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끼이이익—
문을 열지 못한 지 3일째, 굳게 닫혀 있던 뒷문이 열리며 날카로운 소음을 만들어 내었고 그 사이로 어두컴컴한 건물을 밝히는 등불 빛이 새어 들어왔다.
끽-끼익—
소음을 줄이기 위해 두꺼운 천 재질의 신발로 바꾸어 신기까지 했는데, 낡은 나무판자들이 뒤틀리는 소리는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을 보니 소용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 덕에 클럽에 들어선 검은 그림자는 몇 번이고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젠장,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야?’
몰락하긴 했어도 아직 이름은 남작 가문이었건만, 지금 이 모습은 거의 좀도둑 못지않았다.
뒤꿈치를 들고서 조심스레 발걸음을 떼는 그의 노력에도 레이즌의 로비와 뒷문을 잇는 복도를 걷는 동안 그 소음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후우…….”
1층 로비에 들어서자 발걸음 소리는 현저히 줄어들었고 남작은 그제야 한숨을 돌린 뒤 겉옷 주머니에 손을 넣어 유리병을 만지작거렸다.
‘이 일만 끝마치면 된다.’
후작이 이번 일에 건 돈의 액수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 정도 액수면 남작가가 진 빚을 모두 갚고도 생활비로 사용하기에 충분했다.
겉보기엔 쉬워 보이는 일에 그런 큰돈이 걸린 것이 아주 조금 불안하기도 했지만,
‘내 명예! 내 영광!’
그 모든 것들을 돌려받을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지 하겠다고 다짐하며 2층을 향하는 계단에 발을 디뎠다.
하나, 둘, 셋…….
초조해진 마음속으로 계단을 세며 걸어 올라가자 마찬가지로 어둠에 휩싸인 2층의 모습이 보였다.
팔을 뻗어 등불을 멀리 들이밀자 며칠 전과 변한 것이 없는 가게의 모습을 희미하게 볼 수 있었다.
남작은 그중 가장 가까운 테이블에 다가가 등불을 올려놓고는 주머니에서 빼낸 유리병을 바라보았다.
‘이 일만 마무리하면 남작가는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거야.’
비열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심호흡을 한 남작은 이내 유리병을 세게 움켜잡았고 그가 그것의 마개에 손을 가져다 댄 순간.
“거기까지.”
어둠 속에서 들려온 스산한 목소리에 남작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오른손으로 더듬거리며 탁자 위 올려 둔 등불을 잡아채 소리가 나는 쪽으로 그것을 들이밀었지만 꽤나 멀리 떨어져 있는 건지 목소리의 주인공은 보이지 않았다.
“누, 누구야!”
허공을 향해 내지른 목소리가 떨려 왔다.
그런 그의 외침에도 어둠 속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저 재미있다는 듯 작은 웃음을 내뱉으며 남작을 향해 다가왔다.
‘들킨 건가? 그럼 내 돈은? 내가 되찾아야 할 명예는?’
절대 들켜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던 후작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남작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유리병을 쥐었고 이제는 새하얘져 어떻게든 일을 완수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남지 않은 머리를 굴리다 이내 재빠르게 마개를 빼냈다.
‘일단 일은 끝마쳐야 해.’
자신 앞에 서 있는 이들이 누군지는 몰라도 후에 후작에게 말해 적당히 회유하면 될 것이다.
‘약속된 보수가 깎일 수도 있겠지만 한 푼도 받지 못한 채 쫓겨나는 것보다야 나을 테지.’
하지만 마개를 빼낸 유리병 속 액체를, 남작은 결코 바닥에 뿌릴 수 없었다.
‘……어?’
어느새 제게 다가온 이의 그림자는 남작의 손목을 붙들었고 그 뒤로 몇 사람이 붙어 그를 제압했다.
그 동작이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나 남작은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대체 이게 무슨…….’
망토를 깊게 눌러쓴 목소리의 주인공과 그의 뒤를 따르는 두 명의 사람들이 등불에 가까워지자 점차 그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처음 자신에게 말을 건 남성의 망토에는 뚜렷한 황금빛 문양이 반짝이고 있었다.
“생각 하나는 참 단순하네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렇게 읊조리며 얼굴의 절반을 가리던 망토의 모자를 벗어 버렸고 그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선명해진 문양은 남작에게까지 닿았다.
황금빛 문양.
이 제국에서 단 한 곳에서만 사용되는 색.
“화, 황실!”
그의 외침에 남성은 남작의 손목을 쥐던 손의 반대 손으로 남작의 손에서 유리병을 빼앗았다. 그 곁에 있는 이들은 남작의 손에 금빛 사슬을 둘렀다.
마법사인가?
황실조차 계획에 없던 일이었는데 마법사는 또 웬 말인가.
놀라 입을 틀어막은 남작의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 왔지만 그런 남작의 앞에 선 남성의 눈동자에는 조금의 흔들림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 싸늘한 눈동자를 마주한 남작은 그제야 그가 누구인지 떠올릴 수 있었다.
자신과 몇 번 이름을 들은 적 있는 사이. 꽤 이름을 날리는 아카데미의 학생이었으나 몇 년 전 자취를 감춰 버린 남자.
데일 호른.
“익숙한 얼굴이네.”
데일의 입가에는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미소가 걸렸지만, 그것도 잠시.
“이렇게 마주하는 걸 원하지는 않았지만, 이 사건의 총책임자이자 조금 전 일의 목격자로서.”
남작을 내려다보는 그의 검은 눈동자가 살벌하게 빛났다.
“파르트 남작, 황실로 가 줘야겠네.”
그 말을 끝마치자마자 그의 뒤에 자리 잡고 있던 두 사람은 이미 다리가 풀려 덜덜 떨고 있는 남작의 양팔을 잡아당겼다.
“아아…… 아아아아!”
팔을 붙잡힌 채 몇 걸음 나아가던 그는 그제야 제정신이 들었는지 건물 안이 떠나가라 미친 듯이 절규했지만, 그를 끌고 가는 이들은 별 감흥도 없다는 듯이 조용히 그를 밖으로 데려갔다.
그들을 흐릿한 눈으로 바라보던 데일은 자신 손에 들린 유리병을 바라보았다.
무엇인가 섞인 듯 탁한 물이 그 안에서 찰랑였다.
‘기분 나쁘네.’
쯧, 하고 혀를 찬 데일은 먼저 밖으로 나선 기사들을 따라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