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연지곤지]
소문은 빨랐다.
어느 정도로 빨랐냐면, 디아나가 케이든과 헤어져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마담 드슈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도 계셨나요, 마담?”
“자작님께서 아가씨의 결혼식까지의 제 일정을 모두 선점하셨답니다! 오늘부터 웨딩드레스 제작에 들어가기로 했으니 얼른 들어오세요!”
“……결혼식이요? 누구 결혼식이요?”
“누구긴요. 당연히 아가씨와 3황자 전하의 결혼식이지요!”
마담 드슈가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까르르 웃으며 디아나를 붙잡았다.
디아나는 그녀의 조수, 멜리가 가져온 욕조에 처박히기 직전 다급하게 항의했다.
“마담 드슈, 뭔가 잘못된 소식을 들으신 것이 아닐까요? 저는 전하를 몇 시간 전에 처음 뵈었는걸요.”
“시간이야 뭐가 중요한가요. 그간 여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으시던 3황자 전하께서 아가씨께 꽃을 바치며 청혼했다는 점이 중요하죠!”
“아니, 저는 청혼을 받은 적이…….”
“곧 받으실 거랍니다. 당장 내일부터 구혼이 이어질 거예요. 제 이름을 걸고 장담합니다.”
그 뒤로도 디아나는 열심히 항변을 이어 갔으나 모조리 무시당했다.
결국 체념한 그녀는 얌전히 사람들에게 제 몸을 맡겼다.
마담 드슈는 디아나의 머리카락을 장식한 꽃에 보라색 리본을 더해야겠다고 재잘대다가, 밤이 다 되어서야 물러갔다.
간신히 혼자 남게 된 디아나는 낯선 손님방―입꼬리가 귀에 걸린 자작의 지시로 방을 옮겼다―의 침대 위에 앉았다.
‘그래도 자작이 미리 손을 써 둔 덕이라고 해야 하나, 듣기론 대부분 우연한 만남이라고 확신하는 분위기던데.’
서즈필드 자작은 디아나와 케이든의 만남 전, 미리 바람잡이들을 구해 둔 상태였다.
자작이 돈으로 매수한 이들은 오늘 오후가 되자마자 ‘서즈필드가의 사생아, 신데렐라 되나?’라는 기사가 찍힌 종이를 거리에 퍼트리고 다녔다.
거기에 더해 그간 여인이라곤 관심 없이 굴던 케이든이 다정하게 구는 모습을 본 귀족들이 흥분해 떠들고 다닌 덕에 소문은 무서운 속도로 퍼져 나갔다.
아마 자고 일어나면 수도의 모든 이가 이 로맨스를 가장한 사기극에 속아 넘어가지 않았을까.
디아나는 그리 생각하며 가볍게 한숨을 삼켰다.
‘물론 레베카는 쉽사리 속아 넘어가지 않겠지만. 의심은 계속하겠지.’
그러니 3황자비로 황궁에 머무는 동안은 되도록 아무것도 모르는, 사랑에 푹 빠진 사람처럼 보여야 했다.
그 ‘사랑’의 대상이 케이든이라는 것을 상기한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
옅은 주홍빛 촛불만이 흔들리는 어둑한 방 안.
그녀는 침대에 웅크리고 앉아 케이든이 제게 준 꽃으로 만든, 리본이 더해진 머리 장식을 가만히 만지작거렸다.
[첫눈에 반한 게 영애가 아닌 나인 걸로 하자고. 아마 그편이 조금 더 진실에 가까운 것 같으니.]
[앞으로 잘 부탁하네, 디아나.]
햇빛, 바람. 바로 옆에서 느껴지던 미미한 열기.
낮의 일을 상기하자 왜인지 속이 어지러워진 탓에, 그녀는 결국 머리 장식을 협탁 위에 조심히 올려 두고 후 입바람을 불어 촛불을 꺼 버렸다.
* * *
다음 날, 아침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이른 새벽.
디아나는 이상하게 술렁이는 마음을 다독이고 간신히 잠든 지 몇 시간 만에 마담 드슈의 손에 일으켜 세워졌다.
그녀는 비몽사몽 욕실로 끌려가며 중얼거렸다.
“마담…….”
“네, 네. 저 여기 있습니다. 혹 좋아하시는 향유가 있을까요? 어제는 미처 여쭈어보질 못했네요.”
“죄송하지만 더 자게 나가 주시겠어요……?”
“안타깝게도, 안 됩니다. 얘, 멜리. 거기 향유 좀 가져오너라.”
디아나는 마담 드슈의 단호한 태도에 흑흑 울며 욕조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목욕재계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어느새 하늘은 환해져 있었다.
‘왜 이렇게 밖이 소란스러운 것 같지.’
디아나는 화장대 앞에 앉아 치장을 마무리하던 중 고개를 갸웃했다.
귀를 쫑긋 세우자 방 밖, 정확히는 저택의 정문 쪽이 어쩐지 소란스러웠다.
그렇게 생각하던 차, 다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하녀인 듯한 이가 방문을 두드렸다.
“아가씨,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들어와……요.”
디아나가 어설프게 말끝을 고치며 말을 맺자 문을 열고 처음 보는 하녀가 들어왔다.
어쩐지 상기된 얼굴의 그녀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3황자 전하께서 꽃을 보내오셨습니다. 오늘 파르망디 거리에서 함께 차를 들면 어떻겠냐고 하시면서요!”
“어머, 어머!”
“세상에! 아가씨, 제가 말씀드렸었지요? 당장 오늘부터 구혼이 이어질 거라니까요! 미리 준비해 놓아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시간을 맞추지 못했겠어요!”
멜리와 마담 드슈가 호들갑을 떨며 손뼉을 쳤다.
디아나는 심히 민망한 기분으로 몸을 일으켰다.
“꽃은 어디에 뒀어요?”
“우선 현관 부근에 쌓아 뒀답니다. 아가씨 방 안에 전부 두기에는 너무 많아서요.”
“쌓여요? 뭐가…….”
기껏해야 꽃다발 정도를 생각했던 디아나가 당황해 방 밖으로 나갔다.
상체를 살짝 숙여 난간 너머를 바라본 그녀는 일순 말을 잃었다.
“……저게 다 뭐야?”
청보랏빛의 미니 델피늄, 연분홍색 카타리나 장미, 하얀 별꽃 등 가짓수를 세기도 벅찬 꽃들이 1층 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심지어 활짝 열린 정문으로는 아직도 꽃을 한가득 안은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중이었다.
그때 흐뭇한 얼굴로 사용인들을 감독하던 서즈필드 자작이 기척을 느낀 것인지 고개를 들었다.
디아나를 발견한 그가 입꼬리를 길게 늘여 웃으며 손짓했다.
“거기서 뭐 하느냐. 내려와 보거라. 전부 3황자 전하께서 네게 보내신 것이다.”
디아나는 한발 늦게 서즈필드 자작의 곁에서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밀라드를 발견했다.
정말 내려가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리 방법이 있는 건 아닌지라 그녀는 할 수 없이 아래로 내려갔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약속 장소에서 하염없이 케이든을 기다리는 한이 있더라도 빠르게 저택을 벗어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가주님, 도련님.”
디아나는 아래층으로 내려와 두 사람에게 가볍게 예를 갖춘 후 꽃들을 둘러보았다.
유독 제 머리 색, 눈 색과 비슷한 빛깔의 꽃들이 많은 것을 보자 이것이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 위한 연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분이 묘해졌다.
‘서로 목적이 있는 결혼이어도 이렇게 잘해 준다니…… 역시 본성이 선한 사람이라고 해야 할지.’
디아나는 조금 싱숭생숭한 기분으로 꽃잎을 만지작거렸다.
그때 일련의 상황을 심기 불편하게 바라보고 있던 밀라드가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아버지. 대체 왜 이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당장 내다 버리지 않으시는 겁니까?”
“어허, 거추장스럽다니. 보낸 사람의 성의를 그렇게 무시하면 쓰나.”
“보낸 사람이 바로 그 3황자이니 문제가 아닙니까! 우리의 적이라고요!”
밀라드가 얼굴이 벌게져 벌컥 화를 냈다.
그러자 서즈필드 자작은 짐짓 태연한 얼굴로 손짓해 사람들을 물렸다.
밀라드의 어깨에 한 손을 얹은 그가 자상한 태도로 작게 속삭였다.
“아들아, 3황자는 지금 같잖은 사랑에 눈이 멀어 큰 실수를 하는 게다. 외가도 없는 자가 믿을 만한 뒷배를 만들 기회를 이렇게 날리다니 우리에겐 얼마나 잘된 일이냐?”
마력으로 감각을 강화해 그 말을 고스란히 들은 디아나는 감탄했다. 정치적인 명분도 참 그럴듯하게 만들어 낸다 싶어서였다.
“물론 명목상의 지참금은 쥐여 줘야 하겠지만 그것만으로 판을 뒤집을 수는 없어.”
“하지만…….”
“승리는 분명 1황녀 전하의 것이다. 그러니 당분간은 저 아이에게 잘 대해 주거라. 혹시라도 허튼 생각을 하지 못하게.”
밀라드는 결국 서즈필드 자작의 말에 수긍하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디아나는 이쪽에 붙었다, 저쪽에 붙었다 하는 서즈필드 자작이 박쥐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러나저러나 수완은 참 좋은 자였다. 밀라드에게 이 결혼의 진실을 털어놓았다가는 레베카에게 얼마 가지 않아 들킬 거라 판단하고 저리 핑계를 대는 것을 보면.
‘신기하게 이럴 때는 사람 보는 눈이 있단 말이지.’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디아나는 설마 꽃이 아직도 남았나 싶어 문밖을 기웃거렸다.
그때 전혀 다른 차림새의 청년이 열린 문 안으로 들어왔다.
“계십니까? 1황녀 전하께서 서즈필드 자작님께 보낸 서신입니다.”
모자 끝을 살짝 잡고 고개를 숙인 청년이 품에서 편지를 꺼내어 내밀었다.
1황녀라는 말에 서즈필드 자작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그는 이내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편지를 받아 들었다.
편지 배달원이 물러간 후 서즈필드 자작이 편지를 뜯었다.
“무슨 일이시랍니까, 아버지?”
밀라드가 기대감에 찬 얼굴로 물었다.
서즈필드 자작은 애써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황녀 전하께서 겹사돈이 될지도 모른다니 축하한다며, 디아나까지 다 같이 식사 자리를 가지는 것은 어떠냐고 하시는구나. 당장 오늘 점심에.”
“정말입니까? 지금부터 준비하려면 시간이 촉박하겠네요. 저는 바로 올라가서 준비하겠습니다.”
밀라드는 발그레 달아오른 얼굴로 위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디아나는 1황녀가 자신을 초대했다는 소식에 찰나 굳었다.
시간이 느려진 듯한 감각 속. 심장이 쿵, 쿵 뛰는 소리가 점차 커다랗게 몸집을 부풀렸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마디가 하얘질 정도로 드레스 자락을 세게 움켜쥐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어차피 레베카를 끌어내리기 위해서는 그녀를 마주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케이든과 결혼하여 황궁에 들어가기로 했으니 더욱 그러하리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너무 이르고 갑작스러웠다.
어제 하루 대부분을 케이든의 생각에 잠겨 있어서일까.
레베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따스한 꿈에서 차가운 현실로 내동댕이쳐지는 기분이었다.
그 차이가 너무도 극명해 놀랄 만큼.
그때 서즈필드 자작이 크흠 헛기침을 하더니 슬쩍 운을 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