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늦으셨네요.”
케이든은 그에 반사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의 생각을 읽은 듯, 여자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괜찮아요. 지금 주변에 아무도 없거든요. 하녀도 잠시 마차로 돌려보냈고요.”
케이든은 눈만 굴려 주변을 살폈다. 확실히 지켜보는 눈은 없었다.
그 사실을 확인한 후에야 그가 가볍게 한숨을 삼키며 여자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여자의 옆에 앉으며 사과의 말을 건넸다.
“미안하군. 케이든 세이릭 블루벨이네. 그대는…….”
“디아나 서즈필드입니다, 전하. 오는 길은 험하지 않으셨나요?”
어딘지 짓궂은 물음에 케이든은 저도 모르게 픽 웃음을 흘렸다.
그가 옅게 미소 띤 얼굴로 반가움을 표했다.
“신기한 우연이군. 서즈필드 영애가 그대였을 줄이야.”
“저도 성함을 알고 뵙는 건 처음이네요. 그때는 잘 들어가셨나요?”
“아, 나야 뭐…….”
물 흐르듯 대꾸하던 케이든은 무언가를 떠올리고 멈칫했다.
뒷골목, 디아나 서즈필드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와 손을 맞잡는 순간 들었던 기이한 감각.
조금 전 발작을 일으켰을 때 만났던 여자에게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지 않았던가?
“…….”
케이든은 눈을 가늘게 뜨고 디아나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아까 흐린 시야 너머로 보였던 여인의 인영도 그녀와 상당히 비슷했던 것 같은데.
결국 케이든은 가라앉은 얼굴로 물었다.
“서즈필드 영애.”
“네?”
“봤나?”
대상이 없는 물음이었다. 검은 눈이 날카로운 기색으로 상대의 반응을 살폈다.
하지만 디아나는 무구한 얼굴로 눈을 깜박일 뿐이었다.
“무엇을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착각이었나.
하지만 케이든은 미묘한 기시감을 지울 수 없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연신 디아나를 살폈다.
한편, 디아나는 그런 케이든을 보며 시치미를 뚝 뗐다.
‘감추고 싶은 것 같았으니까.’
수풀 사이에 몸을 감추고 괴로워하던 케이든의 모습을 떠올린 그녀의 얼굴이 약간 어두워졌다.
회귀 전, 케이든의 적인 레베카의 곁에 있었음에도 디아나는 그가 발작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그만큼 케이든이 제 몸 상태를 철저히 숨기려 했다는 것을 뜻할 터다.
만약 그 사실이 드러났다면, 레베카는 분명 그 틈을 타 암살자를 보내거나 그를 죽이려 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적어도 1년…….’
디아나가 기억하기로, 1황자의 죽음 이후 처음으로 마주했던 케이든의 마력은 5년 뒤처럼 정돈되어 있었다.
그러니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케이든의 발작은 아마 1년 안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하지만 디아나는 자신이 그와 접촉할 때마다 그의 마력이 유의미하게 잠잠해진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레베카를 저지한다는 전제하에 케이든이 최후의 승자가 되리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끝에 도달할 때까지, 그가 걸어야 할 길이 되도록 평탄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디아나는 한때의 잘못된 선택으로 케이든의 목숨을 빼앗은 적이 있으니까.
그건 그녀가 그에게 갚아야 할 일종의 빚이었다.
“제게 혼인을 청하셨다 들었어요. 정확히는 자작님께서 3황자 궁을 지원하는 대가로 청하신 것이겠지만.”
디아나가 조용히 말문을 떼었다.
케이든은 그 담담한 어조에 조금 놀란 듯 물었다.
“내가 묻기에는 조금 우스운 말이긴 한데. 어제도 그렇고, 그대는 이 상황이 불쾌하지 않은가?”
그는 진심으로 의아했다.
보고에 따르자면, 지난 20년간 서즈필드 저택 내에서 디아나의 처지는 결코 좋다고 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지금이야 이렇게 휘황찬란한 차림이라지만 본래는 사용인들이 빵 한 덩이도 쉽사리 내주지 않으려 했을 만큼 만만한 사생아.
그런 디아나를 이렇듯 갑자기 끌고 나와 팔아넘기려는 불쾌한 상황에서도 그녀는 이상하리만치 초연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난 솔직히 어느 정도는 각오하고 온 건데.”
“무엇을요?”
“그대가 날 역겹게 여긴다거나, 당장 썩 꺼져 버려 이 변태 같은 놈아, 라며 뺨을 때리고 정강이를 차는 일 정도?”
“풉.”
디아나는 그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에는 어깨를 몇 번 들썩이더니 이내 참지 못하겠다는 듯 하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그 모습을 본 케이든은 잠시 고민했다. 농담처럼 들렸나? 진심이었는데.
듣는 이를 하나도 배려하지 않은 사실만을 이야기하자면, 서즈필드 자작은 황족과의 인연을 대가로 디아나를 팔아넘기려 하고, 케이든은 그 제안을 받아들인 입장이었다.
어디에서도 디아나 본인의 의사는 찾아볼 수 없는 혼담.
머리채를 잡혀도 그럴 수 있다며 이해가 가능한 상황일진대.
디아나는 케이든의 생각과 다르게 티끌 한 점 없이 웃어 대다가 표정을 갈무리하며 물었다.
“전하께서 자작님께 이 혼인을 명령하셨나요?”
“……그건, 아니지만.”
“그러니 제가 뺨을 때리고 정강이를 차 주어야 할 상대도 명확하네요.”
케이든은 예상과 전혀 다른 그녀의 반응에 찰나 할 말을 잃었다.
그사이 디아나가 눈을 비스듬히 내리깔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제가 어떻게 당신을 원망할 수 있겠어요.”
“뭐라고 했지?”
“아뇨, 아무것도.”
디아나의 속삭임은 너무도 작아 케이든의 귀에 미처 닿지 못하고 흩어졌다.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케이든이 이내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디아나와 시선을 맞췄다.
“그래도 사과하지. 미안해, 영애. 나는 힘이 없는데도 내 사람들만큼은 지키고 싶어 하는 욕심 많고 비겁한 사람이라, 차마 자작의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어.”
디아나는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청보랏빛의 맑은 눈동자는 바닥이 들여다보일 만큼 투명했고, 동시에 아무것도 없이 깨끗했다.
혼란도, 동요도, 잡념조차 보이지 않는 깨끗함.
케이든은 어쩐지 저 시선을 피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나는 영애의 뜻을 존중하겠네.”
“네?”
디아나가 어리둥절하게 눈을 깜박였다. 케이든이 진중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정말로 이 결혼이 내키지 않는다면 지금이라도 마음 편히 거절해도 좋아.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
“하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는 남편으로서 그대가 원하는 일은 무엇이든 들어주도록 노력하겠네.”
디아나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그에 케이든은 왠지 모를 초조함을 느꼈다.
“자작이 제안한 바와 같이, 그대가 황후의 자리에 오르고 싶다면 그렇게 하겠어. 그러나 일이 모두 끝나고, 그대가 내 옆을 떠나고 싶다면 기꺼이 보내 줄게.”
한동안 침묵하던 디아나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자작님과의 계약을 어기는 것이 될 텐데요. 자작님께서는 최종적으로 전하의 외척이 되고 싶어 하실 테니까요.”
“자작이 계약서도 없고, 황태자 자리까지 거머쥔 이의 앞에서 혀를 함부로 놀릴 만큼 멍청하지는 않겠지.”
케이든이 심술궂은 얼굴로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디아나는 그 악당 같은 웃음에 내심 감탄했다.
그는 지금, 자신이 레베카와의 경쟁에서 살아남은 후에는 자작과의 계약을 없던 일로 만들어 버리겠노라 말하는 중이었다.
이로써 서즈필드 자작은 그녀의 전생까지 합하면 총 두 번의 사기를 당하는 셈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점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케이든의 곁에서 그와 편히 접촉하려면…… 아내라는 지위가 가장 자연스럽긴 할 테니.’
디아나는 자신이 케이든을 도울 수 있는 한에서는 그를 돕고 싶었다.
그랬기에 도망치지 않고 이 자리로 돌아왔다.
‘1년 정도 걸리려나.’
만약 케이든이 디아나의 지참금으로 어느 정도의 곤궁을 해결하고, 그녀가 그의 곁에서 고통을 덜어 주기까지 한다면 그는 전보다 빠르게 권력을 거머쥘 수 있을 것이다.
디아나 본인도 뒤로 다른 신분을 만들어 레베카를 공격할 생각이었으니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서즈필드 자작이 본격적으로 황손을 욕심내고, 케이든이 레베카를 끌어내릴 세력을 갖추기까지 약 1년.
그 기간만 그에게 도움이 되고 사라지는 거다.
자신은 제 한 몸을 침몰시키는 한이 있어도 레베카의 목숨을 빼앗을 생각이었으니까.
마음을 정한 디아나가 빙긋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황후의 자리를 원하지는 않아요.”
“그럼?”
“이혼해 주세요, 1년 후에.”
단호한 말이 허공을 울렸다.
케이든은 잠시간 디아나와 빤히 시선을 맞추다가 픽 웃음을 흘렸다.
“이혼해 달라는 말을 그대처럼 즐거운 얼굴로 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
“정략혼을 제안하면서 전하처럼 상냥한 분도 없을 거고요.”
“사실 그대는 서즈필드 자작을 물 먹일 생각에 기쁜 것 아닌가?”
“어머, 티가 났나요? 사실 그런 면도 없잖아 있어요.”
말끝에 디아나와 케이든이 나란히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그나저나 일이 조금 복잡하게 됐네요. 다른 귀족들에게 제가 전하께 첫눈에 반하는 모습을 보였어야 했는데.”
“아니, 내가 하지.”
“……네?”
“첫눈에 반한 게 영애가 아닌 나인 걸로 하자고. 아마 그편이 조금 더 진실에 가까운 것 같으니.”
디아나는 순간 말을 잃었다.
케이든은 때마침 정원으로 들어서는 한 무리의 귀족들을 힐끗 일별하고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사실 이 일이 아니었더라도, 한 번쯤은 그대를 다시 만나고 싶었어.”
당신의 손을 잡았던 순간, 내내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있던 무언가를 찾아낸 듯한 기분이 들었으니까.
그가 그들의 자리 근처에 피어 있던 흰 꽃을 꺾어 그녀의 머리를 장식해 주었다.
디아나는 찰나 가까워진 그의 웃음에 숨을 멈추었다.
“앞으로 잘 부탁하네, 디아나.”
낮은 속삭임이 귀를 간질였다.
노을을 담은 바람에 새까만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렸다.
깊은 눈매 위로 머리카락과 같은 색의 속눈썹이 촘촘히 드리워져 있었다. 단정하고 짙은 눈썹의 결마저 시야에 선명했다.
디아나가 눈부신 것을 목격한 것처럼 반사적으로 눈을 깜박이자 어느새 케이든의 얼굴은 멀어져 있었다.
그의 등 뒤로 사람들이 호기심, 혹은 놀라움이 깃든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이건 그저 저들에게 정치적 의도와는 상관없는 관계임을 보여 주고자 한 행동일 텐데.
“……저도요, 전하.”
그런데 어째서인지, 심장이 수런거렸다. 빠르고도 선명한 박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