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오, 리본 예쁘네요.”
얼마 뒤 해가 오르자 곧바로 찾아간 방에는 지난번 마주했던 여성이 다시 한번 공중에 모습을 드러냈다.
“감사해요.”
조금의 시간이 지난 지금, 전보다는 긴장이 덜 되었지만 이번 문제는 또 다른 곳에 있었다.
밤을 새다시피 여러 자료들을 찾고 읽고를 반복한 눈이 뻑뻑했다. 피곤한 눈꺼풀은 느리게 눈앞을 가렸다 다시 느리게 올라왔다.
“어째 아가씨가 나보다 더 열심히 뛴 것 같네?”
화면 속의 여성은 턱을 괸 채로 그런 나를 보며 킥킥 웃었다.
“빨리 알아본 거나 알려 주지.”
그 모습을 보며 내 옆에 서 있던 아즈는 팔짱을 낀 채로 삐딱한 태도를 보였다. 여성은 매번 있는 일이라는 듯이 넘기면서도 그의 태도가 불만이었는지 티 나게 그를 흘겨보았다.
물론 아즈 역시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그렇게 들릴 듯 말 듯 투덜대던 여성은 이내 최근 들어온 정보에 대해 입을 떼 냈다.
“우선 아가씨가 물은 질문에 먼저 답해 줄게.”
곱게 휜 그녀의 눈꼬리가 나를 향했다.
“이번에 백작의 곁에 새로 나타난 이들은 총 다섯 명. 백작의 보좌관과 기사 상부, 호위 세 명. 그들 전부가 배속된 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행사하는 권력은 이상하게도 꽤 높은 편이네. 특히나 보좌관 자리를 꿰찬 건 꽤나 드문 일인데 말이야.”
톡톡 서류 끝을 치는 여성은 가볍게 수많은 정보를 쏟아 냈다.
백작가 안에서도 알려지지 않은 정보를 훌훌 읽어 내려가는 그녀에 대한 신뢰가 훌쩍 상승했다.
“기사 상부와 호위 세 명은 전부 2 기사단 소속이었고 그 중 상부는 남작 지위, 호위는 전부 평민 출신. 이들 전부 기존 기사단에 추가로 입단된 케이스인데…….”
잘만 말을 잇던 여성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말끝이 흐려졌다.
“얘.”
탁, 그녀의 손가락이 종이 한곳을 쳐 냈다.
흐릿한 화면 안에서 동그라미가 쳐진 서류가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다.
“테릴이라는 이 보좌관은 나오는 정보가 하나 없더라. 어디서 온 건지 어떻게 살던 이인지, 백작과는 어떻게 만났는지, 단 하나도. 우리가 이 정도 찾았다 하면 어느 정도 기틀은 나와야 하는데, 이렇게 아무런 정보도 나오지 않은 걸 보니 아마 이름 역시도 가명일 가능성이 높을 거야.”
‘가명이라.’
하기야 이 정도 일을 벌이는데 당당하게 제 이름을 붙이고 들어올 만큼 뻔뻔한 이가 몇이나 될까.
“그래서 우선 얘는 미뤄 두고 백작 주변을 캐 보는 중이야. 백작까지 탈탈 털다 보면 언젠간 나오겠지.”
얼굴 정도야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표현할 그림 솜씨는 없었고 나 또한 그의 이름은 몰랐다.
그의 정보를 하나라도 떠올리려 애쓰는 나 못지않게 여성의 얼굴도 한껏 일그러져 있었다.
잠시 보인 서류 끝이 약간 구겨진 것이 보였다.
“이렇게 정보 한 톨이 안 나오는 건 또 오랜만이란 말이야. 짜증 나게.”
여성은 아마, 제가 못 찾은 정보에 조금 자존심이 상한 것처럼 보였고,
“풉.”
내 옆에서 들려온 소리의 끝에 서 있는 아즈는 고개를 돌린 채 입을 막고 뱉어 내듯이 터진 웃음을 삼키고 있었다.
‘아즈는 못된 상사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잠시 흐린 눈을 뜨고 있자 어느새 다시 화면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하튼 찾아 주겠다고 장담했는데 시간이 걸려서 미안해. 당연한 얘기지만 더 노력해 보긴 할 거야. 아가씨가 만족할 때까지.”
과분한 사과와 약속에 잽싸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천천히 해 주셔도 돼요. 이미 많은 도움을 받고 있는데요.”
나는 아는 정보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인맥이 넓은 것도 아니었다. 운 좋게 그들을 만날 수 있어서, 그들이 날 도와줘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지금 여기까지 올 수 있던 것도 모두 이들의 덕인걸.’
내 강렬한 마음을 전하는 눈빛을 바라보던 여성은 또 한번 크게 웃어 보였다.
“어떻게 이런 아가씨가 우릴 찾아왔을까.”
한참을 주먹으로 입을 가리고 킥킥대던 여성은 다음 자료를 알려 주겠다며 다른 서류를 꺼내 들었다.
“이건 여정 동안의 자료. 네가 알려 준 기간 후를 기점으로는 조금 더 꼼꼼히 찾아봤어. 신기하게 백작이 만난 이가 생각보다 그렇게 많지는 않더라고? 조금 이상하긴 했는데 그 점에서 따로 나온 건 없어서 일단 이것만 전해 줄게.”
후후 웃는 입꼬리가 반달을 그렸다.
“보통 많이 만나던 이가 2 기사단의 기사들 중 네다섯 명이었나? 이 사람들은 기사단의 사건 등을 보고해야 되는 자리라 만남이 잦더라고. 크게 이상한 낌새는 없었어. 보통 나누던 대화는 투입 시각이나 기본적인 허가들, 그리고 또 나온 게 백작의 상부인 2 기사단의 단장. 이들도 만나는 이유는 비슷했어. 달리 특별한 건…….”
몇 가지를 더 읊으며 그녀가 팔락, 종이를 뒷장으로 넘겼다.
꽤 빠른 속도였음에도 아즈는 그녀의 이어지는 말을 순식간에 제 노트에 받아 적어 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평소 잘 만나지 않던 이들은 몇 마법사와 기사단들과 함께 이동하는 의료진 중 2 기사단 소속의 이들이네.”
‘의료진?’
“마법사는 이번 여정의 마물들에 대한 정보를 쫓기 위한 것 같고, 의료진을 만난 건 이번에 마물들을 제거하며 상처를 입은 모양인가 본데. 닷새를 연속으로 다닐 정도면 꽤나 심한 상처인가 봐. 뭐 이들이 이전에 만남이 없던 건 이번 마물의 특징이 달라진 점과 백작이 잘 다치지 않았다는 이유라 별로 이상한 점은 아니지만 말이야.”
거기까지 그녀의 말을 듣고 있자 순간 기분 나쁜 무언가가 머리를 휘감는 느낌이었다.
“아니요.”
“어?”
멍하니 터진 말소리에 여성이 반응했다.
“아니에요. 아버지가, 백작님이 다쳤을 리가 없어요.”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다치는 게 마물과의 전투야. 보통 다 그래.”
“그게 아니라…… 아버지께서 보통 하시는 일은 기사단을 통솔하는 것뿐이라고, 하찮은 마물 정도야 기사들이 잡는 편이라고 하신걸요. 이번 여정은 기존보다도 짧았어요. 그만큼 큰 마물이 없었다는 건데, 그럼 전투에 나서지도 않았을 아버지께서 그렇게 심하게 다쳤을 리가 없잖아요.”
“하나 있잖아.”
“네?”
“하찮은 마물이 아니라 부기사단장까지 나서야 되는 정도의 마물. 동쪽 숲의 주인밖에 더 있나?”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생각이 복잡해졌기 때문에.
에이든은 누군가의 공을 가로챘다 했지. 그럼 그 공이 사실은 아버지의 공이었다면?
“두 사람이 의심한 점은 따로 조사해 봤어.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정보가 될지도 모르니까. 조금만 의심하니 이상한 점투성이더라. 허술하기 짝이 없어.”
“그럼 정말 그게 아버지의 공이었다는…….”
“확실하진 않지만 정황상 가장 유사한 편이지.”
말도 안 돼.
‘그런데 왜 아버지께선 공을 빼앗긴 거지?’
분명 다른 하급 기사들에게서 공을 받아 온 것이라 생각했다. 하급 기사들은 적은 돈으로 입막음을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아버지는? 아버지께서 고작 돈을 조금 얻겠다고 공을 넘기다니. 기사의 명예를 특히나 중요시하시던 아버지가 그런 말에 넘어갈 리가…….’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변해 버린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점에서도, 변하신 건가.’
입 안이 써지며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 순간 통신석의 여성이 제 두 손을 짝 마주쳤다.
“워워, 잠깐만. 집중하고 있는 상황에 미안한데, 아직 내 말 다 안 끝났어.”
아즈와 내가 갑작스레 말을 잃고서 무언가를 고심하자 여성은 황급히 우리 둘을 불러냈다.
“백작이 에이든에게 공을 넘겼다고 생각하는 거라면 할 말이 좀 있어서. 에이든은 이번 여정 동안 백작과 만난 적이 없어. 심지어 백작은 지금까지 내가 말한 이들을 제외하고는 아무와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고. 하지만 기사들은 여정이 끝남과 동시에 올라왔잖아. 타이밍상 그건 불가능해.”
“그러면 아버지는 에이든이 아니라-”
“응, 에이든에게 공을 주기 위한 다른 이의 소행일 가능성이 크겠지. 아마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만나려 했을 테니 백작의 막사와 가깝거나, 친분이 있거나, 아니면 의료실에서 만난 이일수도 있고.”
막사나, 의료실?
“거기에 대해선 다시 찾아볼 거야. 범위가 조금 있어서 시간이-”
“저기.”
서류 쪽으로 손을 뻗던 여성이 내 목소리에 행동을 멈췄다.
“저, 알아요.”
“음?”
“연락을 못한 지 오래되어 아버지와 친하신 분들은 잘 모르지만, 막사나, 의료실에 자주 다닌 사람들은 알아요.”
밤이 지나고 또 지날 때까지 수십 개의 자료를 몇 번씩 다시 읽었다.
의료실이나 막사 구성 같은 건 이제 눈 감고도 읊을 수 있어.
“막사는 기사단장님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 사이에 관리가 필요한 막사를 두었어요. 그 앞으로는 기사 승급에 오른 지 오래된 이들부터 순서대로 원형을 지었고요.”
나는 아즈가 슬쩍 건네준 명단에서 아버지의 막사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이들의 이름을 몇 지목했다.
“의료실은 하도 사람들이 자주 다녀서 세세하게는 모르겠지만, 이 사람, 이 사람부터 여기까지 들어간 적 있는 건 확실하고, 아, 또 페이드 가문의 형제요. 한 사람은 의료진이고 나머지 한 사람은 후방 쪽 기사인데 형제여서 그런지 자주 그곳에 들렀다 했어요.”
페이드가의 내용이 적힌 자료에서 분명 봤었다. 의료진인 동생은 둘째 치고 형이 이상하게 자주 의료실에 다녔다는 걸.
내 말에 여성은 눈을 크게 뜨고 저를 쳐다보다 이내 씩 웃으며 종이에 무언가를 적어 댔다.
“먼저 찾아볼 가치는 있겠네. 오늘 내일 내로 말한 이들의 사진과 명단을 가져다줄게.”
고맙다는 짧은 인사를 남긴 여성은 그쪽에서 먼저 통신을 끊었는지 일렁이는 모습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졌다.
너무 많은 것들을 털어 내고 묘해진 기분을 달래고 있자 아즈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이런 건 어떻게 알았어?”
그가 물었다.
“주신 자료 덕분에요.”
여기저기 퍼진 자료긴 했지만 여러번 읽다 보니 하나의 이야기처럼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말에 오, 반응을 보인 그는 여성의 이야기를 들으며 적던 종이를 내게 넘겨주었다.
받은 종이에는 역시나 여성이 빠르게 던진 말들조차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와.”
짧은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고마워요. 잘 읽을게요.”
그렇게 곧바로 방으로 돌아가려 발을 돌리던 찰나, 아즈에게 붙잡힌 어깨가 빙글, 다시 뒤를 돌았다.
“저기.”
“네?”
“지금 네 얼굴 어떤지 안 봤지? 엄청 피곤해 보이는데.”
“아…….”
“어제 잠 안 잔 거 알아. 여기 은근 소리가 잘 들리거든.”
아즈가 웃으며 제 검지로 저 위 나무 천장을 가리켰다.
낡은 건물은 조그마한 움직임에도 끼익 거리는 소리를 만들어 내던 게 생각났다.
“왜 그리 다급한지는 몰라도, 그러다 진짜 쓰러져.”
항상 고맙게만 느껴지던 걱정이고 그 마음 역시 너무 고마웠지만, ‘알았어요’라고 대답하는 와중에도 내게는 그리 귀담아 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아직도 급한 심장이 발을 구르고 있었기에.
그날 저녁 자료를 돌아보는 내 머릿속에는 몇 가지 예상이 떠돌았다.
‘이들 중 가장 가능성 있는 건, 이 사람이려나.’
하지만 그가 굳이 왜?
혼자간의 질의응답으로 시간을 보낸 밤의 다음 날 아침, 급하게 찾아온 통신에서 들려온 한 마디는 내가 예상한 상황과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이 사람은 제릭 페이드예요. 이번 여정에서 의사를 돕는다고 따라나섰죠.”
‘아가씨.’
익숙해진 얼굴. 머릿속에 남아 있는 소름 돋는 목소리까지.
“이 사람이에요.”
제릭 페이드. 의료진으로 활동 중인 니켈 페이드의 형인 그가, 아버지의 보좌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