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아직도 떠올리는 것만으로 숨이 막히는 기억이었던지라 디아나는 눈을 질끈 감고 숨을 골랐다.
이윽고 간신히 기억을 밀어 넣은 디아나가 그린 듯한 웃음을 자아냈다.
“그럼요. 편하게 이름으로 불러 주세요, 전하.”
“그럼 디아나도 편히 불러 줘요. 내 이름은 플뢰르예요.”
“……네, 플뢰르.”
디아나가 목멘 소리로 작게 답하자 엘리엇이 화색을 띠었다.
“잘 생각했어요. 황궁의도 건강을 위해서는 활동량을 늘리라고 했으니까, 이참에 나들이도 자주 다니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책만 읽지 말고 산책 좀 하는 게 어때요? 황궁의도 내가 당신보다 더 건강한 것 같다고 했잖아요.”
“윽, 플뢰르…….”
플뢰르의 지적에 엘리엇이 민망한 듯 얼굴을 붉혔다. 그러자 다들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디아나는 그 단란한 풍경의 한 부분이 되어 그들을 지켜보며 속으로 다짐했다.
‘같은 일을 반복하지는 않을 거야.’
이번에는 그 누구도 자신의 손에, 레베카의 손에 희생시키지 않겠다고.
* * *
근시일 중에 시녀 둘을 뽑아서 보내 주겠다는 황후의 말을 끝으로, 디아나와 케이든은 3황자 궁에 돌아왔다.
간밤 내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암살자들의 흔적을 치운 파트라슈가 퀭한 얼굴로 그들을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하룻밤 새에 레밋 경께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죠?”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디아나가 경악하자 케이든은 모른 척했다.
파트라슈는 불면의 원인인 제 주인을 형형하게 노려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샐티스 후작께서 와 계십니다. 곧 있을 모의 전투 전술 관련해서 논의할 게 있다고 하시더군요. 그 후로는 기사단 훈련이고요.”
줄줄이 읊어지는 일정에 케이든이 한숨을 삼켰다. 그가 디아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대와 궁이라도 한 바퀴 돌아보려 했는데, 그건 아무래도 조금 미뤄야겠네. 쉬고 있어.”
“다녀오세요, 전하. 기다리고 있을게요.”
케이든이 찰나 멈칫했다.
‘……기다리겠다는 말이 이렇게 기분 좋게 들렸던가.’
디아나를 만난 후로는 온통 생경한 일들뿐인 것 같았다. 마치 그녀로 인해서 세상을 새로이 배워 가는 것처럼.
이내 상념을 갈무리한 그가 픽 웃음을 흘리고는 디아나의 머리를 가볍게 도닥였다.
“빨리 올게.”
그 말을 끝으로 케이든은 파트라슈와 함께 멀어졌다.
디아나는 잠시간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 있다가 궁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이 전하께서 머무실 방입니다.”
3황자 궁의 하녀장이 디아나를 안내했다.
궁의 재정 형편이 좋지는 않은지라 아주 넓은 방은 아니었지만, 아늑하고 정갈한 곳이었다.
“두 분께서 함께 쓰실 침실은 따로 있는데, 그곳도 보러 가시겠어요?”
“아니, 어차피 곧 보게 될 텐데 뭐 하…….”
방을 둘러보다가 무의식중에 대답하던 디아나가 멈칫했다.
하지만 이미 입 밖으로 흘러나간 말은 되돌릴 수 없었다.
하녀장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달아오른 볼을 손으로 감췄다.
“어머, 어머. 알겠습니다. 하긴 신혼이신데…….”
‘이놈의 입.’
디아나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여기서 그런 뜻이 아니었네, 어쩌네 하며 해명한다 한들 곧이곧대로 들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 이러면 케이든과의 사이를 의심하는 일도 줄어들겠지…….’
디아나는 초연해지기로 했다.
그녀가 방을 다 둘러보고 거실의 소파에 자리를 잡자 하녀장이 본론을 꺼내었다.
“아무래도 정식 시녀 선발 전까지는 저희가 시중을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다소 불편하시겠지만…….”
“아, 그 부분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황후께서 곧 믿을 만한 사람들을 보내 준다고 하셨거든.”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짧은 기간일지라도 잘 부탁해.”
하녀장은 사용인에게도 무례하지 않은 디아나가 썩 마음에 든 눈치였다.
그렇게 두 사람이 훈훈하게 인사를 주고받고, 간단한 다과를 들 장소를 정하던 차였다.
돌연 노크 소리가 나더니 난처한 기색의 목소리가 들렸다.
“3황자비 전하.”
“……? 들어와.”
디아나는 어쩐지 바깥이 소란한 것 같다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했다.
허락의 말이 떨어지자 방으로 들어온 3황자 궁의 하녀가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저, 지금 밖에 1황비 전하께서 보내신 시녀들께서 계십니다만.”
“……1황비 전하께서?”
“예. 분명 서신에 그리 적혀 있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분명 비 전하의 시녀분은 황후 폐하께서 보내 주신다고…….”
하녀장이 당황해 되물었다.
하지만 하녀 또한 3황자의 정적인 1황비가 손수 시녀를 골라 보냈다 하니 영문을 모르는 눈치였다.
디아나는 그들의 말을 듣고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선수를 치겠다는 건가.’
그녀는 손가락 끝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황후궁에 눈과 귀를 심어 둔 것인지, 아니면 디아나가 3황자비가 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준비해 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난감하게 되었다.
‘거절해 봤자 들을 리가 없겠지.’
황후가 먼저 시녀를 보내 주기로 약속했다며 저들을 돌려보낸다 한들, 1황비 측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괜히 황후가 보내 준 시녀들의 목숨만 잃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디아나는 대외적으로 서즈필드 자작에게 순종하는 성격으로 알려져 있으니.
케이든에게 달리 위협이 되는 것도 아닌 일을 거절했다가는 되레 의심을 살 수도 있는 노릇.
‘우선은 두고 봐야 하나.’
디아나는 속으로 가볍게 한숨을 삼켰다.
되도록 없는 사람처럼 조용히 머물다 사라지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저쪽에서 그녀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 같았다.
눈치를 보던 하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선 응접실로 모시긴 했는데, 어찌할까요?”
“……만나러 가야겠지. 안내해 주렴.”
“네, 비 전하.”
디아나는 하녀장, 하녀와 함께 응접실로 향했다.
그녀가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있던, 딱 보아도 귀한 티가 나는 세 명의 영애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3황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빛의 영광이 가득하길.”
“빛의 가호가 있길. 다들 일어나게.”
디아나의 말에 세 사람이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제 앞에 선 이들이 몸을 펴는 순간 훑듯이 자신을 살폈다는 걸 눈치챘으나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감시 역이라는 건가.’
세 영애 중 가장 앞에 서 있던 여인이 손에 들고 있던 1황비의 서신을 내밀었다.
“타니아 해밀턴입니다. 1황비 전하께서 보내셨습니다.”
디아나는 여인의 손에서 서신을 받아 펼쳤다.
예상과 별다르지 않게, 이는 겹사돈이나 다름없는 사이에 베푸는 작은 친절일 뿐이니 사양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디아나는 짐짓 기쁜 모습으로 발랄하게 서신을 접었다.
“1황비 전하께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하다고 따로 서신을 드려야겠군. 앞으로 잘 부탁하네.”
“영광입니다, 비 전하.”
세 사람이 일제히 고저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디아나는 곱게 접은 서신을 하녀장의 손에 넘겨준 후 빙긋이 웃었다.
“정원에서 간단한 티타임을 가질 예정이었으니 밖으로 나가지. 그대들도 함께.”
* * *
디아나는 세 사람의 태도가 어떨까 가늠하기 위해 그들에게 차 시중을 들게 했다.
본래라면 황자비의 시녀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1황비가 보낸 감시 역들답다고 해야 할까.
그들은 선을 넘지 않는 선에서 교묘하게 무례했다.
“봄이라지만 아직 바람이 찹니다, 전하. 티타임은 이만하시고 안으로 들어가시는 것이 어떨까요?”
타니아가 자못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말하자 다른 두 영애가 열렬히 동조했다.
하지만 디아나는 그것이 자신을 위한 말이 아님을 알았다.
‘귀찮아하는구나.’
거기에 디아나 본인이 결혼 전 가문에서 내놓은 사생아였다는 점까지 따지면 자존심도 꽤 상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런 속마음을 드러낼 수는 없을 테니, 디아나 본인의 건강을 걱정하는 척하는 것처럼 구는 것일 테고.
‘어차피 잘됐네.’
여기서는 저들의 의도를 읽지 못한 척 굴어야 안전할 것이다.
디아나는 순진무구한 웃음을 띠며 말했다.
“다들 추운가 보군. 나는 조금 더 있다가 갈 테니 먼저 들어가 보아도 좋네.”
“어찌 그런…….”
“정말 괜찮대도.”
디아나는 거듭 그들에게 안으로 들어가 몸을 녹일 것을 권했다.
세 사람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이내 면구한 얼굴로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까지 말씀해 주시니, 저희는 따를 수밖에 없군요.”
“감사합니다, 비 전하. 필요하신 일이 있다면 언제든 불러 주세요.”
“그럼 저희는 이만.”
그들은 인사를 남기고 먼저 3황자 궁으로 돌아갔다.
디아나는 이참에 야외 티타임을 준비하느라 고생한 사용인들도 쉬게 할 겸 그들을 보며 말했다.
“그대들도 궁에 들어가 있어. 필요한 것이 있으면 종을 울릴 테니까.”
“전하…….”
“날이 좋아서 이대로 들어가기는 아쉬울 것 같아 그래.”
사용인들은 결국 안절부절못하면서도 그녀의 명을 거부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디아나가 간신히 무수한 시선에서 벗어나 깊게 숨을 들이쉬던 차였다.
그녀는 아직도 제 곁을 벗어나지 않은 하녀를 발견하고는 의아하게 물었다.
“……왜 아직도 거기 서 있는 거지? 들어가라는 말을 듣지 못했나?”
그녀는 아까 시녀들의 방문을 알렸던 하녀였다.
그때까지도 그 자리에 서 있는 하녀를 보며 디아나가 경계심에 미간을 좁혔다.
그러나 직후, 하녀가 고개를 살짝 들더니 작게 속삭였다.
“수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