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145)

16화

그 순간, 복도 저편에서 울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내 주세요, 전하. 제발요.”

“내가 화를 내지 않게 하는 게 좋을 거야, 영애. 무려 황자가 관심을 보인다는데 감사하게 여겨야지. 일단 만나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라니까?”

디아나는 들려오는 대화의 내용이 심상치 않아 설핏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저 목소리, 설마…….’

그녀는 발소리를 죽이며 대화가 이루어지는 곳을 향해 다가갔다.

복도의 끝에서 멈춰 모퉁이 너머를 슬쩍 훔쳐보자, 술에 거나하게 취해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불콰한 얼굴이었지만 못 알아볼 수 없었다.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입 안에서 욕지거리를 짓씹었다.

‘저 미친 자식.’

남자는 2황비의 장남인 2황자 페란트였다.

황실 역사상 최악의 난봉꾼이라고 불렸던 미친 망나니.

제 버릇 개 못 준다더니, 아니나 다를까 과거로 돌아왔어도 여전히 망나니는 망나니였다.

‘또 누구 인생을 망치려고…….’

페란트의 특기는 헛소리를 지껄이며 제 신분을 무기 삼아 사방에 교제를 강요하고 다니는 것이었다.

아마 이번에도 지나가다가 눈에 띈 영애에게 치근덕거리던 거겠지.

2황비와 그 자식들이 레베카를 등에 업고 있는 것을 아는 영애들은 페란트를 쉬이 거절하지 못할 테니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여자는 디아나가 아는 얼굴이었다.

디아나는 속으로 혀를 차면서 발을 떼었다. 어차피 휴게실로 들어가려면 두 사람과의 마주침을 피할 수 없었다.

모퉁이를 돌아 나온 그녀의 얼굴에는 조금 전과 달리 무구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어머, 벨라도바. 여기 있었네.”

“……네, 네?”

희게 질려 있던 여자, 벨라도바는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오늘 결혼식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눈을 크게 떴다.

‘3황자비? 무슨……?’

벨라도바는 당황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디아나와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그사이 디아나는 의아한 얼굴로 눈을 깜박이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런 얼굴이야? 시녀 업무와 관련해서 물을 것이 있다고 나를 이곳으로 부른 건 그대잖아.”

“아…….”

그제야 흐려졌던 이성이 퍼뜩 돌아왔다.

벨라도바는 디아나가 모른 척 자신을 이 자리에서 빼내려 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재빨리 표정을 가다듬었다.

“마, 맞습니다. 와 주셨군요.”

“시간이 별로 없으니, 어서 들어가지. 이쪽으로 와.”

디아나는 태연하게 휴게실 문을 손짓했다.

벨라도바가 힐긋 페란트의 눈치를 보고 발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넌 또 뭐야?”

험악하게 얼굴을 구긴 페란트가 한발 먼저 디아나의 앞을 막아섰다.

디아나는 찰나 페란트를 빤히 올려다보다가 곧 정중히 예를 갖춰 인사했다.

“2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디아나 블루벨입니다.”

“뭐? 블루벨……? 아하.”

잠시 기억을 더듬듯 인상을 찌푸렸던 페란트가 술 취한 목소리로 조소했다.

“네가 바로 그 졸부 딸이냐?”

“흡.”

당장 얼굴에 장갑을 맞아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무례한 말에 벨라도바가 작게 숨을 들이켰다.

페란트는 가느스름한 눈으로 제 앞의 여자를 품평하듯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흠. 들었던 것보다는 훨씬 반반한데.’

새로 3황자의 비가 되었다는 여자는 생각 외로 무척 아름다웠다.

작은 키에 가녀린 체구, 연분홍색 머리카락이 꼭 바람에 산들거리는 꽃잎을 연상시켰다.

‘이게 그 새끼 거라 이거지.’

케이든을 떠올린 페란트의 입꼬리가 점차 삐딱하게 올라갔다.

술기운에 그의 이성이 더 멀리 달아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가 제 등 뒤에서 굳어 있는 벨라도바에게 턱짓했다.

“야, 넌 이만 가 봐.”

“예?”

“영애한테는 흥미 사라졌으니까 꺼지라고.”

“하, 하지만…….”

벨라도바는 난처한 얼굴로 디아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디아나는 선선히 고개를 저었다.

“괜찮으니 먼저 가.”

“……알겠습니다. 다음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3황자비 전하.”

결국 벨라도바는 입술을 꾹 사리물더니 공손하게 디아나를 향해 예를 갖췄다.

상대가 3황자비임을 인지했다는 것과 동시에, 이 은혜를 잊지 않고 갚겠다는 뜻을 내포한 인사였다.

페란트는 연신 걱정스러운 얼굴로 뒤를 돌아보던 벨라도바가 모퉁이 너머로 사라지자마자 느끼하게 빙글거렸다.

“골칫거리를 순순히 보내는 걸 보니 역시 너도 나한테 관심이 있었나 보지?”

‘또 헛소리 시작이군.’

디아나는 냉랭하게 생각했다.

당장이라도 저 작자의 팔다리를 유로의 밥으로 주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디아나는 2황비를 상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순진무구한 얼굴을 가장했다.

머리가 텅 빈 놈을 상대하려면 본인의 머리도 텅 빈 척하는 것이 가장 좋았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무지하여 그런데 전하께서 말씀하시는 ‘관심’이란 게 무엇인가요?”

“……뭐?”

“아. 이제 가족이 된 사이이니 전하께도 먼저 인사를 드렸어야 옳다는 뜻이었을까요? 2황비 전하께는 막 인사를 드리고 오는 길이랍니다.”

디아나가 2황비를 언급하자 페란트가 움찔했다.

그는 평소 레베카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행실을 바르게 하고 다니라며 2황비에게 마르고 닳도록 잔소리를 듣는 처지였다.

그런데 이 여자가 자신이 술을 먹고 올케에게 치근덕거렸다는 말을 퍼트리고 다니기라도 한다면…….

‘안 돼.’

뒤늦게 제정신이 돌아오며 피가 싹 식는 기분이었다.

페란트는 디아나를 협박해 입을 막아야겠다는 생각에 위협적으로 한 발을 떼었다.

“너…….”

“페란트 전하.”

그때 등 뒤에서 나타난 손이 그의 어깨를 잡아챘다.

페란트는 감히 황자의 어깨를 쥐는 무례한 행동에 분노하며 몸을 돌렸다가 낭패한 얼굴을 했다.

“카, 카드몬드 후작.”

“이런 외진 곳에서 무얼 하고 계셨습니까? 연회장은 저쪽인데요.”

화사한 금색 고수머리를 지닌 청년이 상냥히 물었다.

그는 낮에 결혼식장에서 디아나와 시선을 교환하던 남자였다.

“윽…….”

페란트는 그에게 잡힌 어깨에서 고통을 느끼는 것인지 나지막한 신음을 흘렸다.

루드비히 카드몬드가 그의 귓가에 대고 자그맣게 속삭였다.

“이번 일은 특별히 황녀 전하께 고하지 않도록 하지요.”

“…….”

“그러니 못 본 척해 드릴 때 얌전히 거처로 돌아가세요. 그분의 화를 돋우고 싶은 게 아니라면.”

뱀처럼 말을 맺은 루드비히가 빙그레 웃으며 페란트의 어깨를 놓아주었다.

“……쳇.”

페란트는 분한 듯 입술을 짓씹더니 디아나를 한번 노려보고는 자리를 떴다.

‘사람 봐 가면서 날뛰는 것도 여전하고.’

디아나는 한심하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혀를 차다가 옆얼굴에 닿아 오는 호기심 어린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

“…….”

두 사람은 잠시간 시선을 마주한 채 말이 없었다.

맑은 하늘색 눈동자로 디아나를 빤히 응시하던 루드비히가 빙긋이 웃었다.

“어쩐지 익숙한 상황이네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가요?”

디아나는 미소로 속내를 감추며 모른 척 고개를 갸웃했다.

루드비히는 그 말에 자못 서글프다는 듯 눈썹을 누그러트렸다.

“이런. 제가 기억에서 그리 쉽게 잊힐 미모는 아닌데.”

그 순진무구한 태도가 2황비와 2황자를 상대하던 디아나와 묘하게 닮아 있었다.

‘……처량한 척 잘하는 건 여전하네.’

그도 그럴 것이 루드비히는 회귀 전 디아나의 처세술 스승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실 성격이 맞지 않아 만나면 으르렁대기 바빴지만,

그 바람에 루드비히처럼 웃으며 혀에 날을 세우는 법을 몸에 익혀 버렸으니 어찌 보면 스승이 맞았다.

[전하께서는 신이 아니야. 나 또한 전하를 따르지만, 신하로서 그분을 섬기는 것이지 너처럼 숭배하진 않아.]

레베카의 책사.

그리고 디아나의 맹목적인 믿음에 최초로 ‘균열’을 내는 데 일조했던 사람.

그것이 루드비히 카드몬드였다.

그렇기에 결혼식장에서 그를 발견했을 때 잠시 시선을 떼지 못한 것이다.

그 또한 결국에는 레베카의 손에 처단당한 사람 중 하나였으므로.

“2황자 전하의 무례는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기쁜 날이다 보니 전하께서 술이 조금 과했나 봅니다.”

디아나가 복잡한 심경으로 루드비히를 바라보고만 있자 그가 거리를 좁혔다.

부드러운 손길로 디아나의 손을 잡아당긴 그가 눈을 사르르 접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보니 정식으로 소개조차 하지 않고 떠들고 있었네요. 루드비히 카드몬드입니다, 3황자비 전하. 빛의 영광이 가득하길.”

긴 속눈썹이 나비처럼 팔랑이며 붉은 입술이 손등에 닿으려는 찰나.

“그만.”

낮은 목소리와 함께 뻗어 나온 단단한 팔이 디아나의 허리를 휘감아 뒤로 당겼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