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이게 뭐라고 즐겁네.’
빠르고 신속하게 ‘귀찮은 것’을 치우되, 약간의 심술을 섞은 디아나는 조금 상쾌한 얼굴로 저택을 나섰다.
사용인들은 “곧 1황녀 전하께서 방문하실 텐데!” 하고 밀라드를 챙기느라 정신이 없어 그녀가 저택을 빠져나가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레베카가 나를 알아보고 제 수족으로 데려가려 하는 일은 없겠지.’
이곳은 황궁과 서즈필드 저택의 반대편에 있는 광장이었으므로, 황녀의 행렬을 마주칠 걱정은 없었다.
디아나는 제 눈앞에 펼쳐진 드넓은 광장을 바라보며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이제 한 발.’
이제야 겨우 레베카를 무너트리기 위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디아나는 제 얼굴을 절반쯤 가린 후드 아래로 눈을 깜박였다.
‘우선 위장용 신분부터 구할까. 지금의 내가 실명을 내걸고 1황녀를 공격하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으니…….’
어차피 레베카가 서즈필드 저택을 떠나길 기다리는 사이에 달리 할 일도 없었다.
5년간 레베카의 그림자로 살아온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디아나는 제가 앞으로 할 일에 필요한 뒷골목의 세력을 대부분 알고 있었다.
마침 여러 잡다한 일을 처리하기 적당한 곳이 하나 있었다.
목적지를 결정한 디아나는 가볍게 어깨를 돌려 몸을 푼 후 어둑한 골목 쪽으로 걸음을 떼었다.
뒷골목의 어둠은 겨울의 칼바람보다도 차가웠다.
뒷골목에서 어슬렁거리던 몇몇 이가 클로크를 뒤집어쓴 채 걷는 디아나를 힐끗 일별했다.
디아나는 사람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머릿속으로 길을 되짚으며 발을 재촉했다.
이질적인 신음이 귓가를 파고든 것은 그때였다.
“끄윽…….”
멈칫한 디아나가 발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골목의 저편, 누군가에게 잔뜩 얻어맞은 듯 엉망인 소년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온몸에 피멍이 든 채 바르작거리던 소년이 디아나의 기척을 알아챈 듯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일그러진 얼굴의 그가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도, 도와주세요…….”
뭇사람의 눈에는 애처롭게 보일 것이 분명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디아나는 제자리에 선 채로 무심히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왜?”
“……네?”
소년은 전혀 예상치 못한 답에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러나 디아나는 차분히 그의 앞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어. 원래 타인의 호의와 인정을 얻으려면 그만한 쓸모가 있어야 한단다. 그게 아무리 작고 하찮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말이야.”
“뭐…….”
“그리고.”
디아나는 태연히 소년의 말을 끊으며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깊이 눌러쓴 후드 자락 아래로 청보랏빛 눈동자가 유순하게 휘어졌다.
“여기서 위험에 처한 건 내가 아닐까? 네가 아니라.”
그 말에 소년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표정이 씻겨 나갔다.
디아나의 뒤편에서 밧줄과 무기 등을 들고 접근하고 있던 부랑자들 또한 움찔 굳었다.
‘유로가 좋아하겠네. 오랜만에 포식한다고.’
디아나는 대수롭지 않게 마력을 움직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처음 뒷골목에 발을 들일 때부터 이런 상황은 예상했다.
이 정도는 그녀가 레베카의 밑에서 구르며 본 광경 중에서도 가장 흔하디흔한 것이었다.
이윽고 그녀가 어둠의 상급 정령인 ‘유로’를 불러내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이었다.
“엘판드.”
낮은 부름이 허공을 울렸다.
디아나가 눈을 크게 뜨며 뒤를 돌아보는 순간 부랑자들이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악!”
“이, 이게 뭔…… 아악!”
“상급 정령사라니, 저딴 놈이 왜 여기……!”
고개를 돌린 디아나의 시야에 흰 털을 가진 표범들이 부랑자들을 물어뜯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 태양만큼이나 환한 흰빛의 활을 쥐고 있는 인영 또한.
“거기, 고개 숙여.”
디아나와 마찬가지로 후드를 깊게 눌러쓴 이에게서 나직한 말이 흘러나왔다.
그녀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는 것과 동시에, 그가 팽팽히 당기고 있던 활시위에서 손을 뗐다.
흰 빛줄기가 귓가를 스쳐 지나가며 연분홍빛 머리카락을 팔랑 흩날렸다.
퍽―.
“커헉!”
디아나의 뒤에서 단검을 휘두르려던 소년의 가슴에 화살이 정확히 명중했다.
그 충격에 소년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잘했다, 엘판드.”
남자의 손에 들려 있던 활이 빛으로 스르륵 흩어졌다.
그는 어느새 부랑자들을 기절시키고 제게로 돌아온 빛의 상급 정령, 엘판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디아나는 제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입을 작게 벌린 그녀는 멍하니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엘판드를 소환 해제한 남자가 그제야 미동 없이 주저앉아 있는 디아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봐. 괜찮나?”
차마 잊을 수 없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심장이 쿵, 묵직한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케이든?’
툭―.
그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미처 막을 새도 없이 디아나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그것을 본 케이든의 눈이 커다랗게 부푸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아니, 잠깐. 왜 우는……. 어디 아픈가? 다쳤어?”
케이든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디아나에게 다가왔다.
안절부절못하던 그가 디아나에게로 몸을 숙이며 어르듯 말했다.
“어딘데. 아프게 안 할 테니까 상처 좀 봐도 되나? 응?”
디아나는 한순간 자신도 까닭 모를 눈물에 당황했다가, 죽기 직전과 한 점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저를 걱정하는 그의 모습에 끝내 웃어 버렸다.
“……아니요. 괜찮아요.”
디아나는 눈물 젖은 눈으로 설핏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손을 내려 구겨진 옷가지를 툭툭 정리했다.
이윽고 매무새를 가다듬은 디아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에 맞추어 케이든 또한 그녀를 탐색하듯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디아나는 어느덧 물기가 사라진 눈으로 제 앞에 선 케이든을 향해 방긋 웃어 보였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로. 무사하면 됐어.”
케이든은 어딘지 미묘한 기분에 눈썹 끝을 살짝 일그러트리며 깔끔히 답했다.
그사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잠시 자취를 감추었던 디아나의 이성이 돌아왔다.
그녀는 뒤늦게 찾아든 의문에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런데 상급 정령사께서 이런 곳까지는 어쩐 일이세요?”
“아.”
잠시간 기묘한 느낌에 사로잡혀있던 케이든이 그 물음에 정신을 차렸다.
그는 제 발치에 널브러져 있는 부랑자를 발끝으로 툭 찼다.
“이놈들 때문에. 수법도 악랄하고 최근에 수도에서 악명이 자자한 놈들이라 현상금이 꽤 붙었거든.”
케이든은 흡사 악당같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엄지와 검지를 붙여 동그라미 표시를 만들어 보였다.
그에 디아나는 뒤늦게나마 잊고 있던 사실 하나를 떠올렸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시기의 케이든은…….’
돈이 없었지.
그것도 좀 많이.
‘1황비의 짓이었던가.’
레베카의 친모인 1황비는 명망 높은 공작가 출신이며, 현재 실질적으로 황궁의 내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본디 각 궁에 예산을 분배하는 것은 황후의 역할이나, 현 황후는 타국 출신이기에 제국 내에서의 입지가 좋지 않았다.
그러니 황궁의 실세나 다름없는 1황비가 궁에 배정되는 예산에 장난질을 좀 친다 한들 그 누가 막아서겠는가.
비록 빛의 정령사인 케이든이 황가의 정통성 면에서는 레베카보다 앞선다고 하나, 그 외의 부분에서는 아직 레베카가 우위에 서 있었다.
케이든의 친모는 황궁의 하녀 출신인 탓에 그에겐 확실한 외가가 없었으니까.
디아나는 회귀 전의 기억을 끌어 와 그 안에서 케이든에 관련한 것을 찾았다.
‘위버 공작가에서 도움을 주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쪽은 아직 1황자의 세력이라고 봐야 하고. 샐티스 후작가가 궁 하나를 챙길 정도로 재정 형편이 좋은 편은 아니니…….’
전에는 관심을 두지 않아 몰랐는데, 지금 보아하니 케이든이 부족한 예산을 메꾸기 위해 직접 뛰어다녔던 모양이다.
디아나에게는 그 사실이 참으로 새삼스러웠다.
제 수족을 챙기기 위해서 직접 뒷골목을 뛰어다니는 황족이라니.
‘그’ 케이든이니 그러려니 싶다가도, 만년설로 뒤덮인 설산 같았던 레베카를 상기할 때마다 참 황족답지 않은 황족이라는 감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때 케이든이 디아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달리 다친 곳이 없다면 그대는 이만 이곳을 벗어나는 게 좋겠어. 나는 이놈들을 경비대에 넘겨주러 가야 해서.”
“아, 네.”
생각에 잠겨 있던 디아나는 불쑥 들린 목소리에 당황해 얼결에 그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이 너 나 할 것 없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뭐지?’
디아나는 한순간 케이든의 손을 뿌리칠 뻔한 것을 간신히 참고는 맞잡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후드에 가려진 청보랏빛 눈동자가 당혹감으로 떨렸다.
케이든과 손이 맞닿는 순간,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각이 온몸을 휘감았다.
안온함. 혹은 편안함.
그런 종류의 것이라는 말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마치 처음부터 있어야 할 자리에 돌아온 듯한 감각.
‘……설마 정반대의 속성이라서 그런 건가?’
디아나는 혼란스러운 와중 머리를 관통하는 한 가지 가정에 눈을 깜박였다.
케이든은 건국 이래 가장 밝은 빛을 타고난 정령사.
디아나는 아마도 건국 이래 가장 짙은 어둠을 타고난 정령사.
그것을 상기하니 영 의미 없는 가정은 아닌 듯싶었다.
‘불과 물이라든가, 다른 속성끼리는 이런 작용이 있다는 말이 없었는데.’
하긴. 건국 신화에서 첫 ‘어둠’ 속성의 정령사가 지워진 이후로는 디아나가 두 번째일 터였다.
그간 어둠 속성의 정령사라는 것이 존재하질 않았으니, 이런 작용에 관한 연구나 말도 없을 수밖에.
‘잘은 모르겠지만 대충 긴장감 완화, 심리적 안정감…… 뭐 그런 거겠지.’
회귀 전 레베카를 통해 이것저것 주워들은 것이 있는 디아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충 납득했다.
그러나 본 것도 들은 것도 없는 케이든은 난생처음 겪는 감각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