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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12/145)

12화

[아, 아가씨께서 서즈필드 영애시라고요…….]

뮈젤은 디아나가 곧 3황자비가 될 인물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눈물을 흘리며 계약서에 서명했다.

곧 닥칠 정쟁의 풍파를 몸소 겪게 될 것 같다는 예감에서 나온 눈물이었다.

그 모습을 본 디아나는 조금 미안해졌으나, 계약서는 착실히 품에 챙겨 넣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봄꽃이 활짝 만개할 무렵.

마침내 결혼식 당일이었다.

“아가씨,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아예 숨도 쉬지 말라고 하시지 그래요, 마담?”

“드레스를 입을 때는 그리되실 겁니다.”

“이럴 수가…….”

마담 드슈는 평소보다 배로 단호했다.

디아나는 지난 며칠보다 더욱 고된 새벽을 보내야 했다.

사실 저가 어떻게 살아 있는 것인지 아직도 의아할 지경이었다.

물론 그 덕에 겉보기만큼은 그 누구도 흠잡을 수 없을 정도로 고귀하고, 우아하고, 사랑스럽고, 무엇보다도 부티 나는 신부의 모습을 할 수 있었지만 두 번은 겪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마담 드슈는 마지막으로 디아나의 머리 위로 반투명한 흰색의 레이스 베일을 얹어 주고는 뒤로 물러났다.

“그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영애.”

“그래요. 반쯤 감금당한 처지이긴 했어도 결과가 좋으니 눈감아 드려야겠죠?”

디아나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마담 드슈가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숙였다.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부디 행복하시길.”

디아나와 마담 드슈, 그리고 그녀의 조수들 사이에 전우애 비슷한 훈훈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때 작게 노크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방문이 열렸다.

디아나를 제외한 모두가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서즈필드 영식을 뵙습니다.”

밀라드 서즈필드는 제 동생의 경사를 축하하듯 레베카와의 약혼이 있던 날만큼이나 반듯한 차림새였다.

마담 드슈의 조수 몇은 그의 동화 속 왕자님 같은 모습에 남몰래 볼을 붉히기도 했다.

연한 밀크캐러멜의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넘긴 모습으로, 밀라드가 곱게 눈매를 휘며 다정히 말했다.

“다들 고생이 많군. 그대들의 노고에 감사를 표하네.”

“저희야 받은 만큼의 일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고생이라고 할 것도 없지요.”

마담 드슈는 퍽 사무적인 태도로 겸양의 말을 내뱉었다.

언뜻 들었을 때는 무안을 주는 것처럼도 들렸지만, 정작 말을 내뱉은 당사자가 워낙 태연자약한 표정이니 무어라 트집 잡기도 애매했다.

밀라드는 제 예상보다 시큰둥한 답이 돌아오자 잠시 떨떠름하게 뒷덜미를 만지작거렸다.

자신이 이런 식의, ‘귀족답지 않은’ 상냥한 태도를 내보이면 사람들은 모두 쉽게들 감동하곤 했던지라 조금 당황스러웠다.

‘뭐, 착각이겠지.’

하지만 이내 그린 듯한 웃음을 되찾은 그가 요청했다.

“동생을 보내기 전 단둘이 나눌 말이 있어서 그러는데, 준비가 끝났다면 자리를 좀 비켜 줄 수 있나?”

“알겠습니다.”

마담 드슈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나가기 직전 디아나에게 살짝 미소를 보였다.

그것을 본 밀라드의 기분은 조금 전보다 한결 더 나빠졌다.

‘……착각이 아니군.’

요 며칠간 붙어 있었다고 편이라도 드는 건가? 감히?

밀라드는 평생 디아나가 자신보다 나은, 아니 자신과 같은 취급을 받을 이라고 여겨 본 적이 없었다.

디아나는 늘 그의 아래였다. 그것은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당연한 진리였다.

그런데 3황자가 돌연 디아나에게 관심을 두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의 기분은 개판이 되었다.

레베카와 밀라드는 결혼이 아닌 약혼을 한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디아나가 3황자와 결혼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3황자비인 디아나의 신분이 그보다 높아지게 된다.

대외적인 이미지를 망칠 수는 없어 간신히 참고 있다지만, 자존심 강한 밀라드에게는 여간 굴욕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여파는 고스란히 디아나에게로 향했다.

“건방진 것. 이제는 인사도 안 해? 운 좋게 3황자의 비가 되었다고 해서 네가 내 위라도 된 줄 아느냐.”

디아나는 밀라드가 대뜸 폭언을 퍼붓자 속으로 혀를 쯧 찼다.

사람이 저 정도로 한결같이 한심하기도 쉽지 않은데 참 대단한 일이다.

물론 겉으로 그 태도를 고스란히 내보일 수는 없었기에 그녀는 난처한 듯 눈썹을 누그러트렸다.

“죄송해요, 도련님. 최근에 방에 갇혀서 혼인 준비만 했더니 순간 말이 잘 안 나오는 거 있죠. 말을 해 보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디아나가 최근 외부로의 출입을 일절 금지당한 채 마담 드슈에게 시달린 건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었다.

디아나는 밀라드가 잠시 말을 잃은 틈을 타 조용조용 말을 이었다.

“도련님.”

“…….”

“너무 노여워 마세요. 제가 3황자와 결혼한다고 해서 서즈필드 가문의 사람이 아닌 건 아니니까요.”

회귀 전, 밀라드는 레베카에게 홀려 서즈필드 가문의 재산을 통째로 가져다 바치다시피 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끝내는 제 아비마저 죽이고 오페라 다이아몬드 광산의 소유권까지 넘길 정도였다.

하지만 디아나는 서즈필드 자작의 지원을 받아 3황자 궁에 고스란히 사용할 예정이었으므로, 행여 밀라드가 레베카에게 홀려 넘어가 서즈필드가의 재산을 탕진하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그러니 미리 한두 마디쯤 흘려 두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사람들에게 들었어요. 1황녀 전하께서는 검소하고 예의 바른 신사를 좋아하신다고요.”

고요히 잠긴 물 같은 목소리가 뱀처럼 귓가로 흘러들었다.

그 목소리가 레베카의 아름다움에 홀려 깊은 곳에 처박혀 있던 그의 이성을 건드렸다.

“제 결혼도, 도련님의 약혼도…… 결국 목적은 같잖아요.”

“…….”

“모든 것은 서즈필드의 영광을 위해.”

디아나는 어딘가 묘한 얼굴의 밀라드를 보며 입꼬리를 부드럽게 말아 올려 웃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미소였다.

* * *

디아나와 서즈필드 자작을 태운 마차는 해가 머리 꼭대기에 다다를 무렵 3황자 궁 앞에 도착했다.

“내리자꾸나.”

서즈필드 자작은 십 년 묵은 한이 내려갔다는 듯 환한 얼굴로 디아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얌전하게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날은 봄의 시작을 알리듯 따스하고 맑았다.

3황자 궁의 정원은 결혼식을 이유로 모처럼 솜씨 좋은 정원사의 손길이 닿아 온통 화사했다.

디아나는 그 가운데 길게 늘어진 붉은색 비로드 카펫을 발로 슬쩍 건드려 보다가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숨을 멈췄다.

흰 예복을 차려입은 케이든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3황자 전하? 왜 여기…….”

디아나를 대신해 입을 연 것은 서즈필드 자작이었다.

이 길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할 3황자가 대관절 왜 여기에 와 있는 것일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이 일이 당황스러운 것은 그 하나만이 아닌지 케이든의 어깨너머로 그의 부관인 파트라슈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편이 더 보기 좋을 것 같아서.”

한편, 케이든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디아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홀린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꼭 홀린 사람처럼.

밝은 햇빛 아래서 보아서인지, 반투명한 베일 너머로 보이는 디아나의 눈은 유독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꽃잎 같은 머리카락이 흰 레이스와 뒤섞여 팔랑이는 모습이 이상하리만치 느리게 눈에 박혀 들었다.

‘역시 이상해.’

분명 구혼서를 보낸 뒤에도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몇 번이나 만났던 디아나였다.

하지만 왜 그녀를 만날 때마다 오래 헤어져 있었던 것처럼 애틋하고 그리운 느낌이 드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즈금 므 흐스는 급느끄…….”

케이든은 등 뒤에서 파트라슈가 이를 뿌득뿌득 가는 소리에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어렵사리 시선을 떼어 냈다.

표정을 갈무리한 그가 눈짓으로 자작이 쥐고 있는 디아나의 손을 가리켰다. 의미는 명백했다.

“자네는 이만 가 보아도 좋아. 고생했네.”

“아니, 이, 이게…….”

“갈까, 부인.”

자작이 더듬더듬하는 사이 케이든은 디아나의 손을 반쯤 빼앗듯이 낚아채고는 빙긋이 웃었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무시였다.

디아나는 제 손을 감싼, 금방이라도 뿌리칠 수 있을 만큼 조심스러운 악력과 온기에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웃으며 속삭였다.

“사람들이 다 이쪽을 봐요.”

“그러니까. 안 그래도 당신더러 신분 상승이니 뭐니, 불쾌한 소리 지껄여 대는 입들이 많은데 굳이 소문을 보태 줄 필요는 없지 않겠어?”

결혼식은 대개 신부의 아버지가 신랑에게 신부를 넘겨주는 듯한 형태로 진행된다.

케이든은 그것이 싫었다. 자식과 아내들을 모두 하나의 물건 취급하는 꼴이 꼭 황제 같아서였다.

“혹시 불편한가?”

케이든은 일을 저지른 후에야 디아나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 유쾌한 기분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오히려 기분 좋은걸요.”

그 말에 케이든 또한 안도한 듯 미소를 짓고는 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나란히 걷고 있자니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회귀 전. 레베카의 사람이었던 디아나와 케이든이 마주할 일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딱 한 번, 그들이 지금처럼 나란히 걸었던 날이 있었다.

1황자 부부의 장례식 마지막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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