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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25/145)

25화

3황자비가 시녀에게 독살당할 뻔해 쓰러졌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황궁 전체로 퍼져 나갔다.

케이든이 소식을 듣자마자 훈련을 내팽개치고 3황자 궁으로 돌아왔을 때는 기사들에게 무릎 꿇린 타니아가 울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저는 억울합니다!”

3황자 궁 앞에서 억울하다고 몸부림치던 타니아는 케이든을 발견하고 흠칫 숨을 멈췄다.

그녀의 눈은 그에 대한 공포로 짙게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케이든은 그런 타니아를 곁눈질조차 하지 않은 채 곧장 궁 안으로 들어갔다.

“디아나는?”

“아직 의식은 없으십니다만, 내상을 입히는 종류의 독보다는 마비 독에 가깝습니다. 다행히 심장과 폐까지 영향이 미치진 않아서, 크게 위험한 정도는 아닌…….”

황궁의는 케이든을 안심시키고자 말을 잇다가, 그의 표정에서 서늘함을 읽어 내고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케이든은 그대로 디아나가 누워 있는 방까지 직행했다.

바쁘게 움직이던 사용인들이 당황해 고개를 숙이건 말건, 창백한 얼굴의 그가 눈을 감고 있는 디아나의 볼을 조심스레 감쌌다.

“……디아나.”

그는 꽉 막힌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손끝에 닿은 체온이 평소와 달리 차게 식어 있던 터라, 케이든은 고개를 기울여 그녀가 호흡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참았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또다시 물밀 듯 밀려오는 자괴감에 그가 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나 때문이다.’

1황비가 보낸 시녀들을 돌려보내지 못한 것도.

그 시녀가 끝내 디아나를 해치려 드는 것을 막지 못한 것도.

전부 다, 힘없는 자신의 탓이었다.

정작 디아나는 그의 발작 사실마저 모른 척하며 그를 위해 애쓰고 있는데.

‘나는 대체…….’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던 그가 이내 낮게 가라앉은 음성을 냈다.

“……시녀들은.”

“궁 앞에 포박해 두었더군요. 아까 들어오실 때 보셨겠지만…….”

파트라슈는 제 주인이 지금 정말 정신이 없긴 하구나, 생각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케이든은 잠시간 핏기 없이 희게 질린 디아나의 얼굴을 눈에 담다가 몸을 돌렸다.

방을 나선 그가 주위 사람들마저 숨 막히게 할 정도의 분노를 내비치며 시녀들이 포박되어 있는 장소로 향했다.

하지만 막 궁을 빠져나온 순간.

케이든은 관성처럼 우뚝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왔니.”

고개를 푹 숙인 타니아의 앞에 서 있던 레베카가 부채를 팔랑이며 싱긋 웃었다.

타니아는 사색이 된 채 그녀의 발치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케이든은 스멀스멀 밀려오는 불길함을 애써 밀어내고는 걸음을 떼었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누님.”

“내 어머니께서 보내신 시녀가 문제를 일으켰다기에 와 보았지. 3황자비는 좀 어떠니?”

레베카는 짐짓 걱정스러운 얼굴로 디아나의 상태를 물었다.

그 가증스러움에 헛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1황비의 모든 행동이 레베카의 행동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는데.

“……곧 깨어날 것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모두가 진실을 알고 있음에도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힘.

그것이 바로 권력이었다.

케이든은 이 순간, 처음으로 온 마음을 다해 권력을 갈망하게 되었다.

레베카처럼 그것을 누군가에게 휘두르기 위해서가 아닌, 제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이전까지는 단지 레베카의 폭정에서부터 저와 제 사람들을 보호하고픈 마음뿐이었다면.

지금은 폭정을 휘두르는 상대에게 맞서야겠다는, 진하고도 선명한 반감이 피어올랐다.

단순한 생존이 아닌 투쟁.

그것을 결심한 케이든의 눈이 전보다 한층 날카롭게 빛났다.

한편, 레베카는 케이든의 답에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눈썹을 누그러트렸다.

“다행이로구나. 하지만 부모의 실수는 곧 자식의 실수가 아니겠니. 이 아이가 황족을 시해하려 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니…….”

말을 마친 레베카가 부채를 탁 소리 나게 접었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부채 끝으로 타니아의 턱을 들어 올렸다.

“말해 보아라, 타니아 해밀턴.”

“…….”

“어째서 3황자비를 해친 것이냐.”

“저는……!”

내내 죽은 듯 조용하던 타니아가 울컥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더없이 싸늘한 연푸른 눈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그녀는 두려움으로 덜컥 숨이 막히는 기분에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입 안에서 맴도는 말은 많았지만, 그중 어느 하나라도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타니아는 뭍에 던져진 물고기처럼 소리 없이 입술을 벙긋거렸다.

‘전하, 제발…… 이건 다 누명입니다.’

듣기로는 디아나의 찻잔에서 독이 검출되었다는데, 하늘에 맹세코 자신은 모르는 일이었다.

타니아는 제 억울함을 알아 달라는 듯 레베카를 올려다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지금은 남들의 시선이 있으니 이렇게 차갑게 구는 거겠지만.

레베카가 누구보다 성실히 일한 자신을 이깟 누명 한 번으로 내치지는 않을 것이다.

이토록 귀한 귀걸이까지 내주셨으니, 설마 그러시지는 않을 것이다…….

타니아는 그런 생각을 주문처럼 속으로 되뇌며 미련 그득한 눈길로 레베카를 올려다보았다.

레베카는 말없이 눈물만 그렁그렁한 타니아를 보며 부드러이 웃었다.

“더 할 말은 없나 보군.”

직후, 타니아의 발밑에서 피어오른 흰 불꽃이 그녀를 한입에 삼켰다.

상급 불 속성 정령의 능력.

미처 말릴 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누님!”

케이든이 대번에 경악하며 레베카의 팔을 붙들었다.

하지만 레베카는 케이든의 손을 뿌리치며 서느런 목소리를 냈다.

“이유를 불문하고 황족 시해는 시도만으로도 즉결 처분감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겠지.”

“하지만!”

레베카의 말은 사실이었기에 케이든은 목소리를 높이다가 말고 이를 악물었다.

그사이 타니아는 레베카의 등 뒤에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새하얀 재가 되었다.

타니아를 집어삼킨 불꽃이 서서히 사그라졌다. 불꽃이 사라진 자리에는 새하얀 재가 소복이 쌓여 있었다.

그것이 마치 무덤처럼 보인 탓에, 타니아의 곁에 함께 무릎 꿇고 있던 두 시녀가 창백한 얼굴로 흐느꼈다.

레베카는 타니아를 죽이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주변에 있던 근위대에게 명했다.

“다른 시녀들에게도 동료의 흉계를 막지 못한 책임이 있다. 태형 10대를 집행한 후 수도원에 평생 연금하도록.”

“존명.”

“이들을 처벌할 권리는 누님이 아니라 3황자비에게 있습니다. 당장 멈추십시오.”

케이든은 레베카의 명을 따르려는 기사들을 막아서며 낮게 으르렁댔다.

그에 레베카가 조금 놀란 듯 멈칫했다.

그녀는 잠시 생소한 눈으로 케이든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3황자비를 많이 아끼나 보구나.”

“…….”

“전에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제대로 대꾸조차 못 하더니.”

레베카가 희미하게 조소했다.

케이든은 손마디가 희게 질릴 정도로 세게 주먹을 그러쥔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버텼다.

그러자 레베카가 어깨를 한번 으쓱이고는 한발 물러나며 긍정했다.

“그래, 네 말이 옳다. 아무리 내 어머니께서 보낸 시녀들이라고 한들, 우선 처벌권은 이번 일의 피해자인 3황자비에게 있는 것이겠지. 다른 시녀들의 처분은 3황자비에게 맡기마.”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시녀들을 처벌할 권리가 있는 것은 그 주인, 혹은 황제와 황후뿐이었다.

하지만 레베카는 월권을 행사한 것도 모자라 너무도 당연하게 그 당연한 권리를 ‘베풀었다’.

그것이 지금 레베카와 그들의 위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냈다.

“그래도 너무 섭섭하게 굴진 말렴.”

“…….”

“거슬리는구나.”

레베카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뒷말을 속삭이고는 케이든을 스쳐 지나갔다.

케이든은 레베카의 기척이 멀어지다가 종내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 움직이지 못했다.

* * *

디아나가 다시 눈을 뜬 것은 늦은 밤이었다.

가느다란 촛불만이 어두운 방 안을 희미하게 밝히고 있었다.

그녀는 잘 움직이지 않는 눈꺼풀을 깜박이며 생각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셀라 꽃차를 들이켠 직후, 목구멍을 타고 흐른 차가 몸 내부부터 굳게 하는 듯한 감각을 끝으로 의식을 잃었던 건 기억나는데.

몸을 일으켜 보려 했으나 움직일 수 있는 건 목 위쪽이 한계인 듯했다.

디아나는 이후로도 미간을 찌푸린 채 몇 번 더 손과 몸을 움직이려 애쓰다가 포기했다.

‘분명 가벼운 마비 증세라고 하지 않았나.’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움직이다가 화들짝 놀랐다.

머리맡에 새까만 인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케이든?”

디아나는 아직도 움직임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혀를 움직여 간신히 말을 뱉었다.

목소리는 가뭄 든 땅처럼 버석했다.

다소 가라앉은 얼굴의 케이든은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협탁에 놓여 있던 물컵을 집어 들었다.

그가 침대에 걸터앉더니 한쪽 팔로 디아나의 상체를 조심스럽게 안아 일으켜 주었다.

“손은.”

케이든이 짧게 입술을 달싹였다.

디아나는 그의 목소리 또한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은 것처럼 가라앉아 있다는 데 놀랐다.

“움직일 수 있겠어?”

“음……. 목 아래로는 몸이 좀 무거워서.”

디아나는 케이든의 물음에 멋쩍게 답했다.

그러자 케이든이 그녀를 추슬러 안고 입가에 물컵을 가져다 대 주었다.

하지만 디아나는 물을 몇 모금 넘기다가 말고 작게 콜록거렸다.

목 안쪽에 여전히 잔떨림이 이는 것을 보니 아직 마비 기운이 다 가시지 않은 듯했다.

그녀가 난감하게 물 잔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잠깐만.”

케이든이 돌연 물 잔의 물을 입에 머금더니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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