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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18/145)

18화

디아나는 온몸을 짓누르는 묵직한 감각에 잠에서 깨어났다.

“헉.”

그녀는 물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사람처럼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눈을 반짝 떴다.

‘무거워…….’

디아나는 끙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였다.

그러자 그녀를 짓누르듯 끌어안은 채 잠에 빠져 있는 케이든의 얼굴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흡.’

디아나는 금방이라도 입술이 맞닿을 듯 아슬아슬한 거리에 숨을 멈췄다.

잠에 빠진 케이든의 얼굴은 마냥 평화로웠다.

흰 도화지에 붓을 놀린 것처럼, 깨끗한 얼굴 위로 진한 색의 눈썹과 머리카락이 그림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가 눈동자만 굴려 주변을 살펴보자 그들이 있는 곳은 휴게실이 아닌, 따뜻한 색감의 넓고 안락한 방의 침대 위였다.

‘어디지, 여긴……?’

디아나는 의아하게 눈을 깜박였다.

분명 그와 함께 휴게실 소파에 누워 있던 게 마지막 기억이었는데.

‘……더워.’

그건 그렇고 의식을 차리자 케이든의 몸에서 전해지는 열기가 점점 선명해졌다.

얼굴과 귓가가 홧홧한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케이든의 몸이 저와 달리 손가락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처럼 탄탄하다는 것 또한 미치도록 신경 쓰였다.

결국 그녀는 입술이 닿지 않게 고개를 비스듬히 튼 채 힘겹게 팔을 들어 그의 등을 두드렸다.

“케이든, 일어나 봐요.”

“으음…….”

미간을 찌푸린 채 짧게 뒤척이던 케이든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제 코앞에 있는 디아나의 맨어깨에 잠시 상황을 이해하려는 듯 눈을 깜박이다가, 곧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디아나?”

케이든은 당황해 디아나를 불렀다. 그러나 그녀는 가까스로 참았던 숨을 내쉬느라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디아나의 발갛게 달아오른 목덜미와 눈가, 잔뜩 구겨진 옷 등을 확인한 케이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설마, 어제 내가 결국 참지 못하고 디아나에게 손을…….’

그는 까치집 상태인 머리 그대로 침대 위에서 무릎을 꿇었다.

“잘못했어.”

“……네?”

“그러니까 내가 그대를, 아니 우선 내 머리부터 뜯고 이야기해도 괜찮아.”

“네?”

디아나는 횡설수설하며 제게 머리를 디미는 케이든에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왜 그러시는…… 아.”

그녀는 이내 그가 당황한 이유를 깨닫고는 제 몸을 살펴보았다.

“아무 일도 없었나 본데요? 그냥 피곤해서 기절하듯 잠들었던 것 같은데…….”

“어?”

케이든은 디아나의 말에 움직임을 멈추며 멍하니 반문했다.

그 얼빠진 얼굴을 본 디아나는 결국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그의 머리로 손을 뻗었다.

“많이 놀라셨나 봐요. 머리도 이렇게 내버려 두시고.”

디아나가 손을 움직여 케이든의 머리를 쓰다듬듯 정돈해 주었다.

그제야 ‘아무 일도 없었다’라는 말을 제대로 이해한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다행이야. 그보다 무겁진 않았어?”

“음, 조금이요?”

“무거웠구나. 미안해.”

“아침부터 평생 들을 사과를 다 듣는 기분이네요. 정말 괜찮으니까 그만하세요.”

디아나가 눈을 샐쭉 흘겼다.

그 얼굴이 귀여워 케이든이 짧게 웃음을 흘리는 차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디아나는 사용인의 목소리에 어깨를 움찔 떨고는 재빨리 손을 거두어들였다.

“3황자 전하, 3황자비 전하. 기침하셨으면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어, 그래. 들어와.”

케이든은 머쓱한 얼굴로 제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허락의 말이 떨어지자 문이 열리고, 중후한 인상의 사용인이 들어왔다.

케이든이 그녀를 알아보고 인사했다.

“시녀장.”

“편안한 밤 보내셨습니까.”

황후궁의 시녀장이 부드럽게 웃으며 허리를 굽혔다.

디아나는 그제야 이곳이 황후궁의 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황후 폐하께서 1황자 전하 부처와 조찬을 함께하자는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참석하시겠습니까?”

“하룻밤 신세도 진 마당에 식사까지 챙겨 주시니 가지 않을 도리가 있나.”

“알겠습니다. 그럼 시중들 아이들을 들여보낼 테니 두 분의 준비가 끝나면 다시 오겠습니다.”

이후 디아나와 케이든은 각각 사용인들의 시중을 받아 매무새를 정돈한 후, 시녀장의 안내를 받아 식당으로 향했다.

* * *

“어젯밤에 레밋 경이 갑자기 신혼부부를 데리고 왔길래 얼마나 놀랐던지, 호호!”

“큽.”

“콜록.”

황후가 식사 도중 까르르 웃으며 한 말에 케이든과 디아나가 나란히 콜록거렸다.

그들이 민망함에 제각기 급하게 물 잔을 들고 목을 축이자 1황자, 엘리엇이 다정한 어조로 황후를 만류했다.

“어마마마, 짓궂으십니다.”

“맞아요. 괜찮나요, 3황자비?”

“……괜찮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1황자 전하, 1황자비 전하.”

디아나는 이런 자리가 조금 어색하긴 했지만 크게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었기에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상냥한 사람이로구나.’

그것을 배려라고 생각한 1황자 부부의 눈빛은 따스해졌다.

중간중간 서로의 식사를 챙기는 케이든과 디아나의 정다운 모습을 목격한 황후 또한 흐뭇하게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러자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로 훈훈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이 자리의 모두가 디아나의 시댁 식구라는 것을 생각하면 조금 과한 훈훈함이었다.

‘다들 왜 저렇게 보시지? 실수한 건…… 없는 것 같은데.’

디아나는 눈을 도르르 굴리며 입 안의 음식을 씹어 삼켰다.

엘리엇은 얼굴에 한가득 기쁨을 담은 채 웃으며 말을 더했다.

“케이든, 네가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게 되어 정말 다행이다. 걱정했는데.”

“……아.”

막 물 잔을 입에 대던 케이든이 움찔하며 황급히 잔을 내려놓았다.

디아나 또한 생선 살을 발라내다가 말고 나이프로 접시를 약간 긁었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엘리엇은 동생의 행복한 모습이 보기 좋은지 연신 웃기만 했다.

그 얼굴이 가히 신관처럼 보일 정도로 성스러웠다.

‘다들 우리가 1년 후에 이혼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시니…….’

1황자 내외와 황후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디아나와의 거래는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안전했다.

난도질당한 양심을 가까스로 추스른 케이든이 태연한 미소를 띤 채 디아나의 손을 잡았다.

흰 손등 위로 입술을 내린 그가 그녀를 보며 다정히 눈을 휘었다.

“저를 선택해 준 비께 고마울 따름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디아나?”

“그럼요, 케이든.”

디아나 또한 어느 정도 양심을 갈무리했는지 수줍은 얼굴로 맞장구쳤다.

케이든은 한껏 다디단 분위기를 풍긴 후 1황자비에게 슬그머니 대화를 넘겼다.

“그리고 형님께서도 1황자비 전하와 사이가 좋으시다 소문이 자자한 것을요. 그에 비하면야 저희는 조용한 편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1황자비, 플뢰르가 픽 웃었다.

“빈말이라도 좋게 봐 주어 고맙네요. 사실은 놀리고 싶으셨던 거죠?”

“그리 말씀하시면 섭섭합니다. 저는 진심이었는데요.”

케이든의 능청에 플뢰르는 결국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엘리엇과 닮은, 선한 인상의 그녀가 웃던 중 불현듯 디아나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그보다 3황자비.”

“네, 1황자비 전하.”

“괜찮다면 앞으로 이따금 만나러 가도 괜찮을까요? 황궁에는 마음 놓고 찾아갈 수 있는 또래 여인이 없는 편이라서…….”

플뢰르는 어색한 미소를 띠며 말꼬리를 흐렸다.

현재 디아나를 제외하면 황궁에 플뢰르의 또래라고 할 만한 여인은 1황녀 레베카, 2황녀 카를롯타뿐이었다.

품위를 내려놓고 솔직히 표현하자면, 1황자비인 플뢰르가 그들을 찾아가는 것은 맹수의 아가리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었다.

물론 황후와 사이가 좋고, 결혼 전 알던 영애들과도 이따금 만남을 가진다고는 하나, 그녀가 황족이 된 이상 행동에 제약이 생길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근본적인 외로움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던 와중 황궁 내에, 자신과 같은 직위를 가진 디아나가 나타난 것이었다.

정적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안심인데, 직접 만나 본 디아나는 굉장히 호감형의 사람이었다.

“너무 갑작스러웠을까요……?”

플뢰르는 ‘친해지고 싶어요’라는 마음이 가득 담긴 눈으로 디아나를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디아나는 그 순수한 호의에 마음 한구석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끼며 가까스로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그녀가 1황자 부부를 죽였던 날은 달조차 뜨지 않았던 깊은 밤이었다.

병으로 쓰러진 1황자와 그런 그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다던 1황자비.

하지만 디아나가 온몸을 검은 옷으로 가린 채 1황자 궁의 정원에 발을 들였을 때.

1황자비, 플뢰르는 마치 그녀가 찾아올 것을 알고 있었던 양 정원 한복판에서 달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1황녀 전하께서 보내신 분인가요.]

바람만큼이나 담담한 목소리였지만 기묘한 힘이 느껴졌다.

디아나는 이상하게도 선명하게 귀를 파고드는 목소리에 움칫 발을 멈췄다.

플뢰르는 디아나가 제자리에 멈춰 있는 사이 시선을 내리며 몸을 돌렸다.

지척에 다가와 있는, 검은 복면인의 모습에 놀랄 법도 하건만 그녀는 시종일관 차분했다.

디아나가 지금이라도 그녀를 죽여야 하나 고민하던 그 순간.

플뢰르가 천천히 몸을 낮추더니 무릎을 꿇고 디아나의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살려 주십시오.]

[…….]

[미천한 제 목숨이나마 대신 내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저 사람은…… 살려 주세요.]

[…….]

[제 목숨보다 소중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제발…….]

아마 그 모습을 본 순간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그런 ‘의구심’이 디아나의 마음속에 독처럼 퍼지기 시작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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