다.

[전하, 저자는……?]

[빗속에 쓰러져 있는 것이 가여워 데려왔단다. 따듯한 목욕물과 식사를 내주거라.]

레베카가 어느 날 데려왔던, 너덜너덜한 몰골로 간신히 숨을 내뱉던 청년.

그가 바로, 죽는 순간까지도 레베카의 방패가 되었던 대지 속성의 중급 정령사 안타르였다.

레베카는 절대로 쓸모없는 자에게 호의를 베풀지 않았다.

더 정확히는, 자신에게 쓸모 있을 만한 자를 무섭도록 잘 알아보았다.

하여 레베카는 뒷골목의 무뢰배들에게 얻어맞아 죽어 가던 안타르를 데려와 깨끗이 씻기고, 따듯한 끼니를 대접하고, 그의 동생들까지 좋은 집을 구해 돌봐 주었다.

무뢰배들과 대치하며 보였던 안타르의 재능을 탐냈기 때문이었다.

[유명한 투견이라더니, 확실히 타고났어. 제대로 가르치면 쓸 만하겠더구나.]

목적이야 어떠했건, 그 결과 안타르는 디아나만큼이나 맹목적인 레베카의 측근으로 자리 잡았다.

같은 대지 속성 중급 정령사들 중에서도, 그의 능력만큼은 ‘난공불락’이라고 불릴 만큼 대단했다.

그것이 바로 디아나가 안타르를 찾아내려 한 이유였다.

그의 능력은 다가오는 모의 전투에서 케이든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해 꼭 필요하니까.

“비타스의 경기일이 언제지?”

“대부분 격일에 한 번씩 진행되더군요.”

대답이 곧장 돌아왔다.

그에 디아나가 눈을 한번 깜박이고는 짧게 탄식했다.

“오늘이구나.”

“아무래도 가면을 보니 그곳에 걸음 하시려는 것 같아서 날짜를 맞춰 왔습니다.”

“역시 유능하네, 우리 부길드장께서는.”

디아나는 뮈젤의 눈치를 칭찬하며 설핏 웃었다.

몸을 일으킨 그녀가 뮈젤에게서 기다란 클로크를 건네받았다.

클로크를 두르던 디아나가 아, 하고는 몸을 돌려 물었다.

“그런데 초대 정령사들의 자료는 아직 못 찾은 거지?”

“그건 급하지 않다고 하시기에…….”

“아, 뭐라고 하려던 건 아니었어. 그냥 혹시나 해서.”

디아나는 뮈젤이 조금 시무룩한 기색을 내비치자 급히 덧붙였다.

과거의 실패로 인해 큰 기대는 없었기에 딱히 실망스럽거나 하지는 않았다.

단지 혹시나, 하는 희망을 놓지 못했을 뿐.

디아나는 그러한 속내를 털어 내듯 일부러 대수롭지 않게 답하며 가면을 쓰고 클로크를 걸쳤다.

디아나가 쓰러진 이후, 그녀가 늘 이때쯤 낮잠을 청한다는 사실이 알음알음 퍼져 있던지라 방 밖은 고요했다.

경비들이 케이든의 명령에 따라 디아나가 휴식을 취할 때는 1황자 부부마저 포함해 아무도 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더욱 안전했다.

‘그리고 케이든은 레밋 경 때문에 오늘 하루 훈련장을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

애초에 디아나는 이럴 생각으로 규칙적인 낮잠을 청하고, 케이든을 내보낸 것이었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

이윽고 디아나가 가면과 클로크로 온몸을 칭칭 둘러쌌을 때쯤. 뮈젤은 눈치껏 방문을 단단히 잠그고 돌아왔다.

“저는 여기에서 동태를 살필…….”

“뮈젤, 손.”

그때 디아나가 뮈젤의 말을 가로막으며 불쑥 손을 내밀었다.

뮈젤은 의아하게 눈을 깜박이면서도 반사적으로 그 손 위에 제 손을 올렸다.

“설마 저도 함께 가는 겁니까?”

“기왕이면 둘이 좋잖아.”

“그래도 누군가는 여기에 남아서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거라면 괜찮아.”

디아나는 말끝에 뮈젤의 등 뒤를 힐긋 일별했다.

그녀가 불러낸 힐라사들이 침대 아래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실 같은 팔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아무렴 뮈젤의 연락보다야 디아나의 영혼에 연결된 힐라사들의 신호가 더욱 빠르고 정확할 터였다.

하지만 그것을 모르는 뮈젤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낯이었다.

“하지만…….”

“잠깐만 눈 감아 봐. 너무 놀라진 말고.”

“예, 예? 대체 뭘……!”

뮈젤은 별안간 디아나가 제 눈을 가리자 당황했다가, 직후 허공으로 낙하하는 몸을 느끼고는 급하게 볼 안쪽을 씹어 비명을 삼켰다.

무프의 결계로 모습을 감춘 디아나가 뮈젤을 데리고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진 것이었다.

아까 전 뮈젤로 인해 놀랐던 일에 대한 소소한 복수였다.

* * *

‘……지친다.’

안타르는 오늘따라 유달리 무겁게 느껴지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비타스로 향했다.

갈색 더벅머리가 눈을 찌를 듯 이마를 덮고 있었고, 머리카락에 반쯤 가려진 두 눈은 멍했다.

낡은 옷에 가려진 그의 몸은 상처와 멍으로 얼룩덜룩했다.

‘그 거지 같은 놈.’

안타르는 문득 비타스 사장의 얼굴이 떠오르자 이를 뿌득 갈았다.

안타르가 정령과 계약하게 된 것은 이미 비타스의 투견이 되겠다는, 노예 계약서나 다름없는 마법 문서에 서명한 후였다.

하여 비타스의 사장은 안타르가 정령사로 발현하자 옳다구나 하고 그를 경기장으로 밀어 넣었다.

일반적인 투견이라면 한 번의 경기를 치른 후에는 부상 치료를 위해 약 일주일간 휴식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사장은 안타르를 며칠에 한 번씩 꼬박꼬박 경기에 내보냈다. ‘정령을 다룰 수 있는 투견’이 돈이 된다는 이유였다.

하여 안타르는 매번 미처 부상을 회복할 틈도 없이 경기에 나가고 있었다.

그러한 일들이 축적되자 몸 상태는 더더욱 나빠졌다.

[형……. 우리 오늘은 빵 먹을 수 있어?]

하지만 그는 그가 돌보는 아이들 때문에라도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노예처럼이라도 굴지 않으면 동생들을 먹여 살릴 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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