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쪽을 바라보던 이가 성큼성큼 이곳으로 다가왔다.
바람에 흔들리는 흑발 아래로 보이는 푸른 눈동자가 올곧게 제게 향해 있었다.
“제국의 두 번째 태양을 뵙습니다.”
그 눈길에 놀란 것도 잠시, 나는 고개 숙여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영애가 여긴 어떻게.”
‘아, 내가 초대받았다는 사실을 모르는구나.’
그 생각과 함께 고개를 들고서 그의 말에 답하기 위해 입을 떼어 냈으나 먼저 앞으로 한 발짝 나선 황녀가 입을 열었다.
“내 손님이야. 이번 티 파티의. 그래서, 무슨 일인데?”
딱딱하고 차가운 말투의 목소리에 잠시 의문이 생겼다.
분명 조금 전 나와 대화할 때까지만 해도 헤일론을 엄청 아끼는 듯이 보였는데 왜 그의 앞에서는 저렇게 매서운 눈빛이 될까?
그런 의문을 열심히 끌어안았으나 나와 달리 익숙하기만 한 헤일론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이후 황녀의 물음에 제가 걸어온 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건의서가 온 것 같던데, 이번 행사 일로.”
그녀를 본 순간부터 단 한 번도 미소를 잃지 않던 황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이번 행사라 하면, 황녀가 주최하던 연회인가?’
“정말이야?”
“응.”
“하…….”
한숨을 내쉰 황녀는 이내 휙 뒤를 돌아 내 손을 잡았다.
“미안해요, 영애. 내가 일이 있어서 먼저 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축 처진 황금빛 두 눈동자가 노을빛을 머금어 한층 더 청초해 보였다.
“괜찮습니다. 이미 시간도 많이 늦었는걸요.”
어차피 나 역시 곧 돌아가려 했었기에 별 상관은 없었다.
“다음에 봐요. 꼭 다시 부를게요.”
“네, 기다리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내게 미소를 지어 보인 황녀는 급히 발길을 돌려 정원을 벗어났다.
‘이제 나도 돌아갈까.’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던 찰나,
“영애.”
헤일론의 부름에 다시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네, 전하.”
“목은 좀 괜찮아졌습니까.”
무뚝뚝한 표정은 여전했지만 당시 목걸이에 쓸린 상처에 시선이 고정된 것이 보였다.
‘걱정, 인 건가?’
“네, 많이 나아졌습니다.”
“일전의 일은, 잘 해결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예, 도와주신 덕에요.”
예를 지키는 선에서 대답을 이어 나가자 몇 가지를 물어보던 그는 곧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내가 묻자 그는 자신이 저를 바라본 줄도 몰랐다는 듯이 눈을 깜박였다.
“아, 죄송합니다. 잠깐 다른 생각이 들어서.”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이만 돌아가 보아도 괜찮을까요?”
나는 내 마차가 기다리고 있을 뒤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 돌아가시나요.”
그 말을 하는 그의 푸른 눈동자는 어째서인지 조금 힘이 풀린 느낌이었다. 그의 몸짓도 전체적으로 가벼운 느낌이었다.
‘황태자가 영애에게 조금 더 신경을 쓰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왜 지금 상황에 그 말이 다시 떠올랐는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말도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순간만큼은 정말로 그가 나를 신경 쓴다고 착각한 건지도 몰랐다.
꾹, 모아 쥔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쫓을 땐 날 피하던 사람이, 그를 피하려는 시점부터 저를 신경 쓴다니, 이만큼 우스운 상황이 또 있을까 싶었다.
인상을 쓸 뻔한 것을 참아 넘기고서 최대한 안면에 미소를 띠었다.
“네, 시간이 늦었으니까요.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 말만을 마치고 휙 뒤를 돈 내가 마차가 있는 곳으로 발길을 떼어 낸 순간.
“바래다주어도 괜찮겠습니까.”
역시나 그의 목소리였다.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어떤 답이 돌아오든 그것을 수락하게 될 것 같았기에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러세요.”
꽤 무례하다고 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그는 별 상관하지 않는지 그저 천천히 내 곁을 걸을 뿐이었다.
우리는 마차가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걷기 시작했다.
어떤 말도 오가지 않는 두 사람 사이에는 정원의 사그락거리는 잔디 소리만이 맴돌았다.
이전에도 그와 이렇게 걸은 적이 있었다.
당시에도 서로 간의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애초에 대화는커녕 내 것보다 조금 빠른 그의 발걸음에 맞춰 걸기 위해 발을 박차는 내 모습만이 상기될 뿐이었다.
‘나에 대한 건 어떻게 생각해요? 아니면, 황태자라든가.’
황녀의 질문이 갑작스레 떠올랐다.
황태자, 황태자라.
만약 다른 이가 내게 같은 질문을 했다면, 그 답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더라면, 나는 과연 그 대답을 이을 수 있었을까.
나에게 헤일론은 단 하나의 의미로 정의된 적이 없었다.
언제는 내 삶의 마지막 동아줄이었고, 그와 동시에 내 삶의 이유이자 대상이었다. 내가 곁에서 따라야 하는 이였으며 언젠가 돌아올지도 모르는 작은 희망이었다.
더 시간이 지난 순간에는 잘못된 인연이 되었고 그 동시에 이 이상 멈춰야 할 인연으로 자리 잡았으나.
그럼 지금은?
지금의 난 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그에 대한 어느 복수심도 미움도 억울함도 서러움도 이제는 없었다.
분명 그에 대한 감정은 가득 쌓여 있는데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너무 수많은 색들이 물들어 아예 검은 빛이 되어 버린 것처럼.
“……애?”
“영애!”
“…….”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바닥에 고정하던 시선을 들어 올리자 무언가에 이마를 부딪혔다.
하지만 아프지는 않았다. 무엇에 부딪힌 것인지 아프기는커녕 부드럽고 따스했다.
그리고 그것에서 머리를 떼어 낸 나는 눈이 동그랗게 커지고 말았다.
“전하!”
내 앞에는 큰 기둥이 서 있었고 옆에서 거리를 유지하며 걷던 헤일론은 어느샌가 내 가까이에 붙어 한 손으론 멍하니 걷던 내 어깨를 다른 한 손으론 기둥에 부딪힐 뻔한 내 머리를 보호하고 있었다.
외치듯 튀어 나가 버린 내 목소리에 그는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어디에 그리 정신을 팔고 계십니까?”
매번 멀리서 올려다보다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마주한 푸른 눈은 이전보다 더욱 짙게 느껴졌다.
“죄송합니다. 손은 괜찮으신지…….”
내 머리를 보호하던 그의 손이 떼어지자 역시나 뼈마디 부분이 붉어져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괜찮습니다, 별건 아니니.”
내 시야에서 제 손을 숨긴 그는 거의 도착했다며 저 멀리 보이는 마차를 눈짓했다.
그의 말에 고개를 돌리자 방금 머리를 찧을 뻔한 것을 본 건지 마차에서 나를 기다리던 이들이 허둥대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영애.”
저를 부른 헤일론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으시다면.”
걱정이 분명한 한마디와 함께 나는 잠시 그 손에 시선을 고정했다.
‘호의를 호의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
그래, 지금 내게 그를 정의 내린다면 딱 그 정도였다.
내 손이 그의 것 위에 포개졌다. 손끝에 닿은 묘한 촉감이 천천히 그것을 간지럽혔다.
그렇게 걸은 지 얼마 안 되어 우리는 마차 앞에 도착했다.
“조심히 돌아가세요.”
마차 앞까지 저를 데려다준 그는 천천히 손을 뗐다.
그에 대한 감정이 정리되어 그런가, 그제야 가볍게 스며든 미소로 그의 두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감사했습니다.”
오늘 일도, 저번 일도 모두 통틀어서 보낸 감사였다.
“이만 가 볼게요. 전하께서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 말을 마치고서 베리안은 곧장 마차에 올라탔고, 그 마차가 멀어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헤일론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