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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 나는 당신이 싫어 (51)화 (51/61)

〈51〉

조용히 황태자에게 고개를 숙인 그의 보좌관은 이내 방을 나섰고, 그 덕에 그 방에는 우리 둘만이 남겨졌다.

“오랜만입니다, 영애.”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어색하게 웃고 있자 그 역시 비슷한 분위기 아래 질문을 던졌다.

“레이즌에 문제가 생겼다고 들었습니다.”

헤일론이 가볍게 던진 한마디가 오늘 내게는 조금은 무겁게 다가왔다.

‘완벽하기까진 바라지도 않았는데, 역시나 한심하기 짝이 없군.’

그의 말과 주변 배경이 옛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이유 때문이려나.

이전 생에 보았던 때와 지나치게 일치하는 지금의 배경부터 헤일론, 그의 모습까지도 그때와 똑같았기에 작게나마 힘이 들어간 두 손을 뒤로 숨겼다.

헤일론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 내게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며칠 뒤에 이 일에 대한 재판이 열릴 겁니다. 그리고 아마, 지금 상황에서 무죄로 판명 나기는 어렵겠지요.”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저는…….”

답을 하는 목소리가 주저됐다.

왜?

“혹 영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쿵—

심장이 세게 한번 내려앉으며 조금 전 그 물음의 답이 떠올랐다.

이전 기억 때문만은 아니었구나.

‘지금 이 상황이 무서운 거야.’

이곳은 지난번 일어났던 사건과는 달랐다. 아무도 내 주변에 없고 그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홀로 낭떠러지를 바라보며 움직이지도 못한 채 떠밀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곳에 비전하의 편은 없지 않습니까.’

이전 생에 그녀의 가슴을 후벼 판 헬렌의 말과 겹쳐지는 상황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진정해야 됨을 알면서도 그리 쉽사리 마음이 가라앉혀지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자꾸만 제 앞의 헤일론에게 시선이 갔다.

지난번에 이어 이런 모습들이 보일 때면 꼭 그가 있었다.

이곳에 돌아와, 많은 것을 바꾸며 행복하게 잘 사는 모습만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그가 룬이란 사실을 안 순간 역시 마음이 불편했었다. 그것을 알든 몰랐든 그의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인 것이니까.

‘아직도 똑같구나.’

소심하고 두려움 많은 성격은 잘 고쳐지지도 않았다.

나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은 그리 한순간에 변하지 못한다는 걸.

나는 아직도 한참 부족하고 약하다는 걸.

그래서 더욱 강인해지기 위해 악착같이 살아가고 있는데, 매번 그 노력들은 저 사람 앞에서만 무너져 내렸다.

“아쉽게, 황실에서 도움을 요청할 사람은, 없네요.”

담담하게 이야기하기를 원했지만, 그 짧은 한마디를 내뱉는 동안에도 몇 번이고 숨을 가다듬었다.

“저 혼자 해 보아야죠. 어떻게든.”

“……힘들 겁니다.”

툭, 이리저리 흔들리던 감정이 그 한마디에 울컥 북받쳐 올랐다.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먹먹해진 목소리는 더는 말을 뱉지 못했고 시야가 점차 흐릿해지던 찰나, 내 위에서 다시 고저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가 도와도 되겠습니까?”

“……네?”

놀란 마음에 그의 말을 되묻자 그는 다시 한번 그 말을 반복했다.

“제가 영애를 돕고 싶습니다. 영애가 이번 일을 해결할 수 있도록.”

“……?”

“허락해 주신다면 좋겠네요.”

그렇게 말한 헤일론은 옅게 웃으며 제 보좌관을 불렀다.

“자, 잠깐만요!”

당황한 나는 예법도 잊어버린 채 그를 급하게 불러 세웠다.

“지금, 그게 다 무슨 소리예요?”

“……말 그대로입니다. 영애는 아마 재판까지 이곳에서 수많은 기사들의 통제를 받을 겁니다. 자료는 물론이거니와 어떤 상황인지조차 제대로 설명해 줄 사람을 찾기 힘들 테고요. 그러니 그 점에서 제 사람들, 제 정보 혹은 그 외의 것들을 이용하라는 말입니다.”

“……왜요?”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언제나 내 반대편에 서서 나를 밀어붙이던 그였는데, 갑자기 왜 나를 돕는지, 내 편이 되어 주겠다고 말하는지.

내 질문에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가볍게 웃어 보이며 답했다.

“영애가 범인이 아닐 거라 생각하니까요.”

그렇게 말한 그는 미련 없이 방을 떠났고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멍하니 그가 열고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조금 전 사라졌던 그의 보좌관이 내게 다가왔다.

“전하께 청하고 싶으신 것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제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라고 말하면서.

‘내가 범인이 아닐 거라고…….’

이 호의를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잠시 고민이 되었다.

‘헤일론…… 그에게 받은 도움이 몇 번이나 되더라.’

이상하고 어색하다. 그가 내 편에 서 있는 게.

가슴 깊이 어딘가 울렁거렸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준다는 걸 굳이 사양할 이유도 없잖아.’

애초에 내겐 더 이상 피할 곳도 그럴 시간도 없었다.

이대로 감옥 생활을 할 생각은 없어.

어떻게 키워 낸 두 번째 삶인데 컴컴한 감옥에서 이 아까운 시간을 허비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일단 이곳에서 나가는 것만 생각하자.

“그러면 저기…….”

“데일이라 부르세요.”

“아, 그럼 데일. 첫 부탁을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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