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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13/145)

13화

‘……엘리엇 전하.’

1황자 엘리엇 리 블루벨은 현 황후의 외아들이었다.

다만 황후가 타국 출신인 데다가, 1황자는 태어났을 때부터 마력을 다룰 능력이 전무한 동시에 몸이 무척 약했다.

그에 반해 레베카는 제국의 네 공작가 중 하나를 외가로 두고 있었으며 그녀 본인도 강한 정령사였다.

해서 신하 대부분은 레베카를 차기 황제로 지지했고, 1황자를 지지하는 귀족은 없다시피 했지만 레베카는 티끌만 한 불안도 남겨 두지 않으려 했다.

[1황자 부부를 죽여, 디안. 날 위해서.]

레베카는 제 발치에 앉은 디아나의 얼굴을 양손으로 소중히 감싸며 그렇게 속삭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디아나는 레베카의 명령을 ‘거부한다’라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녀에게 레베카는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그 명령에 처음으로 망설였다.

[하지만, 전하. 그분들은…….]

[알아. 그 둘이 멍청할 정도로 선하고 상냥한 사람들이고, 황위에도 관심이 없다는 걸.]

[…….]

[그렇지만 디아나. 나는 아주 작은 위험 요소도 남겨 두고 싶지 않단다. 너도 내가 완벽한 상태로 황위에 오르길 바라지 않니.]

[…….]

[그렇지?]

결국 디아나는 레베카의 명을 거부하지 못하고 1황자 부부를 죽였다.

그리고 대외적으로 애도의 눈물을 흘리는 레베카를 따라 그들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하지만 핏기 없는 얼굴로 나란히 누워 있는 1황자 부부의 곁에, 그들을 죽인 자신이 서 있다는 사실이 더없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전하, 저…… 몸이 좋지 않아서. 먼저 돌아가 볼게요.]

디아나는 끝내 속에서 올라오는 욕지기를 참지 못하고 도망치듯 장례식장을 벗어났다.

그녀가 본궁의 입구에 주저앉아 필사적으로 찬 공기를 들이마시던 때.

[서즈필드 영애인가.]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걸음을 옮기던 케이든이 그녀의 앞에 멈춰 섰다.

디아나는 낮은 부름에 저도 모르게 어깨를 흠칫 떨었다.

1황자와 친형제나 다름없이 지내던 것이 케이든이다.

분명 자신이 1황자를 죽였다는 사실은 레베카를 제외하고서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건만.

지금의 그녀는 그에게 죄인이나 다름없었기에, 괜스레 심장이 조이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디아나는 가까스로 울렁임을 갈무리하고 대꾸했다.

[케이든 전하.]

[왜 누님의 곁을 지키지 않고 여기서 이러고 있어.]

[……몸이 좋지 않아서요. 먼저 백염궁으로 돌아가 보려 합니다.]

[몸이 좋지 않다면서, 혼자서?]

[괜찮습니다.]

그 말에 주변을 휘휘 둘러보던 케이든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미간을 슬쩍 구겼다.

[바래다주지.]

[정말 괜찮…….]

[내가 안 괜찮아. 그러니 일어서. 힘들다면 부축해 줄 테니 말하고.]

[아, 아닙니다.]

케이든이 손을 뻗어 그녀를 부축하려 하기에, 그녀는 화들짝 놀라 제힘으로 일어섰다.

이후 두 사람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레베카의 궁까지 나란히 걸었다.

오가는 대화는 없고 그저 사박사박 풀과 흙을 밟는 발소리뿐이었다.

디아나는 불편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억겁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지난 후, 그들이 백염궁 앞에 다다랐을 때였다.

[내 밑으로 들어올 생각은 없나, 서즈필드 영애?]

부지불식간에 들려온 말에, 디아나는 한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그녀는 이내 혼란한 머릿속을 털어 내듯 고개를 휘휘 내젓고 주춤 뒤로 물러났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저 1황녀 전하의 은혜를 입은 하찮은…….]

[아니, 나는 그대야말로 누님 세력의 가장 큰 전력이라고 믿네. 내가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정확하거든.]

케이든의 목소리는 확고했다. 그 이상 부정해 보아야 소용없을 정도로.

디아나는 그때 진심으로 당황했다.

어떻게 된 것인지 케이든은 디아나가 단순히 레베카의 총애를 받는 시녀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케이든은 디아나의 당황한 얼굴을 보고는 짓궂게 웃었다.

[놀란 얼굴이 참 볼만하군. 내 밑으로 들어오면 어떻게 알았는지 말해 줄 수도 있는데, 어떤가. 좀 구미가 당기지 않아?]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전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더 하실 말씀이 없다면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래. 그대는 그런 사람이었지.]

디아나는 혼란스러운 속을 감추기 위해 단호하게 대응했다.

그에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케이든은 한참 후에야 몸을 돌려 사라졌다.

[하지만 나는 진심이야, 영애. 언제든 괜찮으니 마음이 바뀌면 얘기해 주게. 조심히 들어가고.]

비록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처럼 되기도 전에, 두 사람 모두 목이 잘리게 되었지만.

‘……그것도 내가 1황자 전하를 죽였다는 걸 모르니 할 수 있는 말이었겠지.’

디아나는 속으로 쓴웃음을 삼켰다.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기에, 그녀에게는 지금의 이 상황이 더더욱 비현실적이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햇빛. 피부 위를 스치는 부드러운 천의 감각.

머리카락을 장식하고 있는, 대지 속성 정령 기사에게 부탁하여 영구 보존의 축복을 건 꽃과 리본.

무엇보다도 제 옆에서 손을 맞잡고 있는 케이든의 존재가 가장 꿈같았다.

눈을 한 번 깜박이면 덧없이 깨어날 꿈.

디아나는 아직도 자신이 헛된 환상 속에서 헤매고 있나 하는 기분에 눈을 깜박여 보았다.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두 사람이 선 자리뿐이었다.

오늘은 그들의 결혼식이었고, 어느새 눈앞에는 주례를 맡은 신관이 있었다.

디아나와 케이든이 단상 앞에서 걸음을 멈추자, 신관은 엄중한 음성으로 주례사를 읊기 시작했다.

“더없이 경사스러운 날입니다. 리카르도 로건 블루벨 황제 폐하의 다섯 번째 자식이신 케이든 세이릭 블루벨 전하와…….”

상투적인 말들이 읊어지는 사이, 디아나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베일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하객석의 가장 앞줄에 앉아 있는, 화려한 차림의 두 여인이 보였다.

‘1황비와 2황비.’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디아나를 보며 무언가를 의미심장하게 속닥이고 있었다.

1황비야 레베카의 어머니이니 당연히 디아나가 미덥지 못할 테고.

2황비는 1황비의 시녀 출신으로, 철저히 1황비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 황궁에 들어왔다.

그러니 2황비 역시 디아나를 경계하는 것이 당연했다.

‘독살 모의라도 하는 건가.’

디아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다시 시선을 거두려다가 누군가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1황비와 2황비의 자리 뒤편.

반듯한 자세로 앉아 있던 청년이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베일 너머로 시선이 마주쳤다.

외모로만 따지자면 주변 나라의 왕족이라고 해도 믿을 법한, 금발 벽안의 미청년.

그 색채가 눈을 찌를 듯 화려했다.

그는 잠시간 의아한 듯 디아나와 눈을 맞추다가 이내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

한편, 일정한 간격으로 디아나를 흘긋거리던 케이든은 무의식중에 미간을 좁혔다.

반투명한 흰색 베일 너머, 디아나의 시선이 자신의 반대쪽을 향해 있었다.

‘어딜 보는 거지?’

케이든은 자연스레 디아나의 시선이 닿은 곳으로 고개를 움직였다가, 그녀가 보고 있는 것이 다른 남자임을 깨닫고는 순간 제 눈을 의심했다.

“……이것으로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음을 전능하신 틸리아 앞에 엄숙히 선언하는 바입니다. 신랑과 신부는 맹세의 입맞춤을.”

때마침, 이라고 해야 할지 긴 식순의 끝을 알리는 말이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

디아나는 그때까지도 케이든이 아닌 미청년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것이 이상하리만치 불편하게 느껴졌다.

케이든은 그 불편함이 단지 계약 상대가 본분에 충실하지 않아 생긴 감정이라고 단정 지었다.

‘누가 보면 결혼 상대가 저자인 줄 알겠군.’

불만스럽게 눈썹을 까딱인 그가 손을 뻗어 디아나의 베일 끝을 붙잡았다.

“전하?”

디아나는 그 움직임에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는 청년에게서 시선을 떼어 냈다.

반투명한 베일을 걷자, 온전히 드러난 청보랏빛 눈이 놀란 듯 크게 뜨인다.

이제야 저 하나만을 오롯이 담아내는 그 눈을 보자 옅은 만족감이 차올랐다.

“이름으로 부르라니까.”

“아.”

디아나는 뒤늦게 자신이 다른 곳에 지나치게 정신을 팔고 있었음을 깨닫고 눈썹을 누그러트렸다.

케이든은 심술궂은 소년처럼 웃고는 손끝으로 그녀의 볼을 톡톡 건드렸다.

“집중해, 디아나.”

커다란 손이 흰 얼굴을 부드럽게 감쌌다. 디아나의 입술이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교묘히 가려졌다.

그 손에서 전해지는 열기에 생소함을 느낄 새도 없이 두 사람의 거리가 훅 좁혀졌다.

“이제 실전이야.”

나지막한 속삭임이 귓가를 파고든 직후. 두 사람의 입술이 틈 없이 맞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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