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45)

2화

[연지곤지]

“헉!”

부지불식간에 정신이 들었다. 폐부로 한순간에 공기가 밀려들었다.

“콜록, 콜록! 흐…….”

디아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거칠게 기침했다.

몸을 옆으로 돌린 그녀가 무의식중에 손을 들어 올려 제 목을 더듬댔다.

‘왜 목이…….’

붙어 있지?

그런 의문이 떠오른 순간 반사적으로 눈이 번쩍 떠졌다.

디아나는 제 얼굴에 닿아 오는 푹신한 천 위로 손을 짚으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내 방…….”

혼란스러운 중얼거림이 잇새로 새어 나왔다. 청보랏빛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퀴퀴한 먼지 냄새가 흐리게 코를 찌르고, 창밖의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비쳐 드는 방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언뜻 보면 창고라고 착각할 법한, 실제로도 창고나 다름없는 용도로 쓰이는 작은 방.

이곳은 서즈필드 저택에서 디아나가 사용하던 방이었다.

그러니까…… 5년 전까지는, 말이다.

‘내가 레베카의 밑으로 들어가고 나서는 침대를 없애고 아예 창고로 쓰는 것으로 아는데?’

이건 꿈인가? 디아나는 혼란스럽게 눈을 끔벅이다가 손을 앞으로 뻗었다.

손바닥을 위쪽으로 한 그녀가 마력을 움직이며 입을 열었다.

“힐라사.”

나직한 목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직후 그녀의 손바닥 위 허공으로 검은색의 작은 먼지 공들이 퐁퐁 솟아났다.

이내 허공에는 총 열 개의 먼지 공이 생겨났다. 놀랍게도, 그저 먼지처럼 보였던 그것들에 하나둘 단추 같은 눈이 생기고 실 같은 팔다리가 생겨났다.

삐이! 삐이익!

어둠의 하급 정령인 힐라사들이 침대 위로 툭툭 떨어졌다.

이불 위를 데구루루 구른 그들이 하나둘 디아나의 옆으로 몰려들어 삐유삐유 울었다.

‘마력을 움직일 때의 감각이 생생해. 이걸 보면 꿈은 아닌 것 같은데…….’

어미를 잃은 아기 새처럼 서럽게 울어 대자 디아나가 난처한 웃음을 지으며 제 손가락을 내주었다.

“그래, 나야. 잘 있었어? 이게 무슨 상황인지를 모르겠어서 얼마나 오랜만인 건지 모르겠네.”

삐익!

“……아, 밥 달라고?”

디아나는 조금 머쓱해졌다.

힐라사에게 뻗은 손을 거두어들인 그녀가 엄지와 중지를 맞부딪혀 딱! 소리를 냈다.

그러자 허공에서부터 작고 검은 꽃잎들이 팔랑거리며 떨어졌다.

힐라사들은 삑삑 울며 꽃잎을 하나씩 잡아채더니 제 몸집보다도 크게 입을 벌려 그것을 삼켰다.

언제 보아도 참 적응 안 되는 광경이었던지라 디아나는 마력을 갈무리하며 한숨을 삼켰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그녀가 힐라사들을 향해 말했다.

“이제 좀 마음이 풀렸어? 그러면 나 달력 좀 가져다줄래? 여기는 너무 오랜만이라 뭐가 어디 있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나네.”

삐유우!

디아나의 마나로 만들어진 꽃잎으로 포식한 힐라사들이 기분 좋게 울고는 침대에서 내려갔다.

방구석을 뒤진 그들이 이내 종이 한 장을 찾아내 그것을 디아나에게까지 종종종 운반해 왔다.

“고마워.”

짧게 감사를 표한 디아나가 달력으로 시선을 내렸다.

손끝으로 종이에 표시된 가위표를 더듬어 내려가던 그녀는 다음 순간 잠시 숨을 멈추었다.

‘……867년.’

청보랏빛 눈동자가 한차례 크게 흔들렸다.

디아나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제 목을 만지작거렸다.

목덜미에서 맥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손끝에 닿는 피부가 따스하다.

아직도 제 목이 떨어지던 순간의 감각이 섬뜩하리만치 생생한데.

‘발하나스력 867년이면…… 5년 전이잖아.’

5년 전 날짜의 달력.

5년 전까지 제가 쓰던 방, 침대.

무언가 기시감을 느낀 디아나가 몸을 일으켜 창밖을 내다보았다.

본채의 뒤편, 사용인들이 손님맞이라도 준비하는 양 바삐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기억처럼 날은 쾌청하기 그지없었다.

‘이게 다 우연일까?’

표정을 굳힌 디아나는 몸을 돌려 방구석에 있는 거울을 찾았다.

거울을 뒤덮고 있던 천을 붙잡아 끌어내린 직후, 그녀는 저도 모르게 탄식 같은 숨을 내뱉었다.

“……아.”

떨리는 손가락이 천천히 거울 위에 내려앉았다.

엉망으로 갈라지고 피딱지가 앉은 얼굴이 아닌, 푸석하지만 앳되고 동글동글한 얼굴. 관리가 되지 않아 엉망으로 흘러내린 긴 연분홍빛 머리카락.

스무 살 디아나 서즈필드의 얼굴.

손끝에 닿는 까슬까슬한 먼지의 감촉이 선명하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로 인해 발이 아려 왔다.

이것이 현실이라는 걸 깨닫자, 우습게도 죽기 전의 기억이 더욱 선명해졌다.

디아나는 거울에 이마를 기댄 채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

‘……레베카.’

만약 지금이 정말 과거라면.

정말로 당신과 내가 처음 만났을 때의 과거로 돌아온 거라면.

‘나는…….’

한번 나를 버렸던 당신을 다시 사랑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거울에 비친 청보랏빛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몸을 돌려 방을 가로지르는 그녀의 그림자 속으로 힐라사들이 소리 없이 스며들었다.

* * *

“이 시간에 어딜 가는 거냐, 디아나.”

디아나는 낡은 클로크를 뒤집어쓴 채 저택의 쪽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다 말고, 들린 목소리에 우뚝 발을 멈췄다.

그녀는 고개를 틀어 본채의 뒷문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러자 열린 문 너머, 잘 닦인 계단을 밟고 내려오는 청초한 인상의 미청년이 눈에 들어왔다.

연한 밀크캐러멜 색의 단정한 머리카락. 디아나의 것보다도 색이 옅은 청보랏빛 눈동자.

그는 디아나의 이복형제이자, 서즈필드 자작가의 후계자인 밀라드 서즈필드였다.

“오늘이 어떤 날인지 모르지는 않을 텐데. 그런 차림새로 돌아다니다가 1황녀 전하의 눈에 띄기라도 하면 그분께서 서즈필드 가문을 뭐라고 생각하시겠어.”

심히 청초하고 유한 인상의 밀라드였지만, 디아나를 보는 시선은 한겨울의 서릿발보다도 차가웠다. 그는 짐짓 점잖은 태도로 디아나를 나무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디아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속으로 중얼댔다.

‘바로 그 1황녀 전하와 마주치지 않으려는 거랍니다.’

회귀하기 전.

레베카 듄 블루벨이 서즈필드 자작 저에 방문하였다가 우연히 디아나를 만나게 된 건 저 ‘도련님’ 때문이었다.

현 서즈필드 자작은 본디 상인이었다.

그가 디아나의 어머니와 만나게 된 것도 거래를 위해 잠시 지나던 마을에서였다.

하지만 그는 이후 불모지로 알려져 있던 동토에서 오페라 다이아몬드 광산을 발굴해 낸 후,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하며 자작위를 사들여 귀족의 신분이 되었다.

귀족이 된 서즈필드 자작은 시골 마을로 돌아가지 않고 귀족가의 여식, 즉 현 자작 부인과 결혼하는 길을 택했다.

이 시대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돈 많고 명예욕이 있는 하급 귀족. 레베카의 눈에는 좋은 먹잇감이었겠지.’

1황녀 레베카 듄 블루벨은 현시점에서 3황자를 제외하고서 황위를 계승할 확률이 가장 유력한, 영향력 있는 황족이었다.

레베카는 보다 확실히 황위를 계승하기 위해서 서즈필드가 가진 무한대에 가까운 부에 눈독을 들였고, 서즈필드 자작은 차기 황제가 될지도 모르는 그녀와 연을 쌓아 가문의 격을 드높이고 싶어 했다.

두 사람이 그 결과로 고안해 낸 것은 가장 고전적이고도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바로 결혼.

‘물론 약혼에 그쳤지만…….’

후일 레베카는 밀라드를 유혹해 서즈필드가의 재산을 남김없이 빼먹고 난 후 그들을 죽여 버린다.

제 수족이 된 디아나를 위한 복수라는 부가적인 이유도 다소 반영된 일이었지만.

무엇보다도 레베카가 처음부터 서즈필드와의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다는 점이 핵심이었다.

‘이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마냥 좋다고 웃기만 했으니.’

“어서 네 방으로 돌아가라. 황녀 전하께서 이곳에 계시는 동안 코빼기도 내밀어서는 안 된다는 것, 잊지 않았겠지.”

1황녀와의 약혼 문제를 마무리 짓는 날이니만큼, 밀라드는 평소보다도 훨씬 열심히 때를 빼고 광을 낸 생김새였다.

여느 귀공자들보다도 빼어난 미모의 그가 시선을 내리며 은근히 위협하듯 말하자 알게 모르게 주변의 공기가 가라앉는 듯한 착각도 일었다.

하지만 디아나는 고개를 숙인 채 애잔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하나도 안 무서울 수가…….’

레베카의 검으로, 수족으로, 그림자로 장장 5년을 살아오며 손에 수도 없이 피를 묻혔던 디아나다.

회귀하기 전에는 밀라드와 감히 시선조차 맞추지 못했다지만, 현재의 그녀에게 그의 위협은 우습지도 않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당장 죽여 버릴 순 없으니까.’

만약 내키는 대로 밀라드를 죽여 버렸다가는 곧장 경비대에 잡혀 죽을 것이다. 그런 것은 디아나가 원하는 일이 아니었다.

‘당신이 나를 한 번 버렸으니, 나도 당신을 한 번 버려야 공평하겠지.’

머리를 덮은 후드 자락 아래로 그녀의 눈이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레베카가 그렇게 바라 마지않던 황위가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는 것을 보게 만들고.

종내에는 모든 걸 잃은 그녀의 목숨을 손수 거두는 것.

그것이 디아나가 다짐한 이번 생의 목표였으니까.

“죄송해요, 도련님.”

그러기 위해서 우선은 눈앞의 귀찮은 것을 치워야 했다.

디아나는 최대한 기억을 되살려 5년 전의 자신을 흉내 냈다.

“1황녀 전하의 행렬을 먼발치에서나마 구경하고 싶었는데 역시 제 주제에는 맞지 않는 일이겠죠. 멍청한 제가 자작님과 도련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나돌아 다녀 죄송합니다. 이대로 방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눈을 비스듬히 내리깔고 조용조용 답하자 밀라드의 눈에 만족스러움이 배어났다.

“그래. 주제 파악이라도 잘해서 다행이군. 그럼 가 보마.”

“네, 도련님.”

디아나는 사생아답게 연신 고분고분했다.

그 모습에 밀라드는 흡족한 얼굴로 몸을 돌려 다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공손히 허리를 숙인 채 눈을 내리깔고 있던 디아나의 치맛자락이 살랑 흔들린 것은 그때였다.

콰당!

“아아악!”

막 발을 떼던 밀라드가 커다란 소리와 함께 넘어지더니 그대로 계단에 얼굴을 박았다.

그 비명에 사용인들이 기겁하며 달려왔다.

“세상에, 도련님!”

“주치의를 불러와, 어서!”

“아악! 내 코! 내 코가……!”

밀라드는 코피가 줄줄 흐르는 양 콧구멍을 막느라 정신이 없었다.

신경 써서 차려입었던 옷은 피범벅이 되어 차마 눈 뜨고는 못 봐 줄 만한 몰골이었다.

사람들은 난리를 피우는 그에게 정신이 팔려, 발밑으로 작은 먼지 공들이 데구루루 굴러가는 것을 미처 보지 못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