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화창한 오후의 햇살을 받은 베리안과 그녀의 호위, 일러는 시간에 맞춰 번화가의 어느 한 카페에 들어섰다.
“공작님!”
그곳에 먼저 자리하고 있던 공작은 내가 다가서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셨습니까.”
“공작님도 일찍 오셨네요.”
지난번 편지를 받은 이후로 한번 만나야 하기는 했기에 마련한 자리였지만, 그동안 레이즌의 일로 가끔 연락을 주고받아서 그런지 이전에 만났던 것보다도 편해진 느낌이었다.
우리가 인사를 나누자 공작이 먼저 주문해 둔 음료들이 나왔다.
내 것으로 받은 에이드를 쭉 마신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해야 한다던 이야기가 뭔가요?”
음, 잠시 침음하던 공작은 상체를 살짝 내 쪽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오늘 바쁩니까?”
응?
내가 오늘 바빴나, 딱히 할 일은 없었던 것 같은데.
“아니요, 그다지 바쁘지는 않은데.”
내 말에 공작은 만족스럽게 싱긋 웃어 보였다.
“그럼 급할 거 없겠네요. 천천히 하죠.”
“네?”
“만나자마자 본론으로 들어가는 건, 너무 급하잖아요?”
나를 보는 자안이 묘하게 반짝이며 이내 눈꼬리를 휘었다.
“아, 죄송해요. 그냥 궁금해서…….”
그의 대답에 멋쩍어진 것도 있었으나 잠시 그의 미소에 아무런 반응을 보일 수 없어서, 나는 아무 죄 없는 에이드를 휙휙 저어 댔다.
그 모습에 공작은 가볍게 웃음을 뱉어 냈다.
“농담이에요. 그리 큰 문제도 없는 와중에 불렀으니 궁금한 게 당연하죠.”
그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 공작은 나지막이 말했다.
“제가 영애를 부른 이유는, 혹, 제가 영애께 잘못한 게 있나 해서요.”
“예?”
응?
당혹스러워졌다.
내가 그에게 뭘 했었지. 아니, 애초에 뭘 하긴 했었나.
레이즌에서 만나 파트너가 되고 도움을 받아 인력을 지원받았다.
그리고 또 뭐가 있지?
빙빙 돌아가는 정신을 간신히 발목만을 붙잡은 채 지켜 가다 결국 머뭇거리며 한마디를 건넸다.
“제가 무슨 잘못을……?”
“아니, 영애의 잘못이 아닙니다.”
내 답에 공작은 급하게 내 말을 막고는 픽 옅은 숨을 뱉었다.
“분명 저는 사업 파트너라는 명목으로 제안을 받아들인 건데, 저는 몇 사람들을 추천하기만 했지, 그와 관련된 일들은 전부 영애가 맡으시기에.”
……?
공작은 곁에서 가져온 몇 종이 뭉치 중 가장 위에 올려진 것을 빼냈다.
“이건, 신문?”
신문의 가장 큰 부분인 1면을 지나 2면으로 넘어가자 이번에 진행했던 레이즌의 일이 적혀 있었다.
“어…….”
“파트너가 모르는 채로 진행되는 일도 있습니까? 솔직히 기사를 보고 조금 놀랐는데요.”
“아, 그, 죄송해요.”
생각지도 못한 점에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죄송할 일은 아닙니다. 그러라고 한 말도 아니고요. 그저 제가 맡은 역할은 해야 하는 성격이라. 제가 영애의 파트너가 된 이상 영애에게만 일을 떠맡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제가 조금은 도움이 될 수 있을 테니.”
오해가 풀렸나 눈치를 살피는 듯이 나를 바라보던 공작은 내가 이해했다며 반응하자 제 옆에 둔 나머지 서류를 꺼내 들었다.
척 보니 대부분이 결재 서류들인 것 같았다.
“잠시 레이즌에 들러 단순한 서류들을 조금 받아 왔습니다.”
관리자들마저도 그것을 제게 쉽게 넘기지 않았다며 고개를 젓는 모습에 작은 웃음이 터졌다.
척 보기에도 꽤 많은 양의 서류들이 책상 위를 채웠다.
하지만 나는 아직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상황은 그가 나서서 레이즌의 일을 돕겠다고 하는 건데.
그가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괜찮으시겠어요? 공작님은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으실 텐데.”
조금은 걱정스러운 투로 그의 반응을 살피자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또 그 묘한 미소를 띠었다.
“책임지지 못할 일이었으면 제안을 받아들이지도 않았겠지요.”
사그락거리는 은빛 머리칼, 나를 보는 눈빛이 만들어 낸 분위기에 순간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과 일을 나눈다, 라. 솔직히 기대도 하지 않은 일이었다.
공작과의 파트너.
‘대뜸 사람을 빌려 달라 하기 뭐해서, 일단 붙이고 본 사족. 정말 딱 그 정도였는데.’
물론 그의 도움을 받아 아쉬울 건 없었다. 되레 내게는 너무 좋은 조건이었다.
어린 나이에 계승권을 잇게 된 그가, 눈을 빛내는 다른 가신들을 괜히 허수아비로 만든 게 아니었다.
전대 공작을 능가할 정도의 통솔력과 지휘력.
그것들이 기반이 되었기에 그가 다른 이들에게 권력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덥석 믿기에는 내 삶 또한 그리 평탄하지는 않았다.
믿던 귀족의 배신, 친하던 이들의 나를 향한 온갖 유언비어, 마지막으로 잡은 손에게 버림받은 일까지.
공작은 그 삶으로 제 지휘와 명예를 가졌지만 나는 무엇을 가졌던가.
내 모든 관계에 대한 의심, 고작 그거.
“제안은 정말 감사하지만, 제가 아직은 조금…… 불편할 것 같아서요.”
그와 만난 시간은 두 달도 채 되지 않았다.
후작은 세 달, 영애들은 1년 반, 헤일론은 2년 동안 내게 신뢰를 쌓았었다.
‘그런데 그들이 모두 어떻게 되었더라, 결국 전부 나를 떠났는걸.’
공작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상황이었더라도 썩 기분이 좋을 상황은 아닐 듯했다.
‘일전 계약서를 작성해 파기하지 못한다는 게 다행인 건가.’
“그렇군요. 확실히 저희가 보낸 시간은 너무 짧았지요. 제가 너무 성급했나 봅니다.”
공작의 낮은 목소리가 테이블 위로 깔렸다.
“저…….”
“그럼 지금부터 노력하면 되겠습니까?”
“네?”
저도 모르게 고개가 확 올라가며 그를 바라보았다.
푸른 두 눈동자 안에 박힌 의심 따위는 사실 별게 아니었다는 듯이 보이는 그의 미소는 생각보다 더 진한 자줏빛이었다.
“아직 서로 믿기에는 힘드니, 관계가 쌓일 수 있도록 노력하면 괜찮을까요? 영애께서 저를 믿을 수 있도록.”
잠시 기분이 이상했다.
일전에 내가 그에게 다가갔을 때, 우리 가문에는 레이즌을 관리 감독할 이들이 없으니 문제였고, 때마침 내게 고마워하는 그가 눈에 들어왔다.
무턱대고 사람들을 내놓으라고 하기에는 뭐해서 파트너란 이름을 가져다 붙인 것뿐, 다른 방면에서 그의 도움을 받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는데.
그래서일까, 직접 나를 돕겠다고 나서는 그의 말에 이상하게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믿을 수 있는 관계. 나는 그를 믿어도 되는 걸까.
잠시의 고민 끝에 내 대답이 결정되었다.
“감사해요. 대신 레이즌의 일은 간간이 저와 상의하는 것부터 시작하고 싶어요. 그래도 될까요?”
내 답에 공작은 입꼬리만을 가볍게 올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그 말을 마치고 우리는 우선 자리를 옮겼다.
이왕 만나게 된 김에 앞으로 어떻게 일을 할 건지 시험 삼아 몇몇 자료를 둘러보기로 했다.
사방이 뚫려 있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여러 정보를 늘어트려 놓을 수야 없으니 주변 건물의 VIP실에 들어섰다.
그곳은 공작이 가문의 인장을 보이자 쉽게 출입할 수 있었다.
푹신한 소파에 자리한 뒤 그가 가져온 서류 중 내가 원하는 몇 가지를 골라 그에게 건넸다.
대부분이 단순히 이익과 손해, 공금 등의 자료들뿐이었다.
내가 건넨 몇 서류를 읽어 본 공작이 말했다.
“자료상의 오류는 없고 위치랑 상황에 비해 이익이 아쉬워 보이는 점이 있습니다.”
“그런가요?”
부족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하긴 이 정도면 웬만한 상단에 수익으로 지지는 않을 테지만, 고위 귀족들의 잦은 방문과 번화가 한가운데의 위치가 뒷받침하는 수준이라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기도 했다.
“레이즌은 번화가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지요. 그 부근은 상업을 주목적으로 삼는 곳이라 경쟁이 센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곳은 분위기를 타기도 힘든데 레이즌은 이미 그것을 탄 시점이니 지금보다 더 확장해도 좋을 것 같은데. 영애는 어떻습니까?”
지금도 고위 귀족들이 들어서고 있으니 그리하기에 좋은 상황인 건 맞지만 나는 레이즌을 이대로 가만히 두고 운영만을 한대도 저절로 더 성장할 것을 알았다.
굳이 손을 쓰는 건 확실히 비효율적일 수도 있을 텐데.
“지금으로서도 나쁘지 않은 상황인데 굳이 더 발전시켜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명목상 사교 클럽이고 귀족들이 서로 만남을 가지는 게 목적인데 여기서 더 무얼 할 게 있을까요?”
내 말에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사교 클럽에 더 손을 쓸 이유는 없지요.”
“……? 분명 조금 전에는…….”
“그래서 영애만 괜찮으시다면 레이즌을 바꾸고 싶습니다.”
레이즌이 사교 클럽인데 사교 클럽은 손을 안 쓰고 레이즌을 바꾸겠다는 게—
잠시 고민에 빠진 뒤에서야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레이즌을 사교 클럽이 아닌 다른 상단으로 키우고 싶다는 말이세요?”
“정확히는 클럽을 겸비한 상단도 나쁠 게 없다는 거죠. 클럽에 들어오는 외국 무역상들만 수두룩한데, 이것만 두기에는 너무 아깝잖아요?”
레이즌을 상단으로 키우는 건 생각도 못 해 봤는데.
내가 고뇌에 빠지자 공작은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영애께서 원하시지 않으신다면 저도 괜찮습니다. 무엇이든 결정권은 영애가 가지고 있으니. 실제로 지금 수익도 나쁘지 않으니까요.”
응, 좋은 제안이었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많은 부귀영화를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우리 가문을 일으킬 정도면 충분해서.
나는 거절의 의미로 말없이 웃어 보였고 그것을 이해한 것인지 공작은 제가 들고 있던 서류를 다시 봉투에 집어넣고는 이내 미소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