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네?”
황녀의 말을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는 머리와 달리 내 입은 너무도 정직하게 그녀의 말뜻을 되묻고 있었다.
다행히 황녀는 여전히 아름답게 웃고 있었다.
“아, 별말 아니에요. 그냥 내가 영애에게 관심이 간다는 말이었어요.”
예?
내 마음속에서 다른 의미의 물음이 터져 나오는 걸 간신히 참아 낸 채 머릿속을 화려하게 굴렸다.
또 뭘까, 정말.
이 황실 사람들은 저들만 아는 말버릇이라도 있는 건지 한 명 한 명 다른 대화법이 이젠 그리 놀랍지도 않았다.
이럴 때 보면 정말 황태자와 남매라는 게 느껴지는구나.
그러는 와중에도 옆에서 느껴지는 뾰족한 시선들이 내 뺨과 피부를 콕콕 찌르고 있었다.
시간을 끌다가는 이것들이 더 늘어날 것 같아 나는 빠르게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황녀님.”
“참, 딱딱하기는.”
그녀의 말에 굳어 버린 내 모습에 황녀는 가까이 기울였던 몸을 뒤로 빼내며 그녀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새벽 밤을 닮은 남색 머리칼이 저렇게 어울릴 일인가, 잠시 속으로 탄성이 터졌다.
“당황하지 말아요, 그러라고 한 말 아니니까.”
당황을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황녀의 말들은 하나같이 전부 직설적이었다.
그런 면이 이전 생의 내게 위로가 된 점이었기에 불만이라 할 점은 없었지만 그래도 어렵긴 어려운 상황이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모르겠네.’
그렇게 생각한 나는 남모르게 홀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게 우리의 대화가 끝나자 테이블은 위는 순식간에 어색해진 듯했지만, 이내 황녀는 곧 모든 이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자마자 이야기가 새어 나가 미안해요. 모두 잘 지내셨죠?”
능청스러운 말 돌림에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았다.
“황녀님의 초대는 언제나 환영이죠.”
“오랜만이지만 오늘도 역시 아름다운 정원이네요.”
한 명 한 명에게 시선을 돌리던 황녀는 로웬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포르티안 영애도 티 파티가 처음이죠? 너무 어색해하지는 말아요. 다른 파티들과 비슷한 곳이니까요.”
“감사합니다, 황녀님.”
어느새 정신을 차렸는지 멍해져 있던 로웬도 자연스럽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평소의 로웬과는 조금 다른 얌전한 미소였다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그 뒤로는 정말 별것 아닌 이야기들이 지나다녔다. 서로의 안부를 묻거나 요즘 들려오는 이야기들에 대한 내용, 등등으로 가벼운 시간들이 지나갔다.
황녀의 티 파티는 어떤 식으로 지나갈까 궁금했었는데, 생각보다 그리 무거운 정보가 오가는 게 아니었던지라 그냥 단순히 다른 영애들이 여는 파티와 다를 건 크게 없어 보였다.
‘생각보다 재미있는데?’
초반의 기 싸움은 미뤄 두고 모두가 가벼운 이야기와 분위기를 타고 이어 가자, 나 역시 그 속에 쉬이 들어가 즐길 수가 있었다.
정말로, 대화 도중 느껴지는 몇몇, 조금 전 신경전을 벌인 자작 영애와 그 주위 이들의 시선만 아니었다면 참 완벽한 티 파티였을 것이다.
날이 저물어 갈 즈음, 노을빛이 들어오자 황녀는 모두를 향해 말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갈까요?”
그 말에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모두가 일어날 때에는 가장 상석에 위치한 이부터 일어나는 것이 예였기에 자연스레 상석 가장 곁에 앉은 나는 거의 처음으로 일어서게 되었다.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황녀 전하.”
나를 따라 다른 영애들까지 자리에서 일어섰고 곧 마차가 기다릴 곳으로 발길을 돌리려던 찰나, 내 어깨를 톡톡 건드린 황녀가 물었다.
“저와 잠시 산책하지 않을래요, 클로디 영애?”
그 순간 불어오는 바람에 햇살을 등진 황녀의 굵게 웨이브 진 머리칼이 마치 파도처럼 물결쳤다. 거기다 나를 보며 반짝이는 황금색 눈동자는 환한 노을빛을 받아 나가려던 이들의 시선마저 붙잡았다.
“아, 네…….”
그 모습에 나는 그녀와의 어색함은 저 멀리 날려 버리고서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황녀를 따라 도착한 곳은 한적한 분위기의 정원, 그 안에서도 제법 깊은 곳이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이지만 그곳까지도 꽃들의 관리는 완벽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황녀와 단둘이 걷고 있는 사실에 집중한 나는 긴장을 멈출 수가 없었다.
사실 지금도 모아 잡은 두 손에 땀이 나고 있었다.
“영애.”
“네 황녀님.”
정원의 중반까지 걸어온 황녀가 입을 열었다.
“영애는 사교계 자체를 별로 안 좋아하죠?”
“네?”
황녀의 얼핏 뜬금없는 질문은 이 와중에 내 속사정을 쿡, 명중했다.
‘그걸 어떻게?’
많이 당황한 속마음이 보이기라도 했는지 황녀는 후후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게 보여서요. 서슴없이 다른 사람 대하는 것도 그렇고, 남들과 척을 지는 것도 별달리 두려워하는 듯 보이지 않으니.”
그 말에 잠시 눈앞이 흐릿했다.
‘황녀님이 오기 전 하던 이야기를 들었구나.’
그것이 아닐 리가 없었다. 이때까지 황녀와 달리 만나거나 마주친 적이 많이 없었으니 저 정도 이미지를 쌓을 시간은 조금 전 일뿐이었다.
하하……. 반쯤 인정이나 다름없는 웃음을 보이며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필요에 의해 사교계에 복귀한 것 같은데, 이유가 따로 있나요?”
그런 내 반응에 황녀의 이어지는 질문은 내 입을 턱 막았다.
이전 생 이야기는 절대 못 하고, 그렇다고 여기서 줄줄이 내 가문의 사정을 읊는 것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입을 다문 내 주위로 둘러싸인 정적은 그리 길지 않았다. 내 반응을 신경 쓴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기에.
“억지로 말하지 않아도 돼요. 그냥 제 느낌이 이렇다 싶은 거였거든요.”
불편했다면 미안하다며 잇는 말끝이 그녀가 참 좋은 사람이구나, 느끼게 해 주었다.
“아녜요, 다 맞는 말인데요. 사실 싫어한다기보다는 안 좋은 기억이 좀 있어서 그다지 가까이하고 싶지 않을 뿐이에요.”
“그런가요.”
천천히 눈을 깜박이던 황녀는 이번엔 환한 미소와 함께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나에 대한 건 어떻게 생각해요? 아니면, 황태자라든가.”
“네?”
‘지금 황녀 앞에서 황녀와 황태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라는 건가?’
동공이 마구 흔들리는 게 나조차도 느껴질 지경이었다.
이걸 도통 무어라 말해야 하는지. 머릿속에서 수십 가지 상황을 그려 보았으나 마땅히 찾을 게 없었다.
“풋, 너무 긴장한 거 아니에요? 별 뜻 없었어요. 그냥 요새 헤일론과 함께 들리는 이야기가 종종 있었어서 물은 것뿐이니까요.”
농담이었다며 웃어 대는 황녀의 반응에 그제야 안심한 나는 멋쩍게 ‘네…….’ 하고 답하며 숨을 돌렸고, 황녀는 그제야 예쁘게 눈매를 접었다.
그녀의 미소와 함께 잠시의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그 분위기가 크게 불편하거나 어색하지만은 않았다.
“영애, 내가 영애를 초대한 이유는 황태자 때문이었어요.”
황녀가 멈췄던 발길을 다시 옮기며 떨어진 한마디였다.
“네.”
나역시도 그녀의 곁을 따라 걸으며 답했다.
사실상 그건 어느 정도 예상을 하기는 했었다.
나는 황녀의 파티에 초대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과거가 바뀐 것은 순전히 내 행동 덕일 텐데, 황녀 주변에 나와 관련되었으며 그녀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주변인이라면 아마 황태자뿐일 테니까.
“황태자가 영애에게 조금 신경을 쓰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묻고 싶었지만 나는 그저 조용히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황태자가 영애와 만난 날들 이후 묘하게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아, 물론 좋은 쪽으로요. 그래서 영애를 가까이 두고 싶었어요. 혹시 그에게 더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을까 싶어서. ……너무 이기적이죠?”
“아, 아니에요.”
눈썹을 살짝 내린 얼굴로 나를 보는 황녀는 분홍빛 입술을 빙긋 올렸다.
“아니긴요. 내가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하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헤일론, 그 아이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어요. 뭐, 이것도 오늘 영애가 하는 말을 들으니 더는 못 하겠지만요.”
“제 말이요?”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강요하고 싶지는 않아서요.”
“아…….”
‘서로 하고픈 일을 하며 사는 건데요.’
역시나 아까 제가 했던 말을 들은 것이었다.
“근데 그래서인지 영애가 제 생각보다 더 마음에 들어요, 왜인지 저랑 비슷한 느낌이거든요.”
정원을 바라보던 황녀의 눈길이 나를 향했다.
“그러니까 더는 제삼자를 두고 생각하거나 다가가지 않을 테니, 이번엔 제 친구 할래요?”
“네?”
“제 친구 어떠냐고요. 황녀의 측근이자 말벗. 명패치고도 괜찮지 않아요?”
그 말을 건네는 그녀의 얼굴을 그를 똑 닮아 있었다.
여유로운 표정에 웃어 보이는 얼굴까지.
‘헤일론이랑 똑같아.’
그제야 두 사람이 남매라는 것이 피부 가까이 와닿았다.
그가 내게 황태자비를 권하던 상황과 지금 이 상황은 그 모습만 놓고 보았을 때 너무도 비슷했지만, 딱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면,
“저야 영광입니다.”
이번 일은 내가 편하게 수락할 수 있는 제안이라는 점이었을 거다.
가볍게 고개를 숙인 내가 다시 그녀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그녀가 만족스럽다는 눈빛을 떠올리던 찰나, 그녀의 동공 움직임에 어딘가 어색함이 느껴졌다.
“제 말 하는 건 어찌 알고 온 건지.”
작게 읊조리는 황녀의 목소리는 저를 상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였다.
고개를 갸웃하던 나는 황녀의 시선이 닿아 있는 내 뒤편을 바라보았다.
‘……헤일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