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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4/145)

4화

‘……뭐지.’

디아나가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케이든은 홀로 뻣뻣이 굳은 채 숨을 멈추었다.

제 손에 잡힌 작은 손이 올가미라도 되는 양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때 그의 머릿속으로 한 가지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내가 손을 딱! 하고 잡았는데 그때……!]

[찌릿했어? 찌릿?]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예전에는 이런 감각을 느껴 본 적이 없다, 뭐 그런 말 있지 않냐. 그게 헛소리가 아니라 진짜더라니까? 이건 정말 운명이라는 말밖에는 설명을 못 하겠다, 이 말이야.]

[부러운 새끼. 나 배 아파서 치료받아야 할 것 같으니까 축의금은 따로 안 낸다.]

[뭐 인마?]

어릴 적 근위대의 연무장 앞을 지나다가 주워들었던 말.

그게 하필 지금 와서 머릿속을 가득 메우는 이유는 뭘까.

“저기, 괜찮으세요?”

새삼스러운 눈으로 디아나와 맞잡은 손을 바라보던 케이든이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어느새 걱정스럽게 자신을 살피고 있는 청보랏빛 눈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니야. 이만 가지.”

그 눈을 보자 자신이 무례한 상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케이든은 디아나에게 잡히지 않은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걸음을 옮겼다.

디아나가 걸어 들어온 거리는 그렇게 길지 않았다. 두 사람은 금세 사람들로 북적이는 광장의 가장자리에 다다랐다.

케이든은 디아나의 손을 잡은 채 잠시 머뭇거렸다.

목적지에 다다랐으니 놓아주어야 하는 것이 맞는데도, 꼭 받았던 선물을 빼앗기는 아이가 된 것처럼 그녀의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케이든은 작게 자조하며 천천히 손가락을 떼어 냈다.

그러면서도 손 틈새로 빠져나가는 온기에 순간 움찔하며 디아나를 붙잡을 뻔했다.

케이든은 행여 아쉬움에 휩쓸려 무례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급하게 손을 말아쥐었다.

그는 그녀가 미련 없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돌아서려 하자 급하게 입을 열었다.

“길이 험하니 조심해.”

“네?”

디아나는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레베카가 민심을 사겠다며 내놓은 정책으로 인해 광장은 잘 닦여 반질반질하기까지 했다.

“…….”

“…….”

뒤늦게 자신이 망발을 내뱉었음을 인지한 그가 한 번 더 마른세수를 했다.

“……조심히 들어가라는 뜻이었어.”

“아.”

“그리고 다음부터는 이런 곳에 올 일이 있다면 호위를 대동하는 게 좋을 거야.”

말을 마친 케이든은 민망한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골목 안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디아나는 어쩐지 후드 아래로 비쳤던 그의 목덜미가 빨갛게 달아올랐던 것 같다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서즈필드 저택으로 돌아왔다.

* * *

“어딜 허락도 없이 기어 나갔다가 이제야 들어오는 거니.”

“마님.”

디아나는 레베카가 떠난 것을 확인한 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다가 말고 자작 부인을 마주쳐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하필이면.’

그녀는 자작 부인의 시야에 얼굴이 보이지 않는 자세로 혀를 쯧 찼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자작 부인의 심기가 굉장히 불편해 보였다. 뺨 한 대 정도는 맞아 줘야 할지도 모른다.

‘맞아 본 지가 오래라 아플 텐데.’

레베카의 밑으로 들어간 이후로는 감히 제게 손대는 이들이 없었으니, 이런 상황은 꽤 오랜만이었다.

디아나는 눈을 굴리며 한숨을 삼켰다. 그녀는 다가올 고통을 예견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때 못마땅한 얼굴로 부채를 탁, 접은 자작 부인이 고개를 홱 돌리며 말했다.

“……가주께서 찾으신다. 빨리 올라가 봐라.”

“네?”

그 말에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자작 부인이 눈을 부릅뜨며 호통 쳤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네…….”

“멍청하게 말꼬리 늘이는 꼴 하고는.”

자작 부인은 끝까지 무언가를 트집 잡아 긁어내린 후에야 속이 시원하다는 얼굴로 총총 멀어졌다.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얌전히 서 있던 디아나는 힐라사를 시켜 그녀가 돌아가는 길에 치맛자락을 걸어 넘어지게 하라 지시한 후 위층으로 올라갔다.

‘갑자기 날 왜 부르는 거지? 부를 이유가 없는데?’

자작의 성정에 따르면, 그는 지금쯤 레베카와의 약혼이 성사되었음에 기뻐하며 밀라드와 함께 축배를 들고 있어야 했다. 실제로 과거에도 그러했고.

그런데 지금껏 잊은 것처럼 살던 디아나를 갑자기 불러들이다니.

‘좋은 일은…… 아닐 테고.’

디아나는 미간을 찡그리려다가 가까스로 표정을 가다듬었다.

이윽고 자작의 방 앞에 다다른 그녀가 손을 들어 노크했다.

“디아나입니다.”

“들어와라.”

디아나는 대답이 돌아오자 조용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방 안을 가득 메운 무지갯빛 다이아몬드들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저게 다 얼마야.’

참 유치하면서도 효과적인 과시의 방법이었다.

디아나는 속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도 겉으로는 차분하게 고개를 숙였다.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가주님.”

그때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가주님은 무슨. 아버지라고 불러야지.”

“……네?”

죄송한데, 제 귀가 이상할 리는 없으니 혹시 당신이 돌아 버린 건가요?

……라고 고스란히 내뱉을 뻔했다.

디아나는 제멋대로 날뛰려는 진심을 갈무리하며 황급히 입술을 다물었다.

“크흠, 큼.”

그간 디아나가 창고에 살든 남은 음식을 먹든 방치해 왔던 자작은 저도 민망한지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그것으로 일말의 양심을 깔끔히 털어 낸 그가 진중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디아나 서즈필드.”

디아나의 이름 뒤에 서즈필드의 성을 붙여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두 배로 불길해졌다.

서즈필드 자작은 어울리지 않게 몹시도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네게 혼담이 들어왔다.”

* * *

난 누구, 여긴 어디.

이것만큼 현재 디아나의 심정을 잘 표현해 주는 말은 없었다.

‘기운 없어.’

혼담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다음 날.

디아나는 꼭두새벽부터 조금 전까지 몇 시간 동안이나 시달린 참이었다.

자작 일가가 아니라, 자작의 명에 따라 저택으로 들이닥친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세상에, 도저히 눈 뜨고는 못 볼 꼴이네요. 머리카락부터 다듬어야겠네요. 멜리! 여기 좀 도와야겠다!]

자신을 마담 드슈라고 소개한 여성은, 디아나가 당황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조수들을 향해 손뼉을 짝짝 쳤다.

그 소리를 기점으로 마담 드슈와 조수들의 눈빛이 전투적으로 돌변했다.

그 뒤로는, 뭐…….

가위들 사이에서 떨다가, 수많은 오일과 향유 사이에서 떨다가, 레이스와 줄자 사이에서 떨다가.

마담 드슈가 제 인생의 역작이 탄생했다며 몹시 기뻐하는 모습을 보다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마차의 문이 닫히고 있었다.

[가주님, 잠시만요. 상대가 누구인지도 안 알려 주셨…….]

[어허, 아버지라고 부르래도. 가 보면 다 알게 될 게다. 오늘 밤 들어오지 않아도 좋으니 잘해야 한다.]

자작은 손수건에 눈물을 찍어 내는 시늉을 하며 손수 마차의 문을 걸어 잠갔다.

디아나는 그 모습에 5년 전의 자신을 흉내 내던 것도 잊고 욕지거리를 내뱉을 뻔했다.

과거에는 낌새조차 없던, 갑작스러운 혼담 얘기만으로도 그녀는 적잖이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뭐? 오늘 밤에는 들어오지 않아도 좋아?

그게 아무리 허울뿐이라 한들 아비라는 자의 입에서 나올 말이던가?

‘부술까…….’

디아나는 가느스름한 눈으로 마차의 벽면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곧 눈에서 힘을 푼 그녀가 체념 어린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실 이까짓 마차, 상급 정령의 힘을 조금만 빌려도 단번에 부술 수 있었지만…….

[마녀!]

이전 생, 그녀를 향하던 경멸과 혐오의 시선을 상기하자 마음은 순식간에 잠잠히 가라앉았다.

‘……뭐, 보기 좋지 않은 건 사실이니까. 기록도 없고.’

회귀 전, 부와 권력을 손에 쥔 레베카조차 어둠의 정령사에 대한 정확한 자료를 끝내 찾지 못했었다.

그녀야 어둠의 정령들이 마물과 비슷할지언정 마물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만, 사람들은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드러내 놓고 능력을 사용했다가는 또다시 사특한 힘이라 오해받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적어도 당분간은 아무런 힘도 없는 사생아인 척 몸을 사릴 수밖에. 위장 신분도 못 구했고.

‘뿌리 없는 특별함이란 이상함에 지나지 않으니.’

디아나는 무의식중에 그리 생각하며 애써 머릿속에서 목소리들을 지워 냈다.

한동안 마차의 창밖을 멍하니 내다보고 있자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건 그렇고, 과거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이윽고 차분함을 되찾은 디아나가 의아함에 살포시 미간을 찌푸렸다.

만약 누군가 정말로 제게 혼담을 넣은 것이라면, 그는 아마도 자작에게 무언가를 얻어 내려는 목적일 것이다.

막대한 지참금이라든가, 혹은 그 외의 다른 금전적인 것들.

‘하지만 자작이 나를 위해서 지참금을 내줄 리가 없는데. 대체 누구길래 그렇게 반기는 거지?’

결국 이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려면 상대를 만나 그가 누구인지 알아낼 수밖에 없나.

디아나가 그리 생각하며 한숨을 삼킬 때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착했습니다.”

디아나는 하녀 한 명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는 직후 의아함에 고개를 기울였다.

“가시지요, 아가씨.”

마차가 멈춘 곳은 황궁의 중앙 정원 입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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