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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 나는 당신이 싫어 (45)화 (45/61)

〈45〉

자리에 모인 모든 영애, 부인들이 자리에 착석했지만 아직까지 파티의 주최자인 황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정적을 깨기 위해 황녀의 자리인 상석 바로 오른쪽에 자리한 라그리앙 부인이 입을 열었다.

“큼, 그러고 보니 포르티안 영애와 클로디 영애는 오늘 처음 초대받은 것이지요?”

“네, 맞습-”

“네, 그렇습니다. 라그리앙 부인.”

가볍게 내 말을 잘라 낸 로웬이 사근사근 웃으며 부인을 바라보았다.

“저를 아시나요, 영애?”

“물론이죠, 부인. 동쪽 광산을 소유하신 라그리앙 후작님의 반려이시지요.”

그렇게 말하며 웃고 있는 로웬의 모습에 헛웃음이 튀어나올 뻔했다.

언제부터 남에게 그리 관심이 있었다고?

저건 분명 이곳에 오기 전 외워 온 문장일 것이다.

사교계에 로웬만큼 남에게 관심 없는 사람도 없을 테니까.

이런 식으로 이곳 부인들의 마음에 든 모양인데, 그녀는 첫 상대를 잘못짚었다.

내가 아는 그 라그리앙 후작 부인은 남편이 아닌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는 것을 더 원하는 사람이었다. 그만큼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기도 했고.

부인은 아직까지 그런 제 마음을 알지 못하지만, 지금 로웬의 말을 듣고서도 시큰둥한 그녀의 표정이 그 증거였다.

하지만 굳이 반박해서 로웬과 같은 사람이 될 필요는 없겠지.

라고 생각하던 찰나.

“클로디 영애는 아직 사교계에 대해 잘 모르시거든요. 그렇죠, 영애?”

언제부터인지 내게 모여 있는 시선들과 그 사이에서 날 보며 피식 비웃음을 보내는 로웬의 눈을 마주하자, 방금까지 들었던 생각이 깔끔하게 사라졌다.

그래, 역시 우리가 아름답게 헤어질 일은 없겠지?

나는 로웬을 보고서 가볍게 미소 지었고,

“그럴 리가요, 영애.”

이내 나를 바라보고 있던 후작 부인에게 눈길을 돌렸다.

“라그리앙 후작 부인이시기도 하지만, 부인은 페르신 백작 영애이실 때부터 유명하셨잖아요?”

내 말에 후작 부인의 눈이 조금 커졌다.

“이전 유행했던 드레스부터 최근 유행하는 것들의 디자인을 가장 처음 도입하셨다고 들었어요. 저도 많이 좋아하는 디자인이었거든요. 항상 대단하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말을 마친 내가 눈매를 접어 웃어 보이자 로웬의 말에는 시큰둥하던 부인의 입꼬리가 가볍게 올라갔다.

“칭찬이 과하지만 이렇게 알아주니 고맙네요, 영애.”

그녀의 인사와 함께 로웬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 버렸지만, 아직 많은 이들의 눈이 이쪽을 가리키는 것을 자각한 그녀는 곧바로 다시 미소를 되찾았다.

“그러고 보니 클로디 영애의 드레스가 부인이 디자인한 것과 꽤나 닮아 있네요. 단정하고, 잘 어울려요.”

이번에는 상석의 왼쪽에 자리한 테하스 공작 영애의 한마디였다.

나쁜 뜻도, 오해를 살 만한 말도 아니었기에 나는 그저 감사를 표한 뒤 웃어 보였지만, 다른 이들의 관심은 처음부터 언급을 받은 내가 아닌 다른 곳으로 쏠렸다.

“저, 도 물론 좋아하는 디자인이에요. 하지만 오늘은 그, 사정이 있어서.”

‘아, 로웬.’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짝이는 장신구로 치장한 채 들어선 로웬의 얼굴엔 당황한 듯 열이 올랐다.

평소였다면 능청스레 웃어 보일 그녀였지만, 조금 전 일어난 일 때문인지 그녀는 그저 고개를 푹 숙였다.

순식간에 수많은 시선은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 사이에는 비웃음 혹은 조롱 등이 뚜렷히 색을 내는 것들도 함께였다,

솔직히 내게 쏠린 시선들은 아니었기에 상관할 일은 아니었다.

분명 그럴 텐데.

“……그렇게 눈치 볼 필요도 없지 않나요?”

그녀와 잘만 지내던 이들이 고작 공녀의 한마디에 너무도 쉽게 저딴 시선들을 보내는 장면은 짜증 나리만큼 내 이전 기억과 비슷해서, 저도 모르는 새에 빗나간 몇 마디가 터져 나왔다.

“그 많은 드레스들이 모두 한 디자인인 것도 아니고. 굳이 오늘 입은 드레스가 라그리앙 부인의 디자인이 아니라고 눈치 볼 일인가, 싶어서요.”

그녀의 편을 든 것 같은 분위기에 모두가 다시 제게 시선을 보냈지만, 나는 그녀를 위할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 아니었다.

그냥 짜증 나는 모양새에 한마디 해 준 것일 뿐.

어색한 분위기에 말을 돌리고 싶었는지 눈치를 보던 이들이 주제를 바꾸었다.

조용히 굴러가는 듯했던 대화는 어느새 쳇바퀴마냥 제게 다시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클로디 영애는 이번에 황실에서 일이 있었다면서요?”

레이즌 일을 뜻하는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지만 얼마 전에 잘 해결되었답니다.”

그 짧은 답 하나에도 태클을 걸지 않기가 힘든지 말을 끝마치자마자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라리 대리인을 구하는 건 어떤가 싶은데요. 솔직히 백작 영애가 그런 클럽을 키우는 것도 그렇고, 이런 일들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것도 보기 좋지는 않잖아요.”

조금 전 내 말로 가장 눈에 띄게 인상을 쓰던 영애였다.

그 사건 이후 내가 가장 듣기 싫은 말을 골라내다니, 능력이라면 능력이려나.

그렇게 그녀에게 답을 하려던 찰나,

“언행이 너무 서슴없으시네요, 영애.”

내가 대답할 타이밍을 가로챈 목소리의 주인공의 깊은 눈동자가 자작 영애를 가리켰다.

‘라엘?’

“레이즌이든 다른 사업이든 똑같은 사업일 뿐이에요. 남의 일에 대해 그리 말씀하시는 것도 그다지 좋게 보이지는 않는걸요.”

“!”

라엘이 내 편을 들 것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영애는 적잖이 당황한 모습이었다.

하기야 이건 나도 예상 못 했는걸.

‘라엘과 나의 관계를 숨기기 위해 일부러 밖에서는 그다지 친하게 다닌 적이 없었는데.’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라엘은 내 쪽을 바라보며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다.

“그렇죠? 영애.”

그녀의 눈치에 큼, 하고 헛기침해 시선을 가져온 난 라엘에 의해 막혔던 입을 다시 떼어 냈다.

“어떻게 보일지는 몰라도 저는 영애들과 같은 마음으로 클럽을 운영 중이랍니다. 이번에는 예기치 못한 일이 있었지만, 그래서 얻은 점도 있다고 생각해요.”

돈이 더 필요하다는 현실을 배웠달까?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 양심의 가책 따윈 느끼지 않았다.

나는 그 영애의 떨리는 눈빛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그리고 굳이 시선을 신경 쓸 필요 없잖아요. 서로 하고픈 일을 하며 사는 건데요.”

말끝을 맺고서 나는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그러곤 그녀를 바라보자 자작 영애의 얼굴은 점차 더 굳어 가고 있었다.

분명 제 말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황실에서, 그것도 황녀의 파티에 초대된 입장에서 목소리를 높일 수야 없으니 참고 있는 것이 눈에 선했다.

아니, 일부러 보여 주려고 하는 것도 같고.

“……네, 그렇네요.”

자작 영애는 결국 불만스러운 표정을 구긴 채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그 자리에 모두의 시선이 자연스레 우리 두 사람에게 모여 있는 그 순간.

“재미있는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내 뒤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와 함께 짙은 남색의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황녀가 이곳으로 걸어 들어왔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갑작스러운 황녀의 등장에 놀랄 만도 했지만, 앉아 있던 영애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다들 앉아요.”

드디어 비워져 있던 상석이 채워졌고 그제야 다른 이들도 다시 제자리에 착석했다.

“오늘따라 분위기가 다르다 했더니, 새로 온 손님들 덕이었군요.”

자리에 앉자마자 황금 같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미소 지은 황녀는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반짝이는 눈동자가 꼭 세공이 잘된 보석 같았다.

“새로 온 손님과 가까이 자리하고 싶은데. 클로디 영애, 내 곁에 앉지 않겠어요?”

“네?”

갑작스런 제안에 눈이 동그래졌다. 왜 내가 황녀의 눈에 띈 건지는 몰라도 일단 지금으로선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그녀의 곁은 이미 라그리앙 부인과 테하스 공녀가 자리하고 있었다.

결국 누군가 자리를 비켜 주어야 한다는 말인데…….

‘다른 자리도 아니고 상석 곁의 자리를 누구에게 넘겨 달라 하느냔 말이야.’

두 사람 중 누구에게도 그 말을 꺼낼 수 없어 머뭇거리는 내 모습에 상석 곁에 두 사람이 피식 웃어 보였다.

“제 자리를 양보하지요.”

인자한 미소를 띤 라그리앙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부인…….”

“너무 미안해하지 말아요. 오랜만에 옛 생각도 나고 좋지요, 후후.”

배려가 가득한 부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고 자리를 바꿔 앉자 황녀는 기분이 좋다는 듯 생글생글 미소를 보였다.

그렇게 자리가 바뀌고 미풍을 맞으며 탁자 위 준비된 차를 한 모금 마신 황녀는 이내 나긋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붙였다.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영애를 초대한 것이지만, 제 생각과는 조금 다른 사람이네요.”

조금 다른 사람?

좋은 의미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인지 알 수 없는 말에 아하하, 어색한 웃음만으로 답을 하자 그런 내 표정에 황녀는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오해는 말아요. 나쁜 뜻은 아니었어요.”

“오해하지 않았는걸요.”

물론 황녀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고 있었기에 그런 오해는 하지 않았지만, 내 안에는 또 다른 궁금증이 생겨났다.

“혹시 그럼 절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여쭤보아도 될까요?”

그 말에 다른 이들이 기함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애초에 황녀에게 직접적으로 질문을 건네는 이는 많이 없었으니까.

“으음…….”

하지만 황녀는 내 물음에 대해 그리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단지 어떤 대답을 내놓을까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제가 예상한 영애는, 조금 더 조용하고 남의 말을 잘 공감하고…… 내가 아는 누군가와 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지금 본 영애는 그와는 정반대의 사람이셔서 조금 놀란 것뿐이에요.”

아-그러니까,

‘다른 사람 말에 반박도 못 하는 사람으로 보였구나.’

사실 그 말은 어느 정도 정답이었다.

‘이전 생까지만 해도 딱 저런 성격이었으니까.’

“칭찬 감사합니다.”

결국 내게는 좋은 뜻으로 다가온 말이었기에 대답하자 황녀 역시 초승달 같은 눈웃음과 함께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이런,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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