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덜컹이며 정문을 향해 가는 마차는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마차에서 내려오는 길, 어느 익숙하지 않은 형상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것은 천천히 저택으로 들어가는 나에게 다가왔다.
“이제 오십니까, 아가씨.”
“누구…….”
훤칠한 키의 남성은 빙긋 웃으며 내 눈을 바라보았다. 분명 선해 보이는 표정인데도 왜인지 등가에 소름이 돋았다.
“백작님의 보좌관입니다. 백작님께서 아가씨를 부르시기에 모시러 왔습니다.”
아버지께 이런 사람이 있었나?
제 기억에는 아버지의 보좌관은 더 중후하고 아버지와 나이가 비슷한 남성이었다. 이런 젊은 사람이 아니라.
“먼저 돌아가요, 후에 따로 아버지를 찾아뵐 테니.”
뭔가 묘한 느낌에 나도 모르게 날카롭게 선을 그었다.
“같이 가시지요.”
“아뇨, 옷매무새 정리라도 하고 갈 테니 먼저 가세요.”
나는 어서 돌아가라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그 사람은 눈빛도, 자세도 아무런 움직임조차 없었다. 그 때문에 무언가 더욱 꺼림칙한 느낌이 들어 나는 먼저 그에게서 한 발자국 멀어진 채로 정문으로 걸어갔다.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등 뒤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빠르게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내가 복도를 걸어 계단에 들어서 그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후…….”
방에 들어서고 쾅, 소리가 나게 문을 닫고 나서야 긴장한 마음이 가라앉았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안색이 안 좋으신데요. 백작님께는 나중에 간다고 전할까요?”
메이샤는 드물게 굳어 버린 내 표정에 걱정을 늘어 놓았지만 아버지의 보좌관을 헐뜯을 수는 없었기에 애써 웃어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됐어, 저렇게 말하는데 무슨 엄청난 사안이라도 있으신가 보지. 옷 갈아입을 시간은 없을 것 같은데 머리만 얼른 정리하고 가자.”
“네, 그래요.”
대충 장식품을 빼고 머리와 옷자락을 정리한 뒤에 방을 나섰다.
안 그래도 아버지께 이야기를 드릴 예정이었는데 이렇게 시간을 낸 것이 어떻게 보면 기회일 수도 있었다.
“아버지.”
가벼운 노크와 함께 빠르게 방 안으로 들어섰다.
“왔니.”
“네, 부르셨다고 들어서요.”
쓰고 있던 안경을 툭 내려 두고서 책상 앞의 테이블에 자리한 그의 곁에는 방금 전 만났던 그 보좌관이 서 있었다.
“최근 수도 저택에 들어오는 돈이 많아졌더구나.”
“아, 그건요…….”
“레이즌. 네가 운영하는 사교 클럽이라지?”
말씀을 드릴 생각이었는데 먼저 알고 계신 모양이었다.
“네 맞아요. 이번에 운영하게 되었는데-”
“그만두어라.”
갑작스레 들려온 말에 순간 머릿속이 뚝, 멈추는 듯했다.
“네?”
“클럽 운영을 그만두라 했다. 다른 이를 뽑아서 운영하든가, 정 별로라면 내게 맡기든지, 우선 빨리 손을 떼는 게 좋을 거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건 제가 운영하던 클럽이에요. 갑자기 다른 사람에게 맡기라니…….”
당황한 나머지 말을 더듬자 그는 한 손으로 머리를 꾹꾹 누르더니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어차피 네가 원해서 하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적임자는 내가 찾아 놓을 테니 너는 이제 사교계에나 집중하거라.”
“누가 그런 소리를, 그건 제가 원해서 하는 일이에요, 아버지. 그걸 어떻게 남에게 넘겨요?”
처음에는 얼떨결에 받아 오긴 했지만 현재는 정말로 내가 원해서, 순전히 내 의지로 운영 중인 곳이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안 되겠구나.”
하지만 그는 그런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다 큰 영애가 운영하는 곳이 도박판이라니, 그 누구의 눈에 좋아 보이겠느냐? 지금이라도 손 떼고 다른 좋은 취미를 들여도 모자랄 판에.”
“레이즌은 취미가 아니에요. 보셨잖아요, 저희 가문의 상황도 인식도 많이 좋아지고 있다고요.”
“그래, 레이즌 자체는 괜찮은 사업 거리이긴 하지. 그러니 내게 넘기라는 것이 아니냐.”
내 말을 들어 줄 생각도, 이해할 생각도 없는 아버지의 모습이 선명해졌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그의 모습이 이전, 내가 알던 그 모습과 대비되어 보였다.
“……싫어요.”
“뭐?”
멍해진 정신에 목소리가 높아졌다.
“싫다고요. 왜 제가 잘만 운영하던 클럽을 넘겨야 해요? 제 클럽이에요. 오랜 시간은 아니었지만 지금까지 문제 하나 없이 안정적으로 키운 제 클럽이라고요. 제가 이 클럽 하나에 얼마나 정성을 쏟았는지, 아버지께선 모르시잖아요?”
처음으로 그에게 목소리를 높인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그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한심하긴.”
그러자 순간 아버지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더불어 목소리까지도.
“쓸데없는 고집이라니. 아직도 네가 아이인 줄 아는구나. 가세가 조금 기울었다고 남들 시선은 생각도 안 하고 사는 것인지…… 그냥 조용히만 지내면 안 되겠느냐?”
“지금 뭐라고…….”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그냥 조용히만 지내세요.’
내가 경멸하던 이에게 매순간 듣던 말이었다.
한데 그것이 어떻게 아버지의 입에서 나올 수 있지?
언제까지고 믿던 아버지의 변해 버린 모습은 정말이지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아버지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 수가 있어요? 적어도, 적어도 아버지께서는 그런 말을 하시면 안 되지요. 제가 무얼 하든 응원하겠다고 말씀하신 건 아버지시잖아요!”
“그때와 지금이 같으냐! 쯧…… 안 본 사이에 엉망이 되었구나.”
“아버지!”
“그만!”
큰 목소리가 찢어질 듯이 귓가에 울려 퍼졌다.
“다 너를 위한 일이다. 너도 곧 알게 될 거야.”
“아버지, 저는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으니 조금은 기다려 주마.”
“아버지-!”
어떻게든 그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온 아버지의 보좌관은 내 팔을 덥석 잡고서 문밖으로 이끌었다.
“아가씨, 가시죠.”
힘이 세게 들어간 것은 아니었지만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그 목소리가 너무도 소름이 돋아, 나도 모르게 그 발걸음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쿵, 문밖까지 끌려 나와 문이 닫히고서야 정신이 든 나는 나를 잡아끈 그 손을 휙 뿌리쳤다.
“잘도 백작 영애의 몸에 손을 대네요.”
“저는 백작님의 사람입니다. 백작님께 불편한 사람을 떼어 내는 것도 따지자면 제 일이죠.”
능글맞은 목소리에 절로 미간이 구겨졌다.
“저는 아버지의 딸이에요. 제가 불편한 사람인가요?”
그는 방 안을 가리키며 ‘조금 전 상황은 뭔데?’ 하는 시선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사람 간의 관계에 혈연은 아무런 상관이 없죠.”
짜증 날 만큼이나 제멋대로인 대화에 머리가 뜨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됐어요. 아버지께서 진정하시면 다시 오죠.”
내 말에 보좌관은 또다시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원하신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