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오늘도 딱히 할 말은 없단 소리구나.”
타니아는 그 우아한 목소리에 도리어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녀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지껄이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젠장…….’
처음으로 레베카에게 보고를 올리고 사파이어 귀걸이를 하사받았던 날 이후.
타니아는 어떻게 해서든 디아나의 유의미한 약점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디아나는 분명 가소로우리만치 유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타니아가 그 점을 노려 뭔가를 캐내려 하면 상냥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말을 돌려 버렸다.
더없이 순진한 얼굴 탓에 그것이 의도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으나.
중요한 것은 타니아가 실적을 올리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이제는 보상을 받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이대로 쓸모를 입증하지 못해 레베카에게 버림받으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초조함을 다스리기가 어려웠다.
레베카는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채 손끝으로 제 입술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저렇게나 필사적으로 약점을 캐려 했는데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면, 특별히 위험한 건 없다는 뜻이겠지.’
타니아는 멍청했지만, 그 끈기만큼은 알아주어야 했다.
그런 타니아가 2주 동안 바로 옆에서 감시했는데도 이상함을 감지하지 못했다면 디아나 서즈필드는 무고할 가능성이 컸다.
‘……슬슬 잘라 낼 때가 됐나.’
레베카는 허리를 굽히고 있는 타니아의 정수리를 보며 냉랭히 눈을 빛냈다.
하지만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천사 같은 미소를 그려 낸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타니아가 사라진 후에도 디아나 서즈필드를 감시할 만한 이는 황궁에 널리고 널렸다.
그러니 쓸모가 사라진 도구는 이만 폐기해야겠지.
그리 생각하며 타니아의 앞에 선 레베카가 그녀의 어깨를 다정히 쓸며 속삭였다.
“걱정하지 말렴. 너를 나무랄 생각은 없단다.”
“……!”
타니아가 뜻밖의 자비로운 말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레베카는 그녀의 얼굴이 몽롱하게 풀어지는 것을 눈에 담으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3황자비도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에게 마음을 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겠지. 3황자비가 단것을 좋아한다고 했던가?”
“네, 네…….”
“그럼 그에 어울리는 귀한 차라도 같이 내어 가 보면 어떻겠니?”
“……아! 마침 적당한 것이 있어요!”
그 제안에 타니아가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환히 웃었다.
레베카는 저렇듯 머릿속이 훤히 읽히기도 쉽지 않은 일인데, 라고 생각하며 자상하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주인이 기르는 동물에게 하는 것과 꼭 닮은 행동이었다.
* * *
이른 아침.
사용인들이 들이닥치기 전의 짧은 틈을 타서, 디아나는 마력을 움직여 제가 다루는 정령들을 불러냈다.
그녀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제 앞에 나란히 늘어선 정령들을 차례로 불렀다.
“힐라사.”
삐익!
“무프.”
냐앙.
“유로.”
<대체 언제까지 이 쓸데없는 짓을 반복하려 그러는 건지, 원.>
디아나의 엄중한 부름에 어둠의 하급, 중급, 상급 정령들이 차례로 답했다.
물론 검은 늑대의 형상을 한 유로의 대답은 상당히 불손했지만, 아무튼.
디아나는 위압적으로 보이기 위해 턱을 약간 치켜들고 말문을 뗐다.
“좋아. 오늘이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의 마지막 기회야. 너희 정말 변종 마물이랑 아무런 관련도 없어?”
<우리야말로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의 마지막 대답이라고 몇 번을 말했어. 아는 게 없다니까.>
유로는 슬슬 이 추궁이 질리는지 작게 으르렁댔다.
힐라사와 무프는 유로처럼 인간의 말로 생각을 전달할 수는 없었지만, 그와 같은 생각이라는 듯 따분한 얼굴로 꼬리를 팡팡 내리치거나 바닥에 늘어졌다.
디아나는 잠시간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 정령들을 끈질기게 노려보았으나, 이내 눈에 힘을 풀며 한숨을 푹 쉬었다.
‘하긴, 이렇게 물어봐야 저 애들도 답할 수 있는 건 없겠지…….’
변종 마물을 처리할 때 느꼈던 어둠 속성 정령의 기운.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지라, 디아나는 궁으로 돌아온 직후 몰래 정령들을 불러 이에 관해 물었었다.
하지만 디아나의 정령은 모두 태어난 지 백 년이 채 되지 않은 어린 개체들이었다.
게다가 저들은 디아나를 통해서야만 비로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으니, 변종 마물과 무언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은 턱없이 낮았다.
‘그냥 불길한 느낌을 착각한 건가?’
며칠 간격으로 정령들을 불러내 괴롭히던 디아나는 마침내 미련을 접었다.
그녀가 한숨을 쉬며 정령들을 돌려보내자마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비 전하. 타니아 해밀턴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들어와.”
디아나는 선선히 입술을 움직였다. 허락의 말을 들은 시녀 무리가 방으로 들어왔다.
이후는 평소와 별다르지 않았다.
시녀들은 목욕 시중을 들며 어떻게든 말을 붙이려 애썼고, 디아나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그들의 물음을 피해 갔다.
그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공방 끝에 목욕을 마쳤을 때였다.
욕실 밖으로 나와 디아나의 머리를 말려 주던 타니아가 슬그머니 운을 뗐다.
“저어, 비 전하. 제가 최근에 서방에서 건강에 좋기로 유명하다는 차를 구했는데, 괜찮으시다면 한 잔 올릴까요?”
디아나는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건강’이라는 단어에 고개를 기울였다.
“건강?”
“네. 아무래도 체력에 신경 쓰셔야 할 때이실 테니까…….”
타니아가 말꼬리를 흐리며 볼을 슬쩍 붉혔다.
그녀가 말하는 ‘건강’이 부부 사이를 위한 것임을 깨달은 디아나가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레베카의 수족인 시녀들 앞에서 어색한 티를 낼 수는 없었기에 부끄러운 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경 써 줘서 고마워.”
“뭘요. 시녀로서 전하를 보필하는 건 당연한 일이죠.”
타니아는 언뜻 진심이라고 느껴질 만큼 따스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디아나의 치장이 끝난 후, 응접실에 손수 준비한 찻잎과 다기들을 들고 왔다.
타니아는 테이블 위에 쟁반을 내려놓으며 자랑스러운 태도로 설명했다.
“셀라 꽃차랍니다. 어렵게 구해 온 것이지요.”
“세상에, 이렇게 귀한 것을!”
“저도 이야기만 들었지,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네요.”
타니아의 자랑에, 나머지 시녀 둘이 호들갑을 떨며 그녀를 치켜세워 주었다.
그러나 디아나는 낯익은 생김새의 찻잎을 보고는 티 나지 않게 눈썹을 움찔했다.
‘셀라 꽃차라고?’
그녀가 이 차를 기억하는 이유는, 이것이 레베카가 즐겨 쓰던 경고의 의미이기 때문이었다.
[순수하게 차만 마신다면 위험할 일이 없어. 다만 설탕을 일정량 이상 넣으면 가벼운 마비 증세를 일으키게 된단다.]
회귀 전. 디아나는 구하기 힘든 차라는 말에 호기심 어린 눈으로 셀라 꽃차를 구경했고, 레베카가 그런 그녀를 보고는 웃으며 설명했던 기억이 났다.
디아나는 유독 단 음식을 좋아하니 조심하라는 당부도 함께였다.
‘오늘이구나.’
그래서 직감처럼 알 수 있었다.
오늘이 바로 레베카가 타니아 무리를 거두어들이기로 한 날이라는 걸.
디아나는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태연한 모습을 유지했다.
그사이, 타니아가 어느 정도 익숙해진 몸짓으로 차를 우려낸 후 디아나의 찻잔에 설탕을 탔다.
연갈색의 찻물에 흰 설탕이 스르륵 녹아들었다.
“원래는 설탕을 넣지 않고 마셔야 진정한 풍미를 느낄 수 있다고들 하던데, 비 전하께서는 단것을 좋아하시니까요. 이 정도면 괜찮을까요?”
“……그래.”
디아나는 선선히 답하며 찻잔 손잡이를 쥐었다.
어차피 이 차는 얼마간 가벼운 마비 증세를 일으킬 뿐이다.
목숨을 잃게 하려는 용도가 아닐뿐더러, 현재 제국에서 이 차의 제대로 된 효능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레베카와 그 측근뿐이었다.
괜히 망설이는 티를 냈다가 그 사실이 레베카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디아나는 조심스럽게 찻잔을 들어 올려 차를 몇 모금 넘겼다.
마비 증세를 일으키는 차라고는 생각할 수 없이 향긋한 차 내음이 코끝으로 흘러들었다.
타니아가 기대감이 잔뜩 어린 눈으로 그녀를 보며 물었다.
“어떠세요?”
“딱 좋아.”
“그렇죠! 이제 비 전하의 입맛 정도는 눈 감고도…….”
타니아는 자신이 이렇게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알아 달라는 듯 재잘재잘 떠들었다.
챙―
하지만 그 직후, 디아나가 쥐고 있던 찻잔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어?”
타니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녀가 입술을 달싹이는 것과 동시에, 얼굴을 찌푸린 채 목을 움켜쥔 디아나가 옆으로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