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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9/145)

9화

“하지만 이를 어쩐다. 너는 이미 3황자 전하와의 약속을 받아들인 상황이니…… 어쩔 수가 없지 않겠느냐.”

의미심장한 어조였다.

그 말에 담긴 뜻을 눈치챈 디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가 문을 눈짓했다.

“마차는 준비되어 있다. 파르망디 거리에서 가장 큰 찻집이라 하셨으니 미리 가 있거라.”

디아나는 그 순간만큼은 서즈필드 자작에 관한 서운함을 약간 잊고 고마움을 느꼈다.

‘자작도 아직 케이든과 약혼조차 치르지 않은 나를 레베카 앞에 내놓긴 부담스럽겠지. 내가 겁이라도 먹고 도망쳐 버리면 안 될 테니까.’

약은 속셈이었지만 지금의 그녀에게는 빠져나갈 기회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선심을 써 호칭을 고쳐 주었다.

“가주…… 아버지께서는요?”

“나는 밀라드와 함께 1황녀 전하를 뵈러 가야지. 이번 일에 관해 묻고자 하실 테니 말이야.”

다음 순간, 서즈필드 자작은 언뜻 날카롭게 느껴지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디아나.”

“네?”

“내가 이 만남을 주선하긴 했어도, 너도 이게 네가 잡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라는 것은 알고 있겠지. 그러니 부디 입조심하고, 잘해 보거라.”

서즈필드 자작은 나름 덕담이랍시고 건넨 말인 것 같았다.

하지만 저게 사실상 승산이 없는 정쟁에 저를 보험으로 밀어 넣은 사람이 할 소리인가 싶었다.

‘황당하네…….’

만약 자신이 정말로 멋모르는 사생아였다면 저 제안에 관성적으로 수긍했을지도.

서즈필드 자작도 디아나가 제 뜻을 거스를 리 없다고 생각하여 이 일을 추진했을 테니까.

이때의 디아나 서즈필드는 그만큼 순종적이고 위축되어 있었다.

‘……뭐, 사실 회귀하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자작이 나를 케이든과 결혼시키려 하는 일도 없었을 테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묘하게 쓴 기분이었다.

디아나는 자작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고 싶은 마음을 다스리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저택을 나섰다.

마차는 금세 출발했다. 창 너머를 힐긋 바라보니 오전이었음에도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파르망디 거리는 귀족을 주 고객으로 한 고급 찻집과 디저트 가게들이 늘어선 곳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가게 앞에 내린 그녀는 직원의 깍듯한 안내를 받아 온실을 닮은 개인실로 안내받았다.

“더 필요한 일이 있으시다면 그 옆의 줄을 당겨 주십시오.”

디아나가 간단한 다과를 주문하자 직원이 물러갔다.

그녀는 신기한 기분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회귀 전에도 여기는 와 본 적이 없는데.’

레베카는 귀족을 주 고객층으로 하는 곳이라고 해도 이런 ‘시장 바닥 같은 곳’에 발을 들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오히려 황족의 권위로 이 가게의 다과를 제 처소까지 들여왔지.

디아나 역시 늘 레베카의 응접실에서만 다과를 즐겼던지라 이곳에 직접 와 본 것은 처음이었다.

테라스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만들어진 작은 유리 돔 위로 햇빛이 쏟아졌다.

그야말로 온실이네, 하며 감탄하던 디아나는 문틈으로 들려오는 수군거림을 눈치채곤 입을 다물었다.

“저 여자예요?”

“맞는 거 같은데. 저 눈, 밀라드 서즈필드와 닮지 않았나요? 물론 그쪽이 더 곱게 생기긴 했다만.”

“이렇게 보니…… 3황자 전하께서 첫눈에 반했다는 게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도 하고.”

“결국 황족의 취향이라는 걸까요?”

“어머, 이 사람도 참!”

디아나는 그 말에 속으로 조용히 마담 드슈에게 감사의 박수를 보냈다.

고마워요, 마담. 당신의 실력이 이 사기극의 개연성 일부를 감당하고 있나 봐요. 자작에게 수고비를 올려 달라고 건의해 볼게요.

디아나가 속으로 의지를 다지는데 바깥이 조금 더 소란스러워졌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문이 열리며 케이든이 안으로 들어왔다.

디아나는 예상한 시간보다 훨씬 일찍 도착한 그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하? 일찍 오셨네요?”

놀란 것은 케이든도 마찬가지였는지 그가 물었다.

“그대야말로 왜 벌써 와 있어? 어제는 내가 기다리게 했으니 오늘은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새벽부터 아주 치열한 사투가 있었답니다……. 결국 또 늦으셨네요.”

“이런. 내게 벌써 2전 2패를 기록하게 한 건 그대가 처음이군. 어디 가서 자랑해도 좋아.”

케이든이 장난스럽게 말하며 디아나의 맞은편에 앉았다.

눈을 찡긋거리는 모양새가 자칫 경망스러워 보일 법도 한데, 그가 워낙 뛰어난 외모의 소유자여서인지 그마저도 보기 좋았다.

그녀는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줄을 당겨 다과를 추가 주문했다.

직원이 두 사람분의 다과를 세팅하고 사라지자 디아나가 문이 틈 없이 닫힌 것을 확인하고 작게 말했다.

“나오기 직전에 1황녀 전하께서 초대장을 보내셨어요. 서즈필드 일가와 함께 오찬을 드시겠다면서요.”

그 말에 케이든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그가 혀를 쯧 차고는 마찬가지로 목소리를 낮춰 답했다.

“하마터면 그대를 빼앗길 뻔했네. 어제 내 행동이 그렇게 설득력 없었나?”

“그건…… 아니지 않을까요?”

디아나는 유리 돔 너머, 자신과 케이든에게 쏟아지는 흥미 가득한 시선들을 느끼며 말했다.

물론 서로 정적인 1황녀와 3황자가 한 가문의 자제들을 택한 것도 충분히 자극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사람들 대부분이 그보다 좋아하는 것은 이런 남녀 사이의 소문이었다.

가문에서 내놓다시피 했던 사생아, 우연 한 번으로 황족의 마음을 사로잡다!

……이런 건 정치적 상황에 대해 잘 모르는 평민들의 입을 타고도 충분히 퍼질 수 있는 이야기니까.

현재 수도에서 케이든과 디아나는 ‘우연과 운명이 만들어 낸 한 쌍’ 따위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우연은 디아나, 운명은 케이든 쪽을 일컫는 말이었다.

“아무튼, 오늘 만나자고 한 건 내가 첫눈에 반한 사람답게 그대에게 열렬히 구애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함도 있고.”

케이든이 차를 한 모금 넘기고는 싱긋 웃었다.

“자세한 논의가 필요할 것 같아서 말이야, 우리 결혼에 대해. 부부 사이의 내밀한 일도 그렇고.”

“쿨럭.”

디아나는 예기치 못한 장소에서 튀어나온 말에 당황해 기침했다.

그녀는 조금 황당한 얼굴로 케이든을 바라보았다.

“전하…….”

“음?”

“그런 망측한 얘기를 꼭 이런 탁 트인 곳에서 해야 했을까요?”

“탁 트인 곳이니 오히려 우리가 결혼과 관련한 계약 내용을 조정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하겠지.”

“맞는 말이긴 한데, 정말 그게 다인가요?”

“들켰네. 사실 디아나, 그대의 반응을 보고 싶던 것도 있어.”

케이든이 장난기 많은 소년처럼 비죽 웃었다.

디아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탄식하듯 웃었다.

“그래요, 제가 졌어요. 3전 1승 2패가 되셨네요. 그래서 전하께서는 어떻게 하고 싶으신데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그대의 의견을 따를 생각이야.”

“제 의견이요?”

“그래. 그대는 내가 어디까지 하길 바라나? 겉으로는 사랑에 푹 빠진 부부로 보여야 한들, 원하지 않는다면 손끝 하나 대지 않겠네. 굳이 접촉하지 않고도 방법은 있을 테니까.”

디아나는 그 질문에 난감한 얼굴로 입술만 달싹였다.

부부란 무릇 어느 정도의 접촉이 동반되는 사이였다.

그녀도 그쯤은 알고 있었고, 어느 정도는 각오도 마쳤다.

하지만 ‘어디까지가 괜찮으냐’라고 물으니 난감한 것이 사실이었다.

결국 디아나는 솔직하게 답했다.

“사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겪어 본 적이 없는 일이라서.”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러면…… 차라리 지금 확인해 보는 게 낫겠군.”

“네?”

디아나가 의아하게 되묻는 것과 동시에, 케이든이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맞잡은 손을 들어 올려 손깍지까지 낀 그가 진중하게 물었다.

“이 정도는 어때? 싫으면 바로 말하고.”

“……괜찮아요.”

디아나는 손끝을 움찔거리지 않으려 애쓰며 답했다.

처음엔 당황하긴 했으나 필요한 일이었고, 무엇보다 케이든이 진지한 얼굴이었기에 그녀도 실험의 일종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손을 잡는 건 괜찮은 거네.”

케이든은 그리 중얼거리더니 몸을 일으켜 디아나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가 제 몸으로 그녀의 모습을 사람들의 시선에서 가리며 손을 뻗었다.

“그럼 이 정도는?”

굳은살이 박인 손이 디아나의 귓불과 목덜미 언저리를 가볍게 쓸었다.

디아나는 하마터면 신음을 흘릴 뻔해 다급히 숨을 들이켰다.

사실 그렇게까지 내밀한 부위도 아닌데 괜히 기분이 이상해졌다.

‘내가 이렇게 간지럼을 잘 타는 사람이었나.’

그녀는 속으로 의문을 가지며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조금 간지러워서 그렇지 불쾌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디아나에게 케이든은 단 한 번도 ‘싫은’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레베카의 밑에 있을 때조차 케이든은 ‘피하고 싶은’ 사람이었지, 싫거나 미운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그에 케이든의 눈이 조금 더 가라앉았다. 그가 일순 짓궂은 웃음을 띠며 고개를 훅 가까이했다.

“그럼 키스해도 되나?”

디아나는 코앞까지 다가온 케이든의 얼굴에 가만히 눈만 깜박였다.

화가가 몇 달을 공들여 그린 것처럼 단정하고 잘생긴 얼굴이 코앞에 있으니 외려 비현실적이었다.

그녀가 그 상태로 한참을 말하지 않자 외려 민망해진 그가 섭섭한 투로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싫으면 편하게 말하라니까. 어차피 이런 곳에서 할 생각도 없었…….”

“싫지는 않아요.”

“……뭐?”

케이든은 순간 제가 잘못 들은 줄 알고 눈을 크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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