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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26/145)

26화

“잠깐만.”

케이든이 돌연 물 잔의 물을 입에 머금더니 고개를 숙였다.

디아나는 입술이 맞닿는 느낌에 흠칫 굳었다가 그 사이로 흘러들어 오는 물에 그의 의도를 깨닫고 가만히 그를 받아들였다.

맞닿은 입술은 뜨거웠으나 입 안으로 흘러드는 물은 차가웠다.

그 온도 차이 때문에 그의 입술에서 느껴지는 열기와 감촉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케이든이 손으로 턱을 고정해 준 덕에 디아나는 별 무리 없이 물 한 컵을 다 비울 수 있었다.

케이든은 디아나가 물을 모두 삼킬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녀의 등에 베개를 받쳐 주고 물러났다.

디아나는 조금 낯간지러운 기분이 되어 눈을 내리깔고 감사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한결 낫네요.”

“……어떻게 된 건지는 안 물어봐?”

그때, 형용하기 어려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케이든이 불쑥 물었다.

디아나는 그제야 자신이 독에 당해 쓰러진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침착한 태도를 보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뒤늦게 그에게 상황을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분명…….”

“타니아 해밀턴이 당신에게 준 차에서 독이 검출됐어. 그대는 이틀 만에 깨어난 거고.”

케이든은 디아나가 궁금해할 만한 것들을 담담히 알려 주었다.

디아나는 자신이 이틀이나 의식이 없었다는 그의 말에 당황했다.

‘기껏해야 반나절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녀의 몸은 생각보다 더 약한 편인 듯했다

보통 사람은 반나절을 앓을 것을 이틀이나 앓았다는 것을 보면.

한편, 케이든은 여전히 순하디순하게 눈망울을 깜박이는 디아나를 보며 씁쓸한 심정을 애써 갈무리했다.

‘화조차 내질 않는군.’

디아나는 시녀였던 타니아 해밀턴이 자신을 해치려 했다는데도 일말의 분노, 혹은 동요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어쩐지 속이 뒤틀렸다.

왜 이 여자는 누군가 자신을 홀대하고, 심지어 해치려고 하기까지 하는데도 자신을 방어할 줄을 모를까.

케이든의 눈에는 그것이 디아나가 서즈필드 자작 저에서 자라며 타인의 적의에 익숙해진 것처럼 보여 안쓰러웠다.

‘하긴,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것도 애초에 나 때문인가.’

케이든은 작게 자조하고는 설명을 이었다.

“타니아 해밀턴은…… 이미 극형을 받았고, 다른 두 시녀는 우선 구금 중이야. 하지만 정황상 그들은…….”

이용당한 것이겠지.

본인들도 모르게.

케이든은 그 말이 혹 디아나의 앞에서 시녀들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말을 아꼈다.

“그렇게 된 일이었군요.”

디아나는 케이든이 상당히 뭉뚱그려 설명한 이야기를 듣고도 곧장 정황을 파악해 냈다.

‘분명 직접적으로 독이라고 언급하지는 않고, 타니아가 셀라 꽃차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부추겼겠지.’

어차피 타니아를 오래 살려 두고 조사해 보았자 명확한 증거를 찾지는 못했을 것이다.

레베카는 고작 자신이 부리는 장기짝 따위에게 발목이 잡힐 만큼 허술하게 일을 처리하지 않으니까.

디아나는 생각을 이어 가려 했으나 사방이 어두운 데다가, 아직 다 회복하지 못한 몸이 휴식을 주장하는 통에 졸음이 밀려와 눈을 깜박였다.

케이든은 디아나의 눈꺼풀이 무거워진 것을 곧장 눈치채고 그녀를 제대로 눕혔다.

“더 자. 옆에 있을 테니까.”

목 아래까지 이불도 꼼꼼히 덮어 준 그가 이불 위를 일정한 박자로 토닥였다.

검은 눈에는 그녀를 향한 옅은 걱정과 자괴감이 깃들어 있었다.

정작 디아나는 케이든의 발작 사실조차 함구해주고 있는데.

그는 늘 그녀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렸다.

결국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막 잠에 빠져들려던 디아나는 케이든의 마력이 심상찮게 일렁이는 것을 느끼고는 흠칫 굳었다.

‘뭐지?’

반쯤 감겨 있던 눈이 저절로 반짝 뜨였다.

디아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케이든을 바라보았다.

그가 의아하게 그녀를 마주 보았다.

“디아나?”

그는 무구한 얼굴이었지만 그의 마력은 그렇지 못했다.

무엇 때문인지 또다시 날뛸 조짐을 보이는 마력을 감지하자마자 생각을 이을 틈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다.

“……!”

케이든은 돌연 팔을 뻗어 저를 바짝 끌어안는 디아나의 행동에 놀라 숨을 멈췄다.

잠시간 얼음 동상이라도 된 것처럼 굳어 있던 그가 한발 늦게 참았던 숨을 터트리며 당혹한 목소리를 냈다.

“디아나? 왜 그래?”

“그…….”

“뭐라고?”

디아나가 무어라 중얼거렸으나 목소리가 워낙 작았던 탓에 잘 들리지 않았다.

‘……핑계가 생각이 안 나.’

한편, 디아나는 케이든의 품에 얼굴을 숨긴 채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하지만 보는 눈도 없는데, 갑자기 케이든을 껴안은 것에 대한 핑계가 마땅히 생각나지 않았다.

‘마력 발작의 조짐이 느껴져서, 라고 할 수도 없고…… 어떻게 하지?’

애초부터 손만 잡았어도 될 일었는데, 다급한 마음에 그만…….

그녀는 끝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진부한 이유를 대기로 마음먹고 입술을 뗐다.

“……서.”

“뭐?”

“조금 추워서 그런데…… 이렇게 껴안고 자면…… 안 될까요?”

디아나는 머뭇머뭇 말을 이으며 힐끔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가 수치스러움에 재빨리 시선을 도로 내렸다.

그것을 고스란히 눈에 담은 케이든은 잠시 멍하니 연분홍빛 정수리를 바라보다가, 곧 픽 웃음을 흘렸다.

‘정말 신기하다니까.’

디아나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케이든 본인보다 먼저 그의 불안을 알아채고 위로하려는 듯한 행동을 보였다.

그것이 얼마나 애틋하고, 고맙고, 또 사랑스럽게 느껴지는지 이 사람은 알고 있을까.

케이든은 그런 속내를 감추기 위해, 일부러 그녀를 힘 있게 마주 끌어안고 장난을 쳤다.

“나와 닿고 싶었던 거면 얘기를 하지 그러셨습니까, 비. 그랬다면 이렇게 핑계를 대지 않아도 기꺼이 응해 드렸을 텐데.”

“……그런 거 아니에요.”

“물론 그렇겠지.”

“정말 아니라니까요.”

“그래, 그래. 아닐 거라고 믿어.”

말은 그렇게 하지만 디아나의 말을 티끌만큼도 믿지 않는 기색이 역력한 음성이었다.

케이든은 조금 전의 수심을 모두 잊은 채 웃음기 어린 얼굴로 디아나의 등을 도닥였다.

“알겠으니 이만 자자. 아침까지 이렇게 끌어안고 있을게.”

“……다시 말하지만 추워서 그러는 것뿐이에요.”

“그러면 나도 추워서 이렇게 잠드는 걸로 할게.”

케이든은 빙글빙글 웃으며 대꾸했다.

그 능글맞은 태도에 품 안의 디아나가 작게 입술을 삐죽이자 케이든의 입에서는 또다시 바람 빠진 듯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나저나…….’

케이든은 디아나와 닿자마자 또다시 나른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편안한 감각을 느끼고는 묘한 얼굴을 했다.

아마 이 감각에는 죽을 때까지 익숙해질 수 없지 않을까.

케이든은 문득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깜박였다.

우습게도 그의 눈꺼풀은 어느새 조금 전의 디아나만큼이나 무거워져 있었다.

그는 그 사실에 가볍게 실소하며 디아나가 조금 더 편하게 누울 수 있도록 자세를 고쳤다.

“재워 주려 했는데, 어쩐지 나한테까지 졸음이 옮는 기분이군.”

“저는 동화책과 따듯한 우유가 필요한 다섯 살 아이가 아니니까요. 전하께서도 어서 주무세요.”

“그렇, 지만…….”

케이든과 달리 외려 조금 전보다는 머리가 맑아진 디아나가 그를 올려다보며 작게 웃었다.

케이든은 무어라 말하려다가 밀려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스르륵 눈을 감았다.

디아나는 그의 숨소리가 고르게 변함에 따라 잠잠해지는 마력을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발작이 일어나는 조건이라도 알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무래도 어렵겠지?’

케이든의 몸 상태에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잠시 옆으로 밀어 두었던 수마가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졌다.

디아나는 케이든을 끌어안은 팔을 거두어들이고 잠을 청하려 했으나 그는 그녀가 제 품을 벗어나려 하자 잠결에 팔에 힘을 더 세게 주었다.

‘……저번에도 이랬던 것 같은데. 습관인가?’

결국 디아나는 꼼짝없이 케이든의 품에 갇힌 채 잠을 청해야 했다.

얼굴에 닿는 몸이 심히 탄탄했던지라 자꾸만 이상한 생각이 들려 했다.

‘변태는 나였나…….’

코앞의 온기와 심장 박동이 영 어색해 한동안 바르작거리던 디아나는 이윽고 몽롱한 기분으로 눈을 감았다.

그녀는 누군가 제 옆에 있다는 것이 이렇게 따스한 일이었던가, 하는 생각을 끝으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디아나가 회복하는 동안 케이든은 부담스러울 만큼 살뜰하게 그녀를 챙겼다.

싫은 건 아니었지만, 지금은 모의 전투를 코앞에 두고 있는 상황인 만큼 훈련에 매진해야 할 때였다.

디아나는 온종일 제 곁에 붙어 있으려 드는 케이든을 단호히 훈련장으로 쫓아냈다.

“간호도 이 정도 해 주셨으면 충분해요.”

“그래도…….”

“뒤에서 레밋 경이 눈으로 욕하고 있는 거 안 보이세요? 얼른 가세요.”

“저, 전하! 저는 맹세코 그런 적이! 커헉!”

케이든의 뒤통수를 씹어 먹을 듯 노려보던 파트라슈가 다급히 고개를 내젓다가 상관의 격한 포옹–을 빙자한 응징―에 장렬히 흐느꼈다.

그렇게 파트라슈와 한바탕 전우애를 나누던 케이든이 떠나고, 간신히 홀로 남은 디아나는 방문을 닫고 창문 앞에 앉았다.

‘하여간 다들 과보호야…….’

어제는 플뢰르와 엘리엇마저 찾아와 한바탕 눈물을 쏟아 내고 갔다.

저를 지나치게 걱정한 나머지, 울다가 탈진할 뻔한 플뢰르의 모습을 상기한 디아나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디아나는 창문 아래 놓인 카우치에 기대앉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반투명한 흰색 커튼과 함께 연분홍색 머리카락이 창문으로 흘러들어 온 바람에 살랑거렸다.

‘그나저나 뮈젤은 언제쯤 오려나.’

청보랏빛 눈이 문 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그녀가 뮈젤에게 세 가지 명령을 내린 후 약 2주 정도가 흘렀다.

‘슬슬 올 때가 된 것 같은데.’

디아나는 그렇게 하면 뮈젤이 나타나기라도 할 것처럼 굳게 닫힌 문을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수장님.”

“으악.”

예상외로 뮈젤의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창문 바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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