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그만.”
낮은 목소리와 함께 뻗어 나온 단단한 팔이 디아나의 허리를 휘감아 뒤로 당겼다.
등에 탄탄한 몸이 틈 없이 바짝 맞붙었다.
순간 숨을 흡 들이켰던 디아나는 익숙한 향기에 고개를 뒤로 돌렸다.
“……케이든?”
“하…….”
케이든은 급하게 뛰어온 것인지 자그맣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귓가에 닿는 숨과 맞닿은 몸이 델 듯 뜨거웠다.
디아나를 안은 채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난 그가 서늘한 눈으로 루드비히를 노려보았다.
“이런 곳에서 볼 줄은 몰랐는데, 카드몬드 후작.”
“……3황자비 전하와 인사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보다 어딜 그리 바삐 다녀오십니까?”
케이든이 경계를 감추지 않자 루드비히는 가소롭다는 듯 매끄러운 웃음을 띠었다.
그 물음에 케이든의 몸이 작게 움찔했다.
그와 몸을 붙이고 있던 디아나는 그의 움직임을 고스란히 느끼고는 의아해졌다.
‘뭐지?’
그녀가 눈을 도르르 굴리는 사이, 루드비히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뭐, 3황자비께서 더는 홀로 계실 것 같지 않으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남기고는 이상하리만치 선선히 물러났다.
디아나는 루드비히의 태도가 미심쩍었으나 그에 관한 생각을 곧 머릿속에서 지워 내며 몸을 돌렸다.
“괜찮나, 그대? 어디 다친 곳은? 후작이 무슨 짓이라도 한 건 아니지?”
케이든은 디아나가 무어라 입을 열 틈도 없이 그녀를 샅샅이 살폈다.
그는 그녀가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하다는 것을 확신하고 나서야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저자는 1황녀의 측근이야. 그러니 앞으로는 단둘이 있지 마. 위험하니까.”
“별일은 없었지만, 알겠어요. 그보다 궁에 다녀오신다더니 왜…….”
디아나는 케이든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휴게실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틈 없이 닫은 그녀가 몸을 돌려 그의 얼굴을 살피다가 우뚝 말을 멈추었다.
열기가 선명하던 몸과 달리 케이든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디아나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케이든?”
그녀가 불안하게 케이든을 불렀다.
그가 초점이 맞지 않는 것처럼 눈을 깜박이다가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 커다란 몸이 휘청 기울어졌다.
“이게 무슨……!”
경악한 디아나는 케이든의 몸을 받아 안다가 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소파에 눕듯이 몸을 기댔다.
그녀는 그의 몸 주변으로 마력이 전보다 사납게 날뛰는 것을 느끼고는 입술을 짓씹었다.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왔길래.’
디아나는 우선 날뛰는 마력을 잠재우기 위해 그를 끌어안으려 했다.
하지만 케이든이 그녀를 제 품 안에 짓누르듯 가두는 것이 먼저였다.
“……저기, 읏.”
디아나는 그를 부르려다가 말고 목덜미에 내려앉는 더운 숨에 어깨를 움찔 떨었다.
케이든의 입술이 맨살을 스칠 때마다 입술 새로 신음이 튀어나오려 했다.
‘빌어먹을. 발작이…….’
한편, 케이든은 고통을 억누르느라 입술을 깨문 채 숨을 몰아쉬었다.
빛의 상급 정령, 엘판드의 힘을 과하게 끌어 쓴 반동인지 평소보다 마력이 격하게 날뛰었다.
‘일어나야 하는데.’
케이든은 제 아래서 바르작대는 디아나의 몸이 신경 쓰여 팔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그의 몸은 주인의 의지를 배반하고 본능적으로 편안함을 찾아 움직였다.
그는 자꾸만 제멋대로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으려 하는 손을 참는 것만으로도 적잖이 버거웠다.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기념으로 궁에 선물을 보내 두었으니, 돌아가서 풀어 보렴.]
연회장에서, 케이든은 레베카가 ‘선물’이라는 말을 언급하자마자 익숙하게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소름에 주먹을 움켜쥐었다.
[궁에 좀 다녀올게. 그대는 휴게실이든 어디든 이곳을 벗어나서 잠시 쉬고 있는 게 낫겠어.]
그는 디아나를 두고 다급하게 보좌관인 파트라슈를 찾아 3황자 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침실을 가득 메우고 있던 ‘선물’들과 마주쳤다.
[젠장.]
케이든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제게 달려드는, 온통 검은 옷 일색의 암살자들을 정신없이 처치했다.
금빛 검이 어둠을 갈랐다.
방에 고인 피 냄새가 짙어질수록, 그의 몸을 다른 누군가 조종하는 것 같은 느낌도 함께 짙어졌다.
머릿속으로 엘판드가 말하는 소리가 울렸다.
[이 이상 오래 전투를 지속하면 몸에 부담이 갈 거다. 빨리 끝내는 게 좋을 텐데.]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거라면 당연히……!]
어찌나 숙련된 암살자들이던지 여유롭게 말을 이을 새도 없었다.
케이든은 가까스로 마지막 암살자의 목을 베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몸에 피가 튀지 않았음을 확인한 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몇이나 죽였지?]
엘판드의 힘을 오래, 또 많이 빌려 쓸수록 몸에 부담이 가는 것인지 마력 발작이 일어날 가능성이 커졌다.
케이든의 물음에, 엘판드가 제가 빌려준 힘과 암살자의 수를 헤아려 보던 때.
평소라면 위험한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방에 발도 들이지 않았을 파트라슈가 다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주군! 방금 비 전하께서 2황자와 마주쳤다고……!]
[……뭐?]
그 말에 순간적으로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확 돌아왔다.
케이든은 디아나가 망나니 2황자와 함께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무작정 연회장 쪽으로 달려갔다.
한데 도착했더니 2황자는 온데간데없고, 1황녀의 최측근인 카드몬드 후작이 디아나의 손등에 입술을 대려 하고 있었다.
그 광경 또한 마음에 들지 않기는 매한가지였기에 그는 재빨리 디아나를 후작에게서 떼어 놓았다.
[그보다 어딜 그리 바삐 다녀오십니까?]
그리고 후작이 암살자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듯 비웃음을 흘리며 사라진 후.
디아나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다급함 때문에 한구석으로 밀려나 있던 마력이 미친 듯 날뛰었다.
‘제발, 말 좀, 들어라…….’
케이든은 이를 악문 채 팔에 힘을 주어 디아나와 몸을 약간 떨어트렸다.
디아나와의 접촉이 줄어들자마자 고통이 한층 더 커지며 숨이 턱 막혔다.
지금 당장이라도 팔에 힘을 풀고, 그녀의 살결에 코를 비비며 그 안온함을 마음껏 맛보고 싶다는 난잡한 욕망이 고개를 쳐들었다.
하지만 케이든은 자신이 고통으로 인해 제정신이 아니라는 말을 변명 삼으며 디아나에게 제멋대로 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위해서 계약 결혼이라는, 다소 황당하고도 위험한 일까지 승낙해 준 고마운 사람을…….
“케이든.”
그 순간, 나직한 부름을 뱉은 디아나가 양팔을 뻗어 그의 목을 바짝 끌어안았다.
필사적으로 고통을 참던 케이든은 그 힘에 이끌려 속절없이 몸을 기울였다.
“안……!”
그는 대번에 기겁하며 거리를 벌리려 했다.
하지만 그녀와 몸이 맞닿는 것과 동시에 발작의 고통이 티가 날 정도로 줄어들었다.
“……!”
더위로 질식하던 와중에 갑작스럽게 찬 공기를 들이마신 듯한 기분.
케이든은 갑작스럽게 줄어든 통증과 그에 따라 명료해진 정신에 멈칫했다.
잠시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그가 이내 헛웃음을 지었다.
‘또.’
이 느낌도 벌써 두 번째였다.
죽을 것 같은 고통이 찾아왔을 때. 디아나와 접촉하기만 하면 숨통이 트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
이쯤 되니 자신이 대체 디아나를 어떤 존재로 여기고 있길래 이런 기분이 드는 건가 싶었다.
케이든은 맞닿은 몸에서 전해지는 심장 박동을 헤아리다가 허탈하게 웃으며 몸에 힘을 뺐다.
그 바람에 케이든의 몸에 완전히 깔리게 된 디아나가 작게 윽, 소리를 냈다.
“아직도 많이 안 좋으세요?”
디아나는 고통으로 인해 케이든의 몸에서 힘이 빠진 줄 알고 걱정스럽게 그의 등을 쓸었다.
그녀의 손이 닿을 때마다 차츰차츰 통증이 줄어들었다.
이쯤 되니 상당히 합리적인 의문이 들었다.
어쩌면 디아나는…… 그의 발작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해주는 것이 아닐까.
케이든은 조금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입술을 열었다.
“디아나.”
“네?”
“잠깐만 이대로 안고 있어도 되겠어? 이상하게 그대와 닿아 있으면 괜찮아지는 느낌이라. 아, 이거 수작 부리는 거 아니야. 정말로.”
그가 끝에 다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물론 입 밖으로 말을 꺼내자마자 구차한 변명처럼 느껴져 속으로 절망했지만.
그때 디아나가 작게 소리 내어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괜찮아요.”
“……고마워.”
그 순간 케이든은 어렴풋이, 디아나가 제 발작 사실을 알고 있음을.
그래서 이렇듯 말도 안 되는 투정을 받아주며 자신을 위로하고 있음을 깨닫고는 조금 먹먹한 마음이 되었다.
케이든은 발작과는 다른 느낌으로 울렁이는 속을 다스리며 애써 말을 돌렸다.
“그보다…… 명색이 초야인데 미안하게 됐지만, 우리는 오늘 황후궁에 신세를 져야 할 것 같아.”
“왜요?”
“침실에 조금…… 문제가 생겨서. 수리를 해야 할 것 같더군.”
차마 암살자의 시신과 핏자국을 정리해야 한다고는 말할 수 없어 케이든이 대충 얼버무렸다.
디아나는 껴안은 상태로 눈을 굴려 케이든의 뒤통수를 의심스럽게 바라보았으나 지금은 넘어가 주기로 했다.
“그러면 그냥 지금 황후궁으로 가서 제대로 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조금만…… 조금만 더 나아지면.”
케이든은 디아나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디아나는 그의 숨결이 맨살 위에 내려앉을 때마다 이상한 생각이 들려 하는 것을 참았다.
‘이 사람은 아프다, 아픈 사람이다. 다른 생각이 있어서 이러는 게 아니다…….’
디아나는 그 생각을 필사적으로 되뇌며 얌전히 그에게 안겨 있었다.
그동안 케이든의 숨결은 차츰 안정되었고, 일정한 숨소리에 그녀의 눈 또한 느릿하게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결국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휴게실 소파에서 사이좋게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 후 그들을 찾아낸 파트라슈가 기겁해 턱을 떨어트렸지만, 두 사람은 모르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