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연지곤지]
‘여기가 약속 장소라고?’
디아나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걸음을 옮기며 중앙 정원을 둘러보았다.
황궁의 중앙 정원은 귀족이라면 누구나 출입할 수 있는 곳이었다.
날이 좋았으므로 솜씨 좋은 정원사의 손길이 닿은 정원을 만끽하러 나온 귀족도 꽤 보였다.
하지만 대개, 혼담과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려면 조금 더 사적인 공간에서 만나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녀가 그에 관해 묻기 위해 하녀를 돌아보았을 때, 그녀는 이미 정원의 한쪽 구석에 가져온 돗자리를 깔고 있었다.
디아나는 그제야 하녀의 주변에 돗자리, 바구니 등 피크닉을 위한 용품들이 가득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이게 다 뭐……인가요?”
레베카의 밑에 있을 때의 습관이 남아 자연스럽게 하대하려던 디아나가 재빨리 말을 고쳤다.
이 시기의 그녀는 일개 사용인에게도 함부로 말을 놓지 못하는 처지였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하녀는 귀찮다는 얼굴로 마저 자리를 정돈하고는 디아나를 끌어다가 그 가운데에 앉혔다.
디아나의 팔을 단단히 부여잡은 하녀가 고개를 가까이하고는 빠르게 속삭였다.
“잘 들으세요. 오늘 아가씨께선 날이 좋아서 피크닉을 하러 나오신 거예요. 그러다가 우연히 이곳을 지나던 3황자 전하와 마주치신 거고, 전하께 첫눈에 반한 거죠.”
“그게 다 무슨 소리……. 누구?”
디아나는 일순 제 귀를 의심했다.
너무 놀란 나머지 하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마저 잊은 그녀가 멍하니 반문했다.
하녀는 짜증스럽게 반복했다.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마세요. 3황자이신 케이든 세이릭 블루벨 전하라고요. 알아들으셨어요?”
“그러니까 무슨 착오가…….”
“전하께서 지나가실 때까지 여기 얌전히 앉아 계셔야 해요. 저는 마부에게 이따가 다시 돌아오라는 말을 전하고 올 테니까.”
하녀는 제 할 말만 다다다 내뱉고는 디아나를 두고 휙 멀어져 버렸다.
디아나는 반쯤 넋이 나가 그녀를 붙잡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앉아 있었다.
‘상대가 케이든이라고?’
제 혼담의 상대가 케이든이라는 걸 차치하고도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서즈필드 자작은 1황녀 레베카를 지지하는 대가로 밀라드를 그녀와 약혼시킨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케이든이 자신에게 혼인을 청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는 피아 구분도 할 줄 모르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혹시 서즈필드 자작 쪽에서 혼인을 제안한 건가 싶다가도 여전히 미심쩍었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레베카의 분노를 살 것이 분명한데.
자작은 어느 정도 머저리가 맞긴 하지만 완전히 머저리는 아니었다.
대체 왜 이런 짓을―.
“아.”
디아나는 두서없는 생각을 이어 가던 중 무심결에 깨달음을 얻고는 옅게 신음했다.
[오늘 아가씨께선 날이 좋아서 피크닉을 하러 나오신 거예요. 그러다가 우연히 이곳을 지나던 3황자 전하와 마주치신 거고, 전하께 첫눈에 반한 거죠.]
‘정치적 의도와는 상관없는 결혼을 가장하려는 거구나. 레베카를 드러내 놓고 거스르는 건 양쪽에게 부담스러운 일이니까.’
그녀가 밀라드를 넘어트리고, 레베카를 만나지 않게 됨으로써 상황이 변한 것이다.
듣기로는 레베카와 밀라드의 약혼 자체가 틀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레베카의 태도가 서즈필드 자작에게 모종의 불안감을 불러일으킨 것 같았다. 그는 그런 방면으로는 더없이 눈치 빠른 자니까.
‘나를 앞세워서 황손의 외조부라도 되고 싶은 건가. 이렇게 우스운 연극을 하면서까지? 그보다 케이든은…….’
케이든.
그 이름 하나에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디아나는 벌떡 몸을 일으켜 하녀가 사라진 방향을 살폈다.
하녀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아마 제 수발을 드는 게 싫어 미적미적 돌아오고 있겠지.
‘일단은 자리를 피하자.’
머릿속이 온통 혼란했다.
디아나는 지금 자신이 자리를 피했다가는 서즈필드 자작의 분노를 살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가 케이든이라는 것을 들은 순간부터 그녀가 취할 행동은 정해져 있었다.
‘엎어야 해, 이 결혼.’
서즈필드 자작이 원하는 건 황손의 외조부가 되어 귀족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그 정점에 서는 것.
하지만 정작 황손을 얻게 되면 서즈필드 자작은 그에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1황녀로도 모자라 3황자에게까지 손을 뻗을 정도로 욕심이 많은 자였으니까.
당장이야 서즈필드 자작이 3황자 궁을 지원해 주는 것만으로도 큰 보탬이 될 테지만, 케이든의 세력이 자리를 잡고 나서부터는 방해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회귀 전, 케이든의 세력은 서즈필드 자작과 손을 잡지 않고도 끝내 홀로서기에 성공했다.
그러니 케이든을 위해서라도 지금 서즈필드 자작이 외척 자리를 꿰차는 것은 막아야 했다.
‘예상보다 이르긴 하지만, 드레스라도 팔아서 위장 신분을 구하고 바로 자작 저를 나가자. 그게 낫겠어.’
미안해요, 마담 드슈.
당신의 역작은 제 독립 자금이 될 운명이었던 거예요. 전생의 저처럼 단명할 팔자였던 거죠…….
속으로 심심한 사과의 말을 전한 디아나는 다른 귀족들의 시선이 제게 닿아 있지 않은 틈을 타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디아나는 회귀 전 1황녀의 시녀로서 황궁에 머물렀고, 그 덕에 곳곳의 샛길을 대부분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을 통해 황궁의 뒷문 쪽으로 걸었다.
우습게도 황궁의 중앙에서 멀어지다 보니 오히려 3황자 궁에 가까워졌다.
‘조심…….’
디아나는 행여 3황자 궁의 사용인들에게 제 모습을 들킬까 숨을 죽였다.
3황자 궁 근처의 수풀에 몸을 숨기고 움직이던 그녀가 멈칫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황자 전하!”
“전하! 어디 계십니까!”
“케이든 전하!”
숨죽인 외침이 연이어 들려왔다.
익숙한 이름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슬쩍 좁혔다.
전체적으로 우아하지만 군데군데 관리되지 않은 흔적이 엿보이는 하얀 궁.
그 앞에서 몇 안 되는 사용인들이 다급하게 목소리를 높이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뭐지?’
디아나는 의아함에 눈을 깜빡이며 걸음을 멈췄다.
그때, 그녀의 근처에서 붉은 곱슬머리의 남자와 하녀 한 사람이 마주쳤다.
남자가 암울한 얼굴로 먼저 입을 열었다.
“찾았습니까?”
“아뇨. 아무 데도 안 계십니다.”
“아! 진짜 미치겠네. 갑자기 사라지시는 거야 이제 익숙하다지만, 왜 하필 지금이야…….”
“이 이상 사람을 풀었다가는 다른 궁에 소식이 들어갈 겁니다.”
“어쩔 수 없죠, 더 바쁘게 뛰어 보는 수밖에. 전하를 찾으면 바로 제게 알려 주십시오. 멀리는 안 가셨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레밋 경.”
두 사람은 짤막한 대화를 끝으로 곧장 다시 흩어졌다.
디아나는 수풀 사이로 붉은 곱슬머리 남자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제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조금 전 본 광경들이 동동 떠다니고 있었다.
‘케이든이 사라졌다고?’
마치 성립하지 않는 문장 같았다.
디아나가 아는 케이든은 기본적으로 갑작스럽게 약속을 어길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이유가 있더라도 자신의 측근에게는 언급했어야 했다.
그런데 중앙 정원으로 나와 자신과 마주치기로 약속했다는 사람이 갑자기 사라졌다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죽기 직전 보았던, 상당히 넝마 꼴이었던 케이든의 모습을 상기하니 걱정이 앞섰다.
디아나는 가던 길을 한 번, 3황자 궁을 한 번 번갈아 돌아보다가 끝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쩔 수 없지. 정 도망치기 어려울 거 같으면 무프를 부르면 되니까.’
디아나는 고민 끝에 살금살금 3황자 궁 주변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3황자 궁 주변을 크게 한 바퀴 돌았는데도 케이든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슬슬 발이 욱신거렸다.
‘어쩔 수 없나…….’
디아나는 자그맣게 탄식했다.
케이든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지 불안했으나, 5년 후까지 무사히 살아남았던 그이니 아마 당장 죽지는 않을 것이다.
일단은 디아나 자신부터 황궁을 벗어나야 했다.
그래야 위장 신분으로 세력을 쌓아 케이든에게 힘을 실어 주든지, 레베카를 저지하든지 할 수 있을 테니까.
디아나는 애써 미련을 감추며 황궁의 뒷문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 순간,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작은 신음이 예민한 귓가로 파고들었다.
“흐…….”
디아나는 본능처럼 그 신음의 주인을 깨닫고는 그 자리에 그대로 굳었다.
‘……케이든?’
머리로 인지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몸을 홱 돌린 디아나가 신음이 들린 방향으로 빠르게 내달렸다.
주위는 온통 수풀로 무성했다. 디아나는 어쩐지 초조한 기분으로 정신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녀는 마나의 일렁임이 희미하게 느껴지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윽고 디아나는 3황자 궁에서 조금 떨어진 곳, 정원 깊숙한 곳에 멈춰 섰다.
수풀로 향하는 그녀의 손끝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3황자 전하?”
바스락―.
디아나는 자그마한 부름을 내뱉으며 수풀을 걷어 냈다.
그리고 그 직후 저도 모르게 비명처럼 숨을 토해 냈다.
“전하!”
무성한 수풀 뒤. 식은땀에 흠뻑 젖은 케이든이 창백한 얼굴로 누워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