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즐거워 보이는군, 두 사람.”
“……2황비 전하.”
케이든과 디아나가 나란히 움찔하고는 허리를 굽혔다.
그들의 앞에는 갈색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틀어 올린 2황비가 서 있었다.
부채 위로 드러난 금색 눈에서 미미한 경멸이 드러났다.
“명색이 이제는 한 식구가 될 사이인데, 피로연이 다 끝나 가도록 인사조차 나누지 못할 것처럼 보이길래 내 직접 걸음 했네.”
그녀의 말은 차분했으나 내용만은 다분히 공격적이었다.
디아나는 티 나지 않게 눈을 굴렸다.
‘선봉이라 이건가.’
곁눈질로 주위를 살피자 저 멀리서 황제와 이야기를 나누는 척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1황비가 보였다.
뭔가 작당을 하겠다 싶더니, 우선은 기를 꺾고 경고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할 줄 아는 거라곤 사랑밖에 없는 무해한 사람처럼 보여야 하니…….’
디아나는 가볍게 숨을 들이켜며 몸을 바로 세웠다.
눈썹을 축 늘어트린 그녀가 시선을 내리깔며 조곤조곤 사과했다.
“송구합니다, 2황비 전하. 제가 케이든 전하께 정신이 팔린 나머지 예를 잊었습니다. 부디 용서를.”
“쿨럭.”
경계심 그득한 눈으로 2황비를 주시하고 있던 케이든이 예기치 못한 말에 기침을 터트렸다.
놀란 디아나가 걱정스럽게 그를 보며 물었다.
“어머. 괜찮아요, 케이든?”
“방금 뭐…… 쿨럭!”
케이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계속해서 기침이 나오는 탓에 말을 잇지 못했다.
2황비는 디아나가 너무도 태연히 제 말을 받아친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부채를 팔랑이며 혀를 쯧 찼다.
“경박하기는.”
“경박하여 송구합니다.”
“자네는 무슨 답을 그리 성의 없이…….”
“그렇게 느껴지셨다면 대단히, 무척이나 송구합니다.”
“허.”
연이어지는 사과에 2황비가 끝내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디아나는 여전히 순진무구한 표정이었다.
기분이 나쁘시다 하여 사과를 했을 뿐인데, 대체 뭐가 문제지요?
제가 제 남편을 너무도 사랑한다는 것도 잘못인가요?
사랑의 멋짐을 모르는 당신은 불쌍해요……!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물기 어린 눈을 하는 것이 꼭 그리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저기 좀 보세요.”
“2황비 전하께서…….”
“아무리 그래도 오늘 막 결혼식을 올린 신부인데…….”
사람들은 2황비가 오늘 막 황실에 입성한 디아나를 핍박하는 것인가 싶어 수군댔다.
정치적으로는 2황비가 3황자비인 디아나를 경계함이 마땅하다고 하나, 오늘 갓 결혼식을 올린, 심지어 피로연을 미처 끝내지도 않은 새 신부에게 저렇게까지 해야 하느냐는 시선이 많았다.
‘일부러 저러는 건가? 아니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천치라서?’
그에 눈을 가늘게 뜬 2황비가 무어라 입을 열려던 때, 소름 끼치도록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를 멈춰 세웠다.
“2황비 전하. 여기 계셨습니까.”
“……누님.”
한발 늦게 당황을 갈무리한 케이든이 날 선 눈으로 디아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디아나는 그 덕에 레베카의 등장으로 인해 찰나 굳어졌던 얼굴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2황비는 조금 전과 달리 깍듯한 태도로 레베카를 맞이했다.
“왔나요, 1황녀.”
“다들 무척 즐거워 보여 무례를 무릅쓰고 끼어들었답니다. 괜찮으시다면 저도 대화에 함께하고 싶군요.”
레베카는 긴장된 분위기를 누그러트리려는 듯 온화한 미소를 띠었다.
물론 그 미소가 오히려 긴장을 가중한다는 걸 이 자리의 모두가 알았지만,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내는 사람은 없었다.
“……쯧. 1황녀를 보아 오늘은 이쯤 하지요.”
“살펴 가세요.”
결국 2황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혀를 차며 몸을 돌렸다.
레베카는 그 등에 대고 완벽하게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잘 짜인 연극의 한 장면처럼 보이는 광경에 디아나는 속으로 생각을 정정했다.
‘1황비가 아니라 레베카의 지시였나.’
하긴, 2황비는 1황비의 수족이나 다름없고, 1황비는 어떻게든 제 딸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서 눈이 벌게져 있으니.
2황비가 레베카의 명령을 따른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레베카는 2황비가 사라지고 난 후 디아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드디어 만나는군.”
그녀는 의미심장하게 말하며 빙그레 웃었다.
눈이 곱게 휘어지고 입꼬리가 올라갔으나 온기 한 점 없는 웃음이었다.
“내 아우와의 나들이는 즐거웠나, 서즈필드 영애? 아, 이제는 3황자비라 불러야 하나.”
언뜻 비아냥거림처럼 들리는 말이었지만 겉으로 보이는 태도는 상냥하기 그지없었다.
작게 심호흡한 디아나가 케이든의 곁으로 한 발 움직였다.
이어서 양손으로 치맛자락을 살짝 쥔 채 오른발을 뒤로 뻗고, 무릎은 움직임이 보일 정도로만 짧게 굽혔다가 편다.
회귀 전, 레베카 본인이 가르쳐 주었던 것처럼 완벽한 예법이었다.
비스듬히 내리깔린 청보랏빛 눈은 덤덤했다.
“……디아나 블루벨입니다, 1황녀 전하. 일전에 초대해 주셨던 오찬에 참석하지 못했던 것은 저 또한 안타깝게 여기고 있답니다.”
인사를 마치고 고개를 든 디아나는 언제 서늘한 눈을 했냐는 듯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침착한 태도에 레베카의 눈이 한순간 의심으로 빛났다.
하지만 그녀는 곧 그러한 기색을 지워 냈다.
“그대가 3황자와 사이가 좋다면 기쁠 일이지. 다음에는 부디 초대장이 제때 도착했으면 좋겠군.”
“영광으로 알고 참석하겠습니다.”
디아나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응답했다.
잠시간 디아나를 빤히 바라보던 레베카가 고개를 돌렸다.
걸음을 옮겨 케이든과 가까이 마주 보고 선 그녀가 그의 어깨를 격려하듯 톡톡 두드렸다.
“친애하는 내 아우님.”
그 모습이 무척이나 살가운 남매처럼 보였다.
케이든의 귓가로 나긋한 속삭임이 스며들었다.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기념으로 궁에 선물을 보내 두었으니, 돌아가서 풀어 보렴.”
‘선물’이라는 말에 케이든의 눈이 미미하게 확장되었다.
그는 등 뒤로 핏줄이 도드라질 만큼 세게 주먹을 쥔 채 가까스로 답했다.
“……감사합니다.”
“평화로운 밤이 되길. 너도, 3황자비도.”
레베카는 그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케이든은 그녀가 멀어지자마자 어딘지 다급한 기색으로 디아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궁에 좀 다녀올게. 그대는 휴게실이든 어디든 이곳을 벗어나서 잠시 쉬고 있는 게 낫겠어.”
“무슨 일 있으신가요?”
“별일은 아니야. 그저 혹시나 해서.”
디아나는 잠깐 사이에 새하얗게 질린 케이든의 얼굴을 걱정스레 올려다보았다.
염려를 감추지 못하는 그 얼굴에, 케이든은 초조한 와중에도 설핏 웃음을 흘렸다.
“그보다, 디아나.”
“말씀하세요.”
“미안해.”
“……네?”
뜻밖의 말에 디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케이든은 말없이 그녀에게로 다가섰다. 고개를 숙여 그녀와 이마를 툭 맞댄 그가 작게 자조했다.
“당장은 내게 아무런 힘이 없지만.”
조금 전, 2황비가 드러내 놓고 디아나를 핍박하려 할 때.
그는 그것이 부당하다는 말 한마디조차 제대로 꺼내지 못했다.
사람들이 자신을 끈 떨어진 연 따위로 말하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권력이라고는 일절 없다는 것도, 그래서 사람들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
[……쯧. 1황녀를 보아 오늘은 이쯤 하지요.]
하지만 그 사실을 이처럼 뼈저리게 느낀 순간이 없었다.
디아나가 이 결혼을 결심하고, 또 자신을 위해 준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마음에서 비롯된 일인지 아니까.
“그대가 더는 부당하게 고개 숙일 일을 만들지 않도록 노력할게. 그러니…….”
케이든은 디아나와 이마를 맞댄 채로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그가 코앞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청보랏빛 눈을 마주하며 속삭였다.
“앞으로는 그런 일이 있을 때 참지 마. 나를 앞으로 내세워서라도 그대를 지켜.”
“…….”
“부탁이야.”
칠흑처럼 검은 눈이 애처로웠다.
자책으로 조금 일그러진 눈썹이 마음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디아나는 그와 제 숨이 뒤섞이는 것이 꼭 입맞춤처럼 느껴진다는 사실을 애써 모른 척하며 웃어 주었다.
“……네, 다녀오세요.”
케이든은 그 대답에 안심한 듯 픽 웃음을 흘렸다. 디아나의 머리를 가볍게 토닥인 그가 이내 금방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홀로 남은 디아나는 제게로 몰린 시선을 피해 휴게실을 찾아 복도로 나왔다.
그대로 연회장에 있다가는 1황비까지 자신을 찾아올 것 같아서였다.
‘깜짝이야.’
디아나는 적막한 복도를 정처 없이 걸으며 심장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하여간 참 선한 사람이라니까, 지나칠 정도로…….’
그녀는 자꾸만 머릿속에 아른거리는 케이든의 얼굴을 떨쳐 내기 위해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일전에 서즈필드 저택으로 꽃을 보냈던 것도 그렇고.
고작해야 1년간의 계약 상대인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마음을 쓰는 것도 그렇고.
케이든은 정말이지 그린 듯 다정하고 선한 사람이었다.
만약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면 함부로 사랑에 빠졌을 정도로.
‘뭐…… 그렇게까지 염치가 없지는 않아서 다행인가.’
자조적인 웃음이 디아나의 입술 새로 피식 새어 나왔다.
그녀가 애써 상념을 털어 내던 차에, 복도 저편에서 울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