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내 같지도 않은 되물음에 엘리가 반응하기도 전에 나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사레가 들렸다.
마시던 차를 급하게 내려놓은 뒤 아직 진정하지 못한 가슴께를 두드리고 있자 두 눈을 크게 뜬 엘리가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괘, 괜찮아요? 미안해요, 베리안.”
나 못지않게 놀란 듯이 보이는 엘리는 내게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수건을 들려 주었다.
그것으로 입가를 가볍게 닦아 내며 숨을 돌리자 그제야 얼굴에 열이 올랐다.
“괜찮아요. 잠깐 놀라서 그래요.”
그 말에 엘리는 한시름 놓은 듯이 도로 제자리에 앉았다.
나쁜 뜻은 아니었나 보네.
“일단 답을 하자면 저는 황태자 전하와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하지만 요즘 소문들이…….”
“그건, 일이 조금 있어서요. 이제 다 해결되었어요.”
말을 마친 내가 그녀를 보며 싱긋 웃자 엘리는 잠시 혼란스러워했지만 이내 눈치껏 다음 말을 묻지 않고 나를 따라 미소 지었다.
“그럼 베리안은 마음에 둔 영식이 있으신가요?”
엘리는 연애사를 좋아하는 건가?
무언가를 기대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엘리에게는 미안했지만 나는 지금까지도 딱히 이렇다 할 감정을 느낀 이가 없었다.
회귀 전에는 헤일론만을 쫓아다녔고 회귀 이후로 헤일론만을 열심히 피해 다니느라 바빴기에 그런 것들은 고민해 볼 시간이 없었으니까.
“글쎄요, 전 딱히, 엘리는요?”
엘리는 애인이 있을 거라는 내 예상을 깨고 제 찻잔을 들어 보이며 빙긋 웃었다.
“저도 아직 지금 생활이 좋아서요.”
이후로도 우리는 서로 가벼운 이야기들을 여럿 주고받았다.
그녀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재미있었고, 그 덕에 우리가 이야기하는 사이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시계를 보자 어느덧 시침은 예상 시간이었던 5시를 훌쩍 넘어가 있었다.
“아, 시간이 너무 늦었네요. 이제 저는 가 봐야겠어요.”
“아, 그런가요…… 아직 해 주지 못한 이야기들이 많은데.”
대체 알고 있는 이야기가 몇 개인 거야?
지금까지 내가 들은 이야기가 전부 사실이었을까, 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자 엘리는 짐짓 아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다음에 또 이런 자리를 마련할 수 있을까요?”
그녀의 시선만 보면 나는 이제 더 이상 그녀와 만날 수도 없는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당연하지요, 다음번에는 저희 저택으로 와 주세요.”
내 말에 엘리는 축 처진 눈썹을 쫑긋 세웠고 곧 다시 빙긋 미소를 그렸다.
“예의상 하는 말은 아니죠?”
“물론이에요.”
“빠른 시일 내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고개를 주억거린 난 ‘다음에 봐요’ 하는 인사를 전했고, 저택 앞까지 데려다준다는 엘리의 말을 한사코 거절하고는 처음 이 방을 들어올 때 사용했던 길로 걸어갔다.
재미있는 시간이었지. 언제쯤 엘리를 초대할까 생각하다, 문득 조금 전 사용했던 그녀의 손수건을 돌려주지 못한 것이 떠올랐다.
지금 아니면 너무 오래 걸릴 텐데…….
결국 입구에서 발걸음을 돌린 나는 다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방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지금쯤이면 그녀는 없더라도 남은 식기를 정리할 하녀들은 있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문고리를 잡고 돌리던 찰나.
“……는데?”
들어가려던 방 안에서 누군가의 작은 목소리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작게 들려온 너무도 익숙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숨을 죽인 채 문 틈새로 그 목소리의 주인공들을 확인했다.
“?”
문 안의 상황에 집중해 희미했던 형태가 뚜렷해지자 날카롭게 상대를 쏘아보고 있는 엘리와 그 앞에 서 있는 비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게 처음부터 잘 넘겨줬어야지.”
내가 알던 것과는 많이 다른 비안의 모습과,
“정리할 때 네가 잘못 확인한 건 아니고? 네가 하는 일마다 실수를 하지 않은 적이 절반을 못 넘어.”
몇 분 전과는 달리 미소를 띠지 않는 엘리의 모습에 머릿속이 뒤죽박죽 섞였다.
“……이번에는 정말 내 실수 아니거든.”
투닥거리는 말이 몇 차례 오고 가자 엘리는 비안의 마지막 답에 지친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고,
“베리안?”
이내 그들을 바라보던 나와 눈이 마주쳤다.
“영애?”
벌떡 일어선 엘리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는 비안. 그리고 들어서기도, 나서기도 애매한 위치의 나.
두 사람이 놀란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자 그들의 모습에 당황한 나는 두 사람에게 잘못을 걸린 듯해 괜히 머쓱해졌다.
진짜 아무것도 못 본 척 나갈까.
“그, 손수건을 돌려드리려고 왔는데…….”
말도 안 되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훑고 지나 겨우 내뱉은 정직한 한마디에, 세 사람의 기운이 쭉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