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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 나는 당신이 싫어 (40)화 (40/61)

〈40〉

그 말을 하는 목소리도, 놀라 웅성대는 객석에도 아무런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딱 그 목걸이 하나만이 그의 시선 끝에 남았다.

“!”

제릭은 베리안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휙 잡아끌었다,

“……!”

베리안은 놀라 신음을 뱉었지만 그는 손에 힘을 풀지 않았다. 되레 힘을 더 쥐어 목걸이에 걸린 목이 점점 조여져 갔다.

“윽, 네 말마따나 이 중요한 녹취록이 이것만 있겠니? 폭력죄까지 추가하고 싶지 않으면 손 놔.”

목걸이를 잡힌 채 말하는 베리안의 목소리에도 이미 눈이 돌아간 그의 흰자에 실핏줄이 섰다. 관객석은 술렁이는 소리가 커져 갔다.

“당장 삭제해. 다른 녹취록도 전부. 아니면 여기서 네 끝을 볼 거니까.”

“……윽.”

목이 조여 오는 고통에 베리안의 눈에 물기가 서렸다.

하지만 그 순간.

쾅!

경매장의 문이 열리고 순식간에 빛이 들어왔다.

“콜록! 콜록!”

놀란 나머지 그의 손에 힘을 풀리자 그 손을 비틀고 베리안이 빠져나왔다.

“하, 하하. 그럼 설마 내가 여길 오는데 그냥 올 줄 알았어?”

뒷문에서 여러 사람들이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휘날리는 백색 망토에서 이미 그 자리에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황실 기사단.’

그리고 그들 중 가운데에 서 있던 이가 단상 위를 올려다보았다.

‘황태자?’

제릭의 두 눈이 커졌다. 신고 하나로 황태자가 나설 리가 없었다. 대체 어떻게?

휙, 고개를 돌린 그가 베리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 역시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왜 네가 나와?’

자신이 아즈에게 부탁한 건 그저 황실에 신고를 하는 것이었다. 제가 시간을 끄는 동안 최대한 빨리 황실 기사단을 이리로 데려오는 것.

애초에 사기 등의 신고에 황태자가 나서는 것도 이상했다.

그렇게 눈동자를 굴리고 있자니 헤일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사기 신고를 받았다는 장소가 가까운 곳이기에 함께 나왔더니, 이런 곳에서 보는군요. 페이드 영식, 리노테인 후작.”

말을 잇는 그의 시선은 내게로 와 있었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듯합니다. 황태자 전하. 저는 단지 이자들에게 속아서…….”

손사래를 치며 후작이 앞으로 나섰다.

“관련자든 제삼자든 조사를 위해 우선 조치를 따라 주었으면 하는데.”

그의 말을 끊어 낸 목소리에 입을 다문 후작을 두 기사가 바깥으로 안내했다. 더 소리쳐 봤자 안 좋은 인상만 심을 것이 뻔하기 때문에.

객석에 앉은 이들도 혹여 연관이 될까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일론의 눈짓에 다른 두 기사는 제릭에게 향했다. 그러나 그는 팔을 뿌리치며 그 길을 거부했다. 그러고선 곧장 내게로 다가왔다.

갑자기 다가온 발걸음에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그는 불쑥 내 어깨를 부여잡았다.

“지금 무슨……!”

그 행동에 헤일론이 급히 반응한 순간.

“왜! 왜 내가 너 같은 거 때문에!”

제릭이 목소리를 높였다.

하?

악을 지르는 그의 모습은 내겐 그저 기가 찼기에 헛웃음이 터졌다.

나는 내게 다가오던 기사들과 금방이라도 단상 위로 올라올 듯한 헤일론을 보고서는 잘게 고개를 저었다.

‘무슨 얘길 하나 들어나 보자.’

“뭐 하는-”

“……왜, 뭐 때문이야. 대체 뭐 때문에 일이 이렇게 틀어진 거냐고!”

내 말 따위는 들리지도 않는지 귓가를 찌르는 목소리에 어깨가 흠칫 움츠러들었다.

“모든 게 완벽했어. 계획부터 실행까지 어디 하나 부족한 곳이 없었다고, 그런데 왜, 왜, 왜! 너 같은 거 하나 때문에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어야 하느냐고!”

……이건 뭐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악에 받친 꼴이 우스우면서도 또 동시에 한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지금 그게 네가 나한테 할 말이야?”

애초부터 내 전부를 망치려고 든 게 누군데 제 주제에 그런 말을 해?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자 잠시 고개를 숙인 채 굳어 있던 그는 불쑥 제 목소리를 죽여 내게 읊조렸다.

“나랑 거래를 하자.”

이제는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 표정이 와락 일그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상황에 그딴 소리가 나와? 내가 왜-”

“네가 무얼 원하든 다 내어 줄게. 돈이 필요해? 아니면 보석? 그래, 원한다면 건물도 내어 줄 수 있어. 네가 바라는 건 모두.”

그가 저를 보는 눈빛은 내가 그를 보는 시선과 같을 것만 같았다.

서로를 끔찍이도 경멸하는 표정.

허나 그러면서도 너무도 필사적인 그의 모습에 그의 요구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요구하고 싶은 게 뭔데.”

“선처.”

“뭐……?”

기다렸다는 듯이 답이 튀어나왔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나도 내가 원해서 한 일이 아니었어. 너도 알잖아? 난 처음부터 레이즌에 관심도 없었어.”

애초에 레이즌이 그의 것은 아니긴 했다. 전부 후작에게 갈 것이었으니.

“다 후작이 시킨 일이야. 여정 중에 백작을 꼬드겨 레이즌을 제게 넘기라고 협박한 거라고. 하지만 이런데도 벌은 나 혼자 받을 테지. 너무 억울하잖아? 너도 저런 고위 귀족에게 휘둘리는 건 싫을 거 아니야. 그러니-”

“싫어.”

‘저딴 말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한 건가, 설마.’

“……뭐?”

제 예상과는 다른 답에 제릭의 두 눈이 커졌다.

“싫다고.”

양심도 없지.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들으면서 소름이 끼쳤다.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말하는 것도 같지만 설마 정말 제가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네가 어떤 상황이었든 그게 나와, 이 일과 무슨 상관인데? 뭐, 너는 어쩔 수 없이 한 행동이니까 잘못이 없다, 그딴 말이 하고픈 거야?”

말아 쥔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착각하지 마. 네겐 분명 다른 선택권이 있었어. 그저 네가 더 편하게 원하는 것을 얻으려 쉬운 길을 선택한 것뿐이야. 고위 귀족의 핍박이든 뭐든 결국 그건 네 선택이었고 그 선택이 우리 가족을 망치려 든 거라고.”

“……그건 어쩔 수 없었어. 너도 내 상황이면 피차일반이었을 거야. 가문을 위해서라면-”

“가문을 위한 게 아니잖아.”

낮아진 목소리가 경매장 바닥에 조용히 울렸다.

“니켈 페이드, 네 동생. 너, 네 동생이 두려워서 그런 거잖아.”

그의 잘만 나불대던 입이 굳는 것이 보였다.

“너보다 잘난 네 동생이, 혹시나 네 계승권을 가져갈까 봐 네 능력을 앞세울 일이 필요했지. 그래서 이번 일로 후작의 뒷배를 얻으려 한 거고.”

여정 중에 페이드가의 싸움이 난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

정곡이었는지 그는 아무런 움직임도 취하지 못했다.

그런 인간이 저 하나 다시 살겠다고 발악하는 꼴이라니, 불리할 때에만 뒤틀리는 그 모습이 정말 끔찍이도 싫었다.

“그런 주제에 같잖은 동정심 유발이나 하고 있으니. 결국 딱 그 정도가 네 수준이네.”

이제 더 들어 줄 것도 없었다.

나는 더 이상 내 앞을 가로막지 않는 그를 스쳐 지나갔다.

“아아…… 아아아악!”

그의 눈동자가 이내 빛을 잃었다.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며 주뼛거리던 기사들은 종결한 듯이 보이는 대화 분위기에 천천히 제릭의 두 팔을 잡아 올렸다.

죽은 눈의 그는 이제 별다른 저항도 하지 않았다.

황실로 곧장 가게 될 그의 뒷모습이 점점 작아져 갔다. 아즈는 확인할 일이 있다며 먼저 자리를 떠났고 나머지 기사들은 경매장에 모인 귀족들을 조사한다는 목적으로 그들과 함께 밖을 향했다.

그리고 나는, 멍해진 정신으로 경매장 바깥의 뒤편 정원에 남아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된 거라면, 나는 도대체…….’

“괜찮습니까.”

언젠가 다가온 발걸음 소리에 곁을 돌아보자 조금 전 나를 놀라게 했던 헤일론이 서 있었다.

괜찮기는, 계속해서 심란해지는 마음에 누구에게라도 기대고 싶을 정도였다. 우선 그게 그는 아니었지만.

“괜찮습니다. 사업을 하며 이런 일도 생길 수 있는 거죠.”

“…….”

“…….”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허공에 시선을 두었다. 그러던 중 황태자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복잡한 일이 있을 때는 잠시 묻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서두를 필요 없으니까요.”

“네?”

“……백작님의 잘못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직 심적으로는 힘들어 이러시는 게 아닙니까.”

“……!”

그의 말이 맞았다. 일은 잘 해결되었지만 객관적으로 내 상태는 하나도 괜찮지 않았다.

‘전부 후작이 시킨 일이야. 여정 중에 백작을 꼬드기고 레이즌을 제게 넘기라고 나한테 협박한 거라고.’

그 한마디에 정말 많은 생각이 오고갔다,

‘그럼 아버지께선 아무런 잘못이 없으신 걸까.’

‘돌아오신 뒤 달라진 것도 저들 때문인 걸까.’

‘그럼 나는, 그런 아버지를 용서해야 하는 건가.’

이번 일을 조사하며, 그리고 마침내 제릭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버지께서 제 뜻으로 달라지신 게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내겐 그리 단순히 끝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분명 아버지는 저들에게 속은 것뿐이라지만, 그렇대도 나는, 어머니는 그 행동으로 인해 아파야 했으니까. 잠을 못 이룰 정도로 마음을 졸였으니까.

그래서 나는 아버지에 대한 어느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래, 지금 헤일론, 그가 말한 것처럼 말이다.

“대체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오늘 일은 제삼자가 보았을 때 그저 두 사람의 난동극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정말 소수의 몇 이들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 그중 누구와도 관련이 없는 그는 어떻게 내게 그런 말을 한 거지?

“들었으니까요.”

“누구에게요?”

헤일론은 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나와 눈을 마주쳤다.

“설마, 제가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 그런 기억 없어요. 정확히 답해 주세요.”

그를 매섭게 노려보는 내 눈빛에 그는 제 옷 안주머니를 뒤지더니 어느 작은 반지를 꺼냈다.

‘?’

그리고 그가 반지를 끼자마자, 순식간의 그의 모습이 뒤바뀌었다. 그리고 가장 눈에 띄는 붉은 머리칼은-

“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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