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태자, 나는 당신이 싫어 (16)화 (16/61)

〈16〉

다급하게 내려온 모양새인 헤일론의 보좌관, 데일은 나를 이전과 같은 알현실로 이끌었다.

내가 먼저 도착해 그를 맞이했던 전과 달리 그는 이미 자리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국의 두 번째 태양을 뵙습니다.”

먼저 고개 숙여 인사한 나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서는 당혹스러움이 한눈에 읽혔다.

“영애가 여기엔 어쩐 일로…….”

정말 모르는 건가 모르는 척하는 건가.

내게 질문을 건넨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나는 아무 말 없이 마부를 시켜 가져온 물건들을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 모든 것들은 그가 내게 보내왔다는 것들이었다.

물건들이 차곡차곡 탁자를 채우고 나서 마부를 물리자 탁자 위 물건들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던 그의 눈썹이 작게 꿈틀거렸다.

“이게 다 무엇입니까?”

상체를 일으킨 그는 내가 올려 둔 물건에 하나하나 시선을 두었다.

그 모습에 괜히 매섭게 목소리가 나갔다.

“무책임한 소리 하지 마시지요. 전하께서 제게 보내신 것들이 아닙니까.”

헤일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무언가를 생각하듯이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답을 회피하려는 듯한 그의 모습에 더 기다릴 생각도 사라진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모르는 새에 물건들을 보내고 언질도 주지 않으신 건 예의가 아니라는 것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이번 일을 계기 삼아 다른 것을 바라지는 않을 테지만, 이에 대한 사과는 받고 싶네요.”

그가 순순히 사과를 할 것이라는 기대조차 없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줄곧 참아온 나였으니 오늘만큼은 얼마의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에게서 사과를 받아 내야만 했다.

작게 서린 긴장에 손끝에 조금의 땀이 일던 찰나, 헤일론은 물건들을 살피던 눈길을 거두고서 천천히 입술을 떼어 냈다.

“영애께서 제 부주의함을 감춰 주실 이유는 없지요. 당연히 그것을 바랄 생각도 없고요. 이번 일은 제 실수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영애.”

‘응?’

사과를, 받은 건가.

너무도 쉽게, 그러나 정말 진심이 어린 듯한 그것은 내가 처음으로 그에게서 받아 본 것이었다.

생각보다 너무 빠르게 받아 버린 사과에 괜히 마음속은 가시덩굴처럼 더욱 비틀어졌다.

‘이렇게 잘할 수 있으면서, 왜.’

그에게는 들리지 않을 옅은 숨이 허공에 떨어지자 헤일론은 조심스럽게 잠시 멈췄던 말을 이었다.

“바로 받아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굳이 부담 가지실 것도 없고요. 하지만 이 물건들은, 그냥 받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네?”

반사적으로 터진 목소리는 테이블 위 깔린 물건들 위로 사뿐히 올라섰다.

척 봐도 그 값을 매기기 힘든 드레스 여러 벌부터 수많은 종류의 보석들과 그 이외에 조금 값이 나간다고 할 수 있는 류의 것들은 모두 모인 그들은 한낱 백작 영애의 사치품이라 하기에도 버겁기만 했다.

애초에 그것을 미루고 보더라도 그에게서 받은 것들을 사용할 생각이 없는 게 가장 큰 문제였지만 말이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이런 식의 물건을 사용하는 건 조금 불편해서요.”

사실 이 상황조차도 참 많이 불편했다.

황실에 몇 번을 들락거리는 모습은 이미 대부분의 귀족들 귀에는 들어갔을 터.

안 그래도 성년식에서의 모습이나 소문들로 한층 엮여 버린 관계에 머리가 아프기 그지없는데 대체 어디까지 저를 괴롭힐 생각인 건지.

지끈거리는 머리에 구겨지는 미간을 힘주어 풀어 버렸다.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며 바라본 헤일론은 묘한 표정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너무도 순순히 인정하는 그의 모습에 괜히 내 말문이 턱 막혔다. 그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뭐, 다른 태자비 후보를 찾아 더 이상 내게 집착할 이유가 없어진 걸지도 모르겠네.’

어떤 길이든 내겐 나쁠 것이 없었다. 이제 여기서 끝낼 관계니까.

“그럼, 저는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이 지나가고, 어색해진 분위기에 빠르게 몸을 일으킨 내가 고개를 숙이자 함께 자리에서 일어선 헤일론의 시선이 탁상 위 한자리를 차지한 트리안에서 멈춰 섰다.

“영애는, 그리 태자비가 되기 싫습니까?”

순간 손끝이 크게 움찔거렸다.

분명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그의 표정인데, 왜인지 오늘따라 그 분위기가 조금 더 무거웠다.

나도 모르게 그 분위기에 휩쓸리고 있자니 문득 불쾌하고 또 억울해졌다.

왜 네가 그런 표정을 지어?

현재의 모습과 이전의 기억이 겹쳐져 정말로 목소리를 높이기 직전까지 마음이 격양되었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황태자에게 목소리를 높일 수야 없었기에 그것을 가라앉히려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을 반복해 보았으나,

“예, 싫습니다.”

결국 싫은 소리를 하는 것은 숨길 수는 없었다.

“전하께서 몇 번을 물어보시든 제 답은 같을 겁니다. 그러니 전하도 그만하시지요. 전하 주변에는, 아니 사교계만을 둘러보더라도 저보다 뛰어난 영애들이 차고 넘치잖습니까.”

대체품이었던 나보다 훨씬 우월한 영애들이 수두룩한 곳이 사교계였다. 원한다면 언제든 그의 곁에 설 사람들이.

그가 원하는 게 조용히 자리만 채워 줄 사람이라고 해도, 예비 황후의 자리를 위해 그 정도를 포기하는 이들이 정녕 없었을까? 결코 아닐 것이라고 확언할 수 있었다.

그런 그들을 두고 왜 이리도 내게 집착하는 걸까.

“저는 평범한 백작 가문에 그 가세도 기운 지 오래입니다. 한데 왜 하필 저입니까.”

제발 그 지옥 같은 자리와는 그만 엮이고 싶어.

내 말에 그는 잠시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 이내 미소가 멎은 눈을 돌렸다.

“정말. 왜 하필 영애일까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끝날 기미가 없는 정적만이 흘렀다.

똑똑

다행스럽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보좌관인 데일이 노크와 함께 등장했다.

“전하, 지금 집무실에 손님이 와 계십니다.”

“……금방 가지.”

헤일론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나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알현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심히 돌아가시길.”

그는 데일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리며 내 쪽으로 그를 보냈다.

아마 나를 데려다주고 오라는 뜻일 그의 행동에 고개를 끄덕인 데일은 나를 마차가 있는 곳까지 바래다주었고 나는 그렇게 황실을 떠났다.


 

°˖✧๐·°º✲º°·๐✧˖°
0